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은 같은 착각을 반복하는 듯 하다. 그것은 자동차가 확산되어지던 100여년전에 했을 법한 착각으로 그 내용은 이렇다.
자동차가 흔해지는 미래에는 두 발로 걸어다니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예측을 했던 과거의 사람들이 있다면 21세기 영화를 보고 그들은 놀랄 것이다. 거기에는 그들의 기준으로는 괴물 수준의 몸집을 한 근육질의 남자와 여자들이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기계가 편리해지면 질 수록 오히려 육체의 소중함을 깨닫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고 육체를 관리할 수 있는 조건도 좋아졌기 때문이다. 시설도 지식도 영양면에서도 지금이 옛날보다 몸을 가꾸기가 더 효율적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몸의 중요함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요즘의 몇몇 사람들은 전자 기기가 흔해지고 AI가 발달하면 사람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고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고 인스타그램에 사진만 보내고 있어도, 내가 글을 쓰는 대신에 AI에게 글쓰기를 시켜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같으니까 말이다.
육체와 지능이 별개의 것이기 때문에 지능이 발달한 시대라고 해서 육체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게 되지는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다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세상에는 그냥 지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형태의 지능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들은 구술 지능, 문자 지능, 과학 지능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AI 지능이라고 불리는 것이 중요해 질 것이다. 이 지능들은 모두 중요하다. 하나도 포기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점자로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해도 눈이 필요없는 것도 아니다. 특히 뭔가를 눈으로 보는 경험은 그것에 대해 글을 읽을 수 있거나 말로 설명을 들을 수 있다고 해도 대체될 수 없다. 서로 보완할 수 있다고 해도 5감이 모두 중요하듯이 우리가 여러가지 도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때 그 도구들은 모두 다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문자로 소통할 수 있으면 말로 하는 대화가 필요없는 것이 아니다. 글로 기록된 사실과 말로 전달하는 사실은 논리적으로 같아도 실질적으로는 같지 않다. 그래서 구술 지능과 문자 지능은 다르고 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도 글을 익힐 필요가 있고 글을 잘 쓰는 사람도 말을 하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우리의 정체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다양한 경험에 기반하는데 그 중의 중요한 것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각각의 수단은 결코 언제나 다른 것보다 우월한게 아니다. 기계를 타고 다닐 수 있다고 해도 집안에서는 걸어다니는 것이 좋다. 옆 사람과는 대면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가장 간편하고 따라서 효율적이다. 다시 말해 미래사회라고 해도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모든 일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미래에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집안일을 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시 농부를 보라고 하고 싶다. 물론 가정부 로봇이 언젠가는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귀찮은 농사일도 어떤 사람들은 굳이 직접 한다. 그런데 정말 세탁기에 청소기에 건조기까지 다 있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그런 도구를 사용하는 로봇일까? 뭐든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는 마법의 램프가 있다면 거기에 돈을 벌거나 좋은 직장을 구하거나 내 병을 고치거나 법률적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는게 아니라 방청소와 빨래를 부탁한다고 하겠다는 말인가?
결국 미래에도 글쓰기와 책읽기는 중요하다. 우리는 생각을 전부 AI에게 미룰 수 없다. 생각이 없으면 기쁨도 없다. 나는 지금보다 이런 사실이 미래에 훨씬 더 분명해져서 앞으로 독서와 글쓰기 붐이 일어날거라고 까지 생각한다. 지금의 세대는 어정쩡한 기술발달 덕에 문자로부터 약간 멀어져 있다. 그래서 언어파괴와 글쓰기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자신에게 어떤 일을 하는지를 잘 모른다. 그건 마치 자동차가 새로 나온 것에 기뻐서 전혀 걷지 않는 사람들과 같다. 그러나 좀 지나면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다. 자기 지능의 중요한 부분이 문자에 달려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바보가 아니라면 다시 문자 지능을 연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쓸데 없이 안그래도 스마트 기기에 중독된 아이들에게 태블릿이나 노트북pc로 공부하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도 도움이 될 때가 물론 있겠지만 그런 기구의 사용은 어느 정도 달리기용 트랙을 차타고 달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공부를 하자면 불편한 걸 참아야 훈련이 된다. 누가 언제나 종이보다 태블릿이 좋다고 햇던가.
기술은 점점 발달하고 있다. 그에 맞춰서 사람들은 그 기술과 함께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먹을 것이 많아졌는데 굶어죽을 것처럼 가난했던 시절에 하던대로 있을 때 최대한 먹는다는 방식을 고집하면 건강을 해칠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온갖 기술들이 우리를 편하게 해고 강하게 해줄 수록 우리는 그 기술들을 때로는 일부러 멀리해야 한다. 우리는 때로는 선사 시대 사람처럼 살아야 하고, 때로는 천년전 사람들처럼 살아야 한다. 갓난 아기는 부모가 따뜻하게 안아줄 필요가 있다. 이것은 21세기가 아니라 25세기가 되어도 그럴 것이다. 마찬가지로 독서와 글쓰기는 미래에도 죽지 않는다. 그것 없이는 우리의 지능은 반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제별 글모음 > 교육에 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태인의 교육과 말하기 (1) | 2024.03.03 |
---|---|
교권이란 무엇인가? (3) | 2023.07.21 |
수학 시험을 잘보는 방법 (0) | 2023.01.28 |
교육과 놀이 (0) | 2023.01.03 |
한국교육의 본질적 문제 (0) | 2019.07.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