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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수묵화, 음악 그리고 글쓰기

by 격암(강국진) 2012. 1. 24.

2012.1.24

때로 잘치지 못하는 기타를 팅겨보기는 하지만 애초에 나는 악기를 연주할 끈기가 없었다. 또한 이따금 수묵화를 그렸노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취미를 가진 사람을 부러워도 해보지만 내가 미술에 어떤 재능을 가졌는지는 이미 대학때 동아리 활동으로 다 알아버린 후다. 

 

 

 

 

 

내가 취미를 가졌고 지루해 하지 않고 하는 것이 그래도 있다면 두가지다. 하나는 산책이고 또하나는 글쓰기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고 보니 그래도 나도 가진 것이 있구나하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세상에는 여러가지의 글쓰기가 있다. 새로운 것을 배워 익히고 그것을 정리하는 글쓰기가 있는가 하면 주장하고 싶은 바를 남에게 알리기 위한 글쓰기도 있으며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독백형식의 글쓰기도 있다. 

 

나는 이러한 글쓰기도 가끔한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 느낀바가 사라지기 전에 정리해 두고자 되도록 독후감을 써둔다거나 하는 것이 그것이고 뉴스를 보다가 울분이 생기면 이래서야 되겠냐는 글을 쓰기도 한다. 훨씬 더 자주 있는 것은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하는 글이다. 스스로 이런 질문이 있는데 이게 뭘까하고 물으면 어느새 손가락이 그건 이런 저런거라면서 답을 준다. 생각은 걸으면서 해야 잘되니 발로 하는 것도 같고 앉아서 글을 써야 답이 나오는 경우가 많으니 손가락으로 하는 것도 같다. 

 

이런 글쓰기들을 제외하고도 하게 되는 글쓰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난초를 치고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같은 글쓰기다. 날마다 대나무요 난초를 그려대는 사람은 전에 대나무를 그린적이 없거나 난초를 그린적이 없어서 그리는 것은 아닐것이며 하나의 노래를 부르거나 곡을 연주하는 것은 전에 그런 것을 부르거나 연주해본 적이 없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림과 연주가 세상에 남듯 그림을 그리고 연주를 하는 것은 뭔가를 뒤에 남기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 아닐까. 새로 그려보고 새로 연주해 보면서 자신안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뭔가를 얻거나 알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뭔가를 지우는 평화로운 마음을 경험해 보기 위한 과정이 그 목적이 아닐까. 

 

글쓰기에도 그런 글쓰기가 있다. 사실 생각하면 짧은 글로 지식을 논하는 것이나 요즘 세상의 일에 대해 시시비비를 논하는 글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휴지같은 글이다. 하나의 지식은 항상 거대한 문맥안에서만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짧은 단문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걸 제대로 읽어줄 독자가 없어지기 마련이다. 심지어 두꺼운 책을 써도 나중이 되면 그걸 연구한 사람만 그 책의 문맥을 이해한다. 그러니 짧은 글이야 말할것이 없다. 이것은 시사를 논하는 글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에게 묻고 나의 마음을 표현한 글은 시간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그런 것은 수백년이 지나고 수천년이지나도 여전히 그 문맥을 비교적 쉽게 알수가 있다.  결국 우리는 다 알몸의 인간에서 시작한다는 점은 아주 오랜 시절전부터 똑같으니까. 

 

하나의 난초를 그리듯 하나의 글을 쓰고 또 하루가 간다는 것을 느낀다. 세상 사는거 때로는 너무 어렵다고 느껴지고 때로는 너무 쉽다고 느껴진다. 산다는 것은 항상 불확실성과 마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안식같은 것은 올수가 없다. 이런 저런 걱정거리는 언제나 존재할 것이며 그것을 없애보겠다는 노력은 마치 평생먹을 밥 전부 다 먹어서 나중에는 밥안먹고도 살수 있게 되겠다는 것과 같다. 아무리 먹어도 결국 얼마지나지 않아 배가 고프다. 너무 많이먹으려고하다가는 배탈나기 쉽다. 그래서 사는 것은 어렵다. 끝이 없으니까. 때로는 너무 쉽다는 생각도 든다. 살아있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이 뭔가를 생각해 보면 정말 얼마되지 않는다. 먹는 것과 몸을 움직이는 것에 대해 절제를 가지는 생활습관이 있다면 세상은 그럭저럭 살아질수 있을 것이다. 

 

2012년이다. 2022년에는 내 앞에 어떤 벽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쪼록 너무 골치아프고 아픈것이 아니었으면 한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조금더 절제하고 조금더 부지런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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