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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명, 뇌, 자아

뇌를 이해하는 문맥

by 격암(강국진) 2012.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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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튼의 역학, 다윈의 진화론, 유클리드의 기하학등 역사에 남은 인간의 연구에는 공통점이 있다. 앞에서도 그걸 잠깐 언급했었지만 그 문제에 대해 정리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될것같다. 그리고 나서 그런 연장선상에서 뇌를 이해하는 중요한 문맥이 어떤 것일까를 정리할수 있을 것이다. 

연구의 대상

뉴튼역학에서는 질점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다윈은 종의 기원을 썼으며 유클리드 기하학은 점이라는 것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들의 이론은 모두 질점, 종, 점이라는 것이 어떻게 세상을 만들어 내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질점이라는 것은 크기가 무한히 작으면서 질량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 세상의 물건들은 이 질점들의 합으로 이뤄져있다고 하는 것이 역학의 기본이다. 뉴튼은 질점간의 힘이나 운동을 말하는 법칙을 내세운 후에 그것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합해지는가를 미적분이라는 수학을 통해서 해결해 내었다. 적어도 해결해 낼수 있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다윈은 종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종이란 결국 이 세상의 모든 다양한 생명체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종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종이 어떻게 생겨났고 변화하는가하는 것이 진화론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점을 말한다. 점은 크기가 없는 것이다. 그 점들이 많이 모이면 선이 된다. 혹은 점과 점사이를 이으면 선이 된다. 

질점이나 종이나 점의 공통점은 그것이 무한하리만큼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만 가상의 것이라는 점이다. 물체를 무한히 잘라가면 우리는 원자와 만나며 원자는 다시 더 잘게 쪼개지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가 무를 자르듯이 원자반개로 잘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학에서 나오는 질점은 엄밀하게 말해 존재하지 않는다. 

종도 그렇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종이란게 뭘까는 당연히 불확실한 경계선을 가지고 있다. 사실 모든 것이 그렇다. 어떤 것도 무한히 엄밀하게 정의될수는없다. 우리는 DNA를 알고 있기에 보다 더 엄밀한 종의 정의를 할수 있지만 다윈시절에는 그것도 아니었다. 

점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크기가 없는 물체는 없으니까. 


우리는 종이 변화한다던가 질점이 움직이고 점들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뒷쪽 부분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경향이 있다. 즉 어떻게 변화하고 움직이고 이어지는가를 밝히는 부분이 연구의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종이나 질점이나 점이란건 당연한거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앞의 것이 즉 종이나 질점이나 점들이란게 있다라고 말하는 부분자체가 뒷부분 만큼이나 중요하다. 그것들은 실체가 아닌데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가 아는 세계는 그것들로 이뤄진 것이 된다. 실제의 세계가 그것들로 대체되고 그안에서 법칙을 찾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이해이며 다시 말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문맥이다. 그 대체는 때로 너무나 완벽해서 우리는 거기에 어떤 차이가 있다거나 종이나 질점이나 점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어떤 가정을 도입하는 것이라는 생각자체를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실은 그 부분은 매우 매우 중요한 것이다. 


기하학을 배우면 이 세상은 다양한 도형으로 이뤄져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집 책상, 자동차, 의자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형태를 본다. 그러나 애초에 도형이란 자연에 존재한다기 보다는 인간의 머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자연에는 진짜 원도 없고 진짜 직선도 없고 진짜 점도 없다. 그렇지만 기하학은 여러가지 것들을 엄밀하고 수학적으로 생각해두고 그 결과를 누적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가지를 다시 생각해 볼필요없이 쓸수 있다.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 정리같은 것을 통해 직각삼각형을 만들어 낼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건물을 세우거나 삼각측량을 하거나 하는데 있어서 매우 쓸모 있는 것이다. 우리는 비슷한 것을 질점과 종에 대해서도 말할수 있다. 


뇌를 이해하는 문맥


뇌를 이해한다는 것이 왜 어렵고 팔다리나 심장, 위장같은 것을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가를 우리는 이미 생각했다. 우리는 뇌란 무엇인가에 답하고서 뇌에 대한 이해를 할수가 없다. 뇌가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 자체가 이미 뇌에 대한 이해고 뇌에 대한 어떤 문맥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뇌란 1400 그램쯤 나가는 두부같은 촉감을 가진 기관이라고 답하는 것도 물론 뇌란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김태희나 전지현 같은 유명 여배우를 두고 무게 45킬로그램쯤 나가고 촉감이 좋은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상업화된 인간으로서 여배우를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약과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말하는데 있어서 당신의 몸무게를 알면 당신을 이해한거라고 말하는 사람을 용납할수 있는가? 


우리는 무수한 문맥, 이야기를 말할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 여자에 대해 떠드는 한 남자를 상상할수 있는데 그 남자는 그 여자에 관련된 무수한 그러나 시시한 사실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남자는 비록 3박 4일동안 쉬지 않고 그녀에 대해 이야기할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때로 그 남자가 그 여자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정말 시시하고 의미없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면 말이다. 예를 들어 그녀의 조상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 그녀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이야기도 그녀에 대한 사실이기는 하다. 그런걸 이야기하는 것도 분명 그녀에 대한 이야기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게 그녀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 남자는 그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떠드느라 그녀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방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쉽다. 


이같은 것은 어리석은 남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현대인들은 종종 이러하고 뇌과학 학회에서 발표들을 듣고 있으면 또한 이런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을 피할수 없는 것처럼 느끼는 일이 있다. 


현대인들은 종종 너무 많은 것을 듣고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려고 한다. 문맥에 대한 정리가 없고 퀴즈쇼에서 우승하는 사람처럼 온갖 자질구레한 지식을 머리에 채워서 백과사전이 되려고 한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쌓은 지식의 파편들이 경험속에서 저절로 어떤 하나의 가치관이나 관점으로 응결되기를 기대하기도 하며 그런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도 정도 문제다. 지식 중독처럼 지식을 흡수하느라 바쁘면 관점의 응결은 생겨나지 않는다.


뇌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직업적으로 살아남고자 수없이 많은 것에 대해서 부지런히 데이터를 모은다. 그러다보니 뇌를 이해하는 문맥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적다. 어떤 여자와 사랑에 빠져서 그녀를 좀더 이해해보겠다고 하더니 그녀의 집이나 그녀 집안의 역사같은 쪽으로 빠져서 끝없이 지식의 수렁에 빠져드는 형국처럼 보일때도 있다. 물론 이런게 전부일리는 없지만 워낙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고 경쟁이 높다보니 과학연구도 백년전이나 2백년전처럼 느긋하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나가는 시대가 아니다. 


뭐가 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문맥인가


드디어 결정적인 질문에 도달했다. 뭐가 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문맥인가. 그런 문맥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가지가 있지만 나는 느끼는 생명. 인식하는 생명으로서의 뇌가 가장 중요한 문맥이 아닌가 한다. 즉 우리의 뇌는 어떻게 이 세상을 인식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인식은 단순히 재미로 하는 것은 아니고 생명의 근원적 성질 즉 존재를 유지보존하는 것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다. 물속에 한방울의 잉크를 떨어뜨리면 잉크는 무늬를 만든다. 그러나 그 무늬는 물분자의 열에 의한 간섭에 의해 점점 변해가고 결국 사라진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와다르다. 확률적으로 있을수 없는 오랜 기간동안 존재를 유지한다. 그것은 생명이 환경이 가하는 불확실성과 싸워서 자신의 존재를 지킬수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할수 있다는 것은 환경의 현재에 대한 인식과 미래에 대한 예측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흔들리는 버스위에 서있는 마네킹은 바로 쓰러지지만 살아있는 인간은 몸을 움직여 버틸수 있다. 생명이란 바로 이렇게 흔들림위에서 버텨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도 3자적 시각에서의 접근이 있고 당사자적 시각에서의 접근이 있다. 3자적 시각에서의 접근은 뇌를 바깥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뇌가 이 세상을 보고 어떻게 반응하더라, 바깥 세상은 이런데 뇌의 반응은 이렇더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뇌가 이미 말한 연구들에 속한다. 이것은 뇌를 양파껍질 벗기듯 벗겨가는 연구다. 나는 이런식으로는 뇌에 대한 진정 중요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한다. 


 3자적 시각의 연구에서는 우리는 바깥 세상이란걸 객관적으로 알고 뇌의 상태도 객관적으로 안다. 제3자가 바깥 세상과 뇌를 각각 관찰하는 것이 연구의 기본시작이라서 그렇다. 당사자적 시각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는 바깥 세상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는 오직 감각신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 그것도 매우 혼란스러운 잡음을 포함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깥 세상이 어떤가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 


위에서말한 위대한 이론들의 형식을 따서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우리의 인식은 따라서 그 인식이 만들어 낸 이 세상 역시 모두 감각신호들로 이뤄진 것이다. 감각신호들이 어떻게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인식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어떻게 존재를 유지하는데 기여하는가 하는 원리를 밝히는 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기에 뇌를 이해하는 문맥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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