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안소니 기든스 제3의길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1. 7. 4.

제3의 길은 미국의 빌클린턴에 의해 본격화되고 영국의 토니 블레어에 의해 주창된 이념노선으로 안소니 기든스가 제3의길이라는 책으로 정리제안한 것이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전통적 사회주의도 자유주의도 모두 나쁘므로 그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 책이 나온지는 10년이 넘었다. 그러나 한때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화제로 삼았으며 한국에서도 뉴라이트 운동, 신좌파운동이니 하는 사람들이 이 것을 많이 참조했다고 한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본 이책에 대한 나의 감상은 이렇다. 매우 흥미로운 주제들에 대한 논의를 잘 정리한 책 그러나 그 명료함때문에 커다란 답답함이 동시에 느껴지기도 하는 책이다. 

 

지루하게 기든스의 주장을 반복하고 정리하는 대신에 기든스의 책을 읽고 느낀 감상을 먼저 말하고 거기서 이야기를 한두마디 하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고 유익하다는 생각이 드므로 바로 나의 감상으로 넘어가 보자. 이 책에는 질문만 있고 답이 없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왜 세상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과 달리- 정치가 답이 아닌지를 잘 보여준다. 

 

정치의 최소한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든지 간에 그것에 국민 대다수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면 적어도 오늘날 정치에 대해 첫번째로 알아야 할것은 그게 정치로는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는 규칙, 법, 시스템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에는 필연적으로 몰개성화가 따라오고 개인이라는 존재도 어떤 수많은 라디오 제품중의 하나의 라디오라는 식의 의미로 정형화된 의미만을 가진다. 

 

예를 들자면 기든스의 경우를 포함해서 많은 정치가들은, 좌파건 우파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연구에 따르면 여자가 저녁을 굶었을때 남자의 프로포즈를 받으면 그것을 응락할 가능성이 10% 증가한다고 한다. 

 

이건 내가 만든 말이니까 내용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치가들은 사회문제를 다루므로 당연하다는 듯이 통계를 들이대는 일이 많고 그렇게 해서 뭐뭐를 하면 뭐가 좋아진다는 통계나 사례가 있다는 말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이런 저런 시스템을 도입하자고 말한다. 

 

이런 말들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첫째로, 이건 과학이 아니다. 인과관계를 제대로 논할 만큼 정확한게 아니므로 사실 무슨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있는척 하는 것은 오류다. 나는 이런 통계를 만들 수도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거리로 나가면 비가 온다는 통계다. 물론 이것은 결과와 원인을 뒤집은 것이다. 소위 사회과학자들의 통계나 증거란 이와같은 오류를 중간에 가지고 있고 그걸 알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더구나 그들은 대개 그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모든 걸 본다고 해도 어느쪽을 예외적 상황이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상황으로 보는가 하는 것은 매우 주관적이다. 따라서 사회정책을 이야기할때 어떤 과학이론을 구축하듯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은 대개 의미가 별로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래에 말할 것이다. 바로 그들이 뭘 믿는가, 뭘 가정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이 뭘 말하는가 이상으로 중요한것이 그들이 뭘 당연하게 생각하고 말하지 않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그것들이 그들 스스로도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뚜렸하게 말하지 않거나 스스로 어떤 것을 가정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현대사회의 문제는 적어도 상당부분 그들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것들이 만들어 내고 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문제점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그것들이 문제를 키워온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나 좌파는 주로 이 세상의 악은 사회적 계층관계와 경제력의 분포가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가진 사람들이 못가진 사람들을 착취하는것이 사회악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러한 구조를 파괴하는 것이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시장은 인간을 착취하는 구조를 만든다. 그러므로 커다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 인간을 시장에서 해방시키고 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 우파들은 주로 이 세상의 악은 사회조직의 부패에서, 특히 정부조직의 부패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조직은 개인을 압도하고 개인의 당연한 권리와 자유를 빼앗아 간다. 그러므로 개인을 되도록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작은 정부를 지향해서 개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이다. 

 

이 두가지 주장은 언뜻보면 서로 다른 것같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다르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핵심적 주제는 자유 혹은 진화론이다. 자유는 본래 진화론적 시행착오를 통해 행복을 만들어 내고,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사회적 개입이 그걸 망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사회를 파괴할수는 없지만 말이다. 사회주의자나 좌파는 자유시장, 계급구조가 인간을 망치는 것을 막기위해 그 부분을 해방시키자는 것이고 자유주의자나 우파는 정부조직과 규제, 개입이 인간을 망치므로 그 부분을 해방시키자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각자는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여러가지 증거를 들이댄다. 문제는 환경문제나 문화적 정체성, 윤리의 문제, 가족의 문제,등 여러 현대 사회의 다양성이 증가하고 인간환경이 달라지면서 나타나는 문제들은 기존의 좌파나 우파가 이야기하던 문제의식을 넘어서기 때문에 좌파도 우파도 무능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연합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일관성이 별로 없고 일종의 짜집기 비슷한 모습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보통 자유시장을 말하면 우파라고 생각하고 환경보존을 외치면 좌파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역사적으로도 논리적으로 사실이 아니거나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더구나 한국의 좌파나 우파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외국에서의 좌파 우파의 주장과 틀리는 경우도 많다. 자국의 국기보다 성조기를 더욱 열심히 흔들며 열광하는 극우파란 아마도 세계에 드물것이다. 자국의 경제발전이 식민시절을 거쳤기 때문에 친일행각은 별거 아니거나 어쩔수 없다고 자칭 우파가 말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이런 현실의 결과가 바로 좌우 구분이 애매모호해지는 것이고 좌파와 우파의 주장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기든스가 제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20세기를 걸치면서 정치가와 정부의 능력에 대한 불신은 점점 더 커져왔다고 한다. 이는 이러한 근본적 문제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좌파 우파 개념을 정교히 하고 분명히 하려고 하는게 아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 모든 정치적인 이야기가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소수의 지식인이나 정치인이 대중을 지배하기 좋게만드는 것에만 바람직하다. 이런 이야기들을 이런 개념들이 모두 쓸데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즉 사람들의 머리에서 이런 개념을 뽑아내기 위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람들을 세뇌하고 지배하기 위해서다. 제 아무리 선의를 가장하고 실제로 선의를 믿고 있다고 해도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 내는 것은 그것밖에는 없다. 

 

이런 이야기들, 관념들이 하는 일은 결국 개개의 인간들을 그들이 처한 개개의 상황에서 격리하고 무능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당신의 아들이 있다고 하자. 이 녀석이 게을러서 공부라고는 통안하더니 이젠 초등학생이 술도 훔쳐 먹는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의 직접적 반응은 이녀석을 혼내줘야 겠다는 것일수 있다. 그런데 누가 민주적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아이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 왜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있어야 하는가, 왜 자신이 공부라는 짐을 짊어지고 학대받아야하고 왜 자신은 아버지가 마시는 술을 마실수가 없는가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주어진 상황을 좀 더 일반적인 관념과 이론으로 해석하는 논쟁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행동을 합리적으로 결정하기 위한 방법이며 따라서 그런 논쟁이 끝나지 않았다면 각자 믿는 것을 하면 되지 간섭하지 말자는 태도를 취하기 쉽다. 그것이 비록 가족간의 관계라고 해도 말이다. 

 

나는  게으르고 술먹는 초등학생 아들은 '당연히' 혼내 줘야 한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또하나의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 빌려온 말이나 고정된 행동지침은 언제나 실제 상황을 단순화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것에만 매달리려는 태도를 취하면 답을 찾기가 불가능해 질 수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스스로 상황을 느끼고 판단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따지고 보면 그 상황에 대해 가장 많은 경험과 정보를 가진 사람은 그 사람들이며 비록 그것을 전부 늘어놓지 못하고 직관적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어도 그렇다. 

 

이 아들은 알고 보면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해서 혼을 내면 완전히 삐둘어질지도 모른다. 이 아들은 사실 어른의 무관심이 불만이라서 나를 회초리라도 한대 때려줬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관념이나 지침은 대개 지나치게 단순하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메뉴얼대로 하는게 아니라 아이와의 소통에서, 아이를 느끼는 것에서 이뤄진다. 일반론적으로 민주적관계가 좋다는 둥 혹은 그게 나쁘다는 둥, 심지어 체벌은 나쁘다는 둥 그게 좋다는 둥 하는건 매우 부수적이다. 그런데 이론이 상황을 장악하면 부수적인게 본질을 침범한다. 아버지도 아들도 이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아는 가운데도 잘난 사람들이 말해준 이상적인 가족상에 휘둘려서 상황이 나빠진다. 연애를 책으로 배우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일들을 책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기든스가 말하는, 자유주의도 진보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 있다면 그 핵심은 이것일 것이다. 포스트모던한 세상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상황에 직면하고 선입견없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하지만 솔직히 기든스의 책을 읽으면 그는 문제를 과소평가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여전히 어떤 규칙과 모범사례들, 통계들을 나열한다. 세계화, 민족주의, 시민단체의 발전, 생태주의, 공동체주의, 가족의 현재등을 이야기하면서 계속 정치적이다. 즉 탈개인화된 일반론적 규범만 이야기한다. 마치 그런 보편적 규범의 나열이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위에서 말한 좌파와 우파는 그들이 모두 개인을 말살하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서울역에 서있고, 한 사람은 자기차를 가지고 다른 몇명의 가족과 함께 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최선의 길은 뭔가. 누군가는 기차를 타는 것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자동차를 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열심히 사람들은 기차파와 자동차파의 논쟁을 들을수 있다. 그러나 실은 개개인을 보았을때 서울역에 서있는 사람은 이미 서울역에 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서 차를 다시 타는 것보다는 그냥 기차를 타는게 좋을수 있고 가족과 함께 내려가는 사람은 자동차를 타는게 좋을수 있다. 다시말해 정답이 의미가 없다. 상황에 따라 다 다르다. 기차타는 사람이 자동차 타는 사람 욕할 이유가 없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일반론에 휘둘리면 가족의 형태건, 교육이건, 노후생활이건 어떤 정형화된 틀에 빠진다. 요즘은 세상이 복잡하고 빨리 변한다. 제 아무리 머리를 잘쓴다고 해도 정치가들이 탁자에 앉아 이렇게 저렇게 교통정리하고 법안만들어도 사람들이 직면하는 현실과는 다르다. 그나마 사람들이 적응할 시간이라도 주고 규칙을 바꾸면 좋을텐데 몇년마다 시스템을 뒤엎어 버리면 부산 갈 사람이 부산은 못가고 자기집에 돌아갔다가 다시 서울역에 나왔다가 하는 일만 반복하게 된다. 대학수능시험은 이렇게 보는게 좋다면서 몇년에 한번씩 시스템 뒤집으면 고생하는 것은 학생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입시는 로또가 된다. 

 

좌파던 우파던 정치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기본가정은 정치가 세상을 바꾸고 결정한다는 것이다. 후추가 들어가는 요리에 후추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정치는 세상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요리의 핵심이 후추라고 생각하면 요리를 망치게 된다. 이 같은 당연한 진실이 정치를 논하는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서는 종종 지워지고 없다. 그들은 정치가 세상을 좋게 만드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치가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는 세상을 좋게 만드는 수단중의 하나일 뿐이다. 정치만으로는 안되는데 정치가 자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다른 이들의 기회를 빼앗게 된다. 더구나 요즘은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세상을 좋게 만드는데 정치보다 더 중요하고 보다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깨어 있는 개인의 정신이다. 그것이 조금 더 커지면 가족과 같은 작은 집단내의 문화가 되고 더 나아가 한국사회같은 커다란 공동체의 문화가 된다. 그것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질을 결정한다. 정치란 그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요리에 치는 후추정도밖에 안된다. 

 

하나의 집단의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공감대를 소유하고 개개의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들이라면 규칙따위 아무래도 좋다. 사람이 좋으면 인간이 있으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그럭저럭되는 것이고 법도 정치도 제대로 굴러가기 마련이다. 좋은 교육은 모든 상황에 자세하게 대처하는 학칙으로 행해지는게 아니라 좋은 어른과 선생님이 하게 된다. 반대로 법이 굉장히 좋아도 인간들이 틀려먹었다면 그 법시스템은 절대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제 아무리 연애에 대한 자세한 규칙을 따른다고 해도 인간성이 더러운 두명의 남녀가 아름다운 사랑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수는 없다. 그런데 시스템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인간이 실종된다. 사람들은 자꾸 규칙이 세상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관념을 잊어버리고 머리를 비워야 한다. 역사적연원따지고 이런저런 구분따져서 만들어 내는 관념들은 쓸 곳이 없다. 우리는 최소한의 시스템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오직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을 때만 그 시스템은 돌아간다.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깨어있는 한국인이 없는데 행복한 한국이란 나올 수가 없다. 국민들은 썩었는데 대통령하나 잘뽑으면 태평성대 올거라고 믿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깊이있는 삶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모두를 얽어매는게 아니라 자유롭게 해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삶에 대한 성찰이 좋은 세상에 대한 전제조건이다. 

 

자동차를 너무 타서 다리가 허약해진 인간이 있다고 하자. 그에게 힘들면 더더욱 편한 자동차를 타자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스템 안에서 부속품처럼 변하고 상황을 자기 눈으로 자기 피부로 보고 느끼려는 의지가 약화된 인간에게 더 완벽한 시스템을 들이미는 것은 옳지 않다. 부동산 투기를 잡기 위한 좋은 정책도 법도 있어야 하지만 그런 사회 문제가 나쁜 법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틀리다. 바로 그런 태도가 점점 더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문제를 더 크게 만드는 법을 도입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들이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국민들이 홀로 깨어있는 사람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는 대개 일상에 빠져 관습에 따라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의 문화, 지역의 문화, 국가적 문화라는 틀을 소중히 해야 한다. 좋은 문화와 강한 사회적 신뢰가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이다. 이것이 미래로 가는 길이다. 기든스의 주장은 내가 한 말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완전히 반대되고 있다. 그 부분은 안타깝고 답답하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