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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철학의 목적

by 격암(강국진) 2012. 4. 17.

2012.4.17

%나는 최근에 화이트헤드의 관념의 모험을 읽었습니다. 따라서 이글에는 화이트헤드의 말들과 비슷한 것이 많이 등장하는데 따로 일일이 언급하지 않을것이며 제 말과 화이트헤드의 말을 구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은 독후감이 아니라 책을 읽다가 떠오른 다른 생각의 기록이라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버틀란트 러셀은 서양철학사의 서문에서 사람들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우리들이 얼마나 적게 아는지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것이 회의론자로서의 러셀 다운 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회의론자, 실증주의자들은 결국 아무일도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적극적인 삶의 도구로서의 철학은 이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철학은 배우고 성장하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지적해 주는데 의미가 있다. 철학은 우리가 이 세상을 보고 느끼게 하는 틀을 제공해 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을 확장하고 우리로 하여금 보다 행복하고 편안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게 만들어 준다. 이것은 러셀의 답을 포함하는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 

 

철학은 왜 필요한가. 

 

철학이라고 하면 어려운 느낌이 나고 다른 어떤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실 쉽지 않으며 아래에 설명할 이유때문에 실제보다 더욱 어려운 느낌이 들도록 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철학이 필요한가. 그것은 한마디로 철학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있을 수 없으며 산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의미가 없는 삶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따위 하나도 모르지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은 자신이 철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철학의 본질적 소중함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철학이 뭔지에 대해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철학은 살아있는 존재에게 필요한 지혜다. 우리는 그 지혜없이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으며 책을 읽건 말건 철학을 설명할 수 있건 말건 경험과 사색을 통해 철학을 한다. 적어도 견딜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이다. 

 

철학은 우리의 무지와 선입견과 가치판단과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것이며 철학은 우리의 성장과 주변의 환경에 대한 적응에 관한 것이다. 철학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뭘 알고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런 것에 대해 조잡한것이던 복잡한 것이던 어떤 답을 가지지 않고는 우리는 한순간도 무엇도 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이 글을 읽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당신을 칼로 찔러죽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는다면 당신은 살기위해 도망가거나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는 정신불안증 환자처럼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믿지 않고 이 글을 계속 읽기로 결정한다는 것이 이미 하나의 믿음이며 철학이다. 철학은 우리가 뭘 믿는가에 대한 것이며 왜 우리는 이것을 믿고 저것을 믿지 않는가에 대한 것이다. 

 

철학을 하는 닭

 

여기 한마리의 닭이 있다. 그 닭의 앞에는 수없이 많은 닭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매일 매일 죽을 차례를 기다린다. 한마리가 사라지면 모두들 한걸음 앞으로 나간다. 그렇게 해서 매일 아침마다 그 닭은 죽음의 순간, 죽음의 자리를 향해 나아간다. 만약 그 닭이 닭의 삶이란 본래 그러한 것이라면서 매일 먹이를 먹고 매일 한걸음 더 죽음을 향해 나아가면서 어떤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면 그 닭은 분명 철학을 하지 않는 닭이다. 무엇보다 살아있다고 하기도 어려운데 그 닭은 기계처럼 정해진 것을 정해진 대로 할 뿐이기에 도통 생각이란게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없으면 내가 존재한다라는 자의식조차 없다. 보기엔 어쩔지 몰라도 혼수상태나 마찬가지다. 혼수상태처럼 살다가 때가 되면 죽는 것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철학을 하는 닭이란 무엇인가. 철학을 하는 닭이란 욕망을 가진 닭이다. 예를들어 궁리를 한끝에 죽음으로 가는 그 줄서기를 그만두고 그 줄바깥으로 벗어나서 도망가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닭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줄을 벗어나서 도망가라라는 명령이나 지식 자체가 철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 철학 자체라면 그저 남의 명령을 듣고 줄을 벗어나는 닭도 철학을 하는 닭일 것이다. 자신이 궁리하고 벗어나기로 결단을 내리는 과정을 체험하고 실행하는 닭이 철학을 하는 닭이다. 자신이 선택하여 죽기로 했다면 죽기로 한 닭이 철학하는 닭이다.

 

닭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해도 우리는 모두 살아남기 위해 혹은 무언가 소중한 것을 위해 선택을 한다. 특히 현대에서는 매일 매일 매순간 아주 중요한 선택을 많이 하게 된다. 수많은 유혹이 있다. 백여년전의 조선시대 농가에서 매일 매일을 똑같이 살던 인간과는 크게 다르다. 이것이 철학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이유이며 21세기 오늘날 철학의 가치가 매우 큰 이유다. 온 세상이 우리를 철학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으며 반대로 철학하지 않으면 비참해지기 쉬운 때가 바로 오늘날이다. 

 

철학이란 지식이 아니다. 철학을 지식으로 안다는 것은 그 지식을 제공하는 사람, 지식을 많아 가진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긴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살아남는다고 한들 진정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철학이 지식인 것처럼 설명하는데 그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런 길이 사람들을 자신의 노예로 만드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지적인 노예만들기이고 이데올로기의 노예를 만드는 길이다. 그들은 선의를 가장하고 있을 수도 있고 그저 무지하여 선의를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혹은 어쩔수 없이 말을 하다보니 그렇게 이해받는 수도 있지만 대개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부처님이 내가 말한 법이 없다고 말했으며 노자의 첫머리가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라고 시작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철학사에 대한 지식을 아무리 외워도, 유명한 철학자의 말들을 아무리 외워도, 그것만으로 그 사람은 철학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없으며 반면에 철학책 한권 읽지 않아도 철학을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요리를 하는 것과 남의 요리책을 외우는 것과 다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철학은 우리 삶, 우리 체험에 대한 것이며 따라서 그런 것이 없다면, 즉 내부로부터 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다면 평생 철학책을 읽었다고 해도 그 사람은 철학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학문이란 무엇인가

 

철학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철학이 아닌 과학이나 학문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종종 계급이라던가 중산층이라던가 사랑이나 민주주의 같은 말을 듣는다. 여러가지 학문들은 이런 말들을 이용해서 세상에 대한 여러가지 설명을 내놓는다. 예를 들어 국가의 경제적 성장은 계급간의 분배정책에 따라 이러저러하게 결정되어진다 같은 명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혹은 쏘아진 탄환의 운동량은 이러저러하므로 정지된 나무공에 박힐 경우 나무공은 이러저러한 속도로 움직이게 된다와 같은 명제를 만든다. 

 

그런데 이런 학문적 설명이란게 뭔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그리고 어떤 의미로는 뭔가 유령같은 것이란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나 계급이란게 뭘까. 우리는 사전을 찾거나 어떤 저명한 학자를 찾아서 그게 뭔지 설명을 들을 수는 있다. 그러나 실은 궁극적으로 그런 단어들이 뭔가는 설명되어 질수 없다. 왜냐면 설명은 항상 무한히 근본적인 것에 대한 것으로 빠져나가거나 순환논법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가 뭔가를 물으면 A는 B로 설명되고 그럼 B가 뭐냐고 물으면 B는 C로 하는 식으로 계속된다. 그래서 결국은 설명이나 정의가 없는 것이 남는다. 그렇지 않으면 순환이 되어 남자는 여자가 아닌 인간이라고 말해서 여자가 뭐냐고 물으면 여자는 남자가 아닌 인간으로 대답되는 순환적 설명만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은 이런 말이 놀랍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인간의 언어가 모두 그렇다. 한국어건 일본어건 영어건 모두 정의가 없는 말들이나 순환적으로 정의된 말들로 채워져 있으며 오직 그 말을 실제 생활에서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그말들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모든 학문은 말하자면 조직화된 새로운 언어다. 물리학도 경제학도 생물학도 사회학도 다 하나의 언어다. 우리는 여러가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여러가지 개념들을 연결하는 법칙들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런 개념과 법칙들을 통해 이 세상을 설명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문법을 따르면서 앞산이 이러저러하게 생겼다고 설명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인간을 묻는다에서 제이콥 브로노우스키가 말하듯이 그리고 화이트헤드가 관념의 모험에서 비슷하게 다시 말하고 있듯이 과학과 문학은 모두 언어이며 다만 다른 종류의 언어다. 

 

모든 학문이며 문학이 언어라는 사실의 의미를 좀더 살피기 위해 이런 것을 보도록 하자. 우리는 온도라는 관념 혹은 개념이 단단한 실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온도라는게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온도라는게 뭘까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감각적으로는 뜨겁다와 차갑다같은 감각과 관련이 있으며 물리학적으로는 많은 입자들의 통계적인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원자 한개의 온도는 얼마인가, 신경세포는 뜨거워하는가 같은 질문은 의미가 없다. 마치 우주공간에서 북쪽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지못하듯 매우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같은 말들은 실은 어떤 경계를 넘어가면 의미가 없어진다. 

 

공리주의란 다수의 더 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리주의란게 뭔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행복이란게 뭘까. 그걸 어떻게 잴 수 있을까. 행복이 뭔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두사람의 행복을 더한다고 하는것이 뭘 말하는 것일까. 다수의 행복이란게 뭘 의미하는 것일까를 생각하다보면 여기에도 근원적인 불확실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모든 학문적 언어는 모든 개념들이 그렇하듯이 애매함을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저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의미가 분명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사랑도 민주주의도 자유도 매우 소중한 것이지만 사실 다 애매하고 정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의 언어활동에는 그 밑에 어떤 가정, 습관, 선입견이 깔려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가정이나 선입견은 너무나도 근본적인 것이라서 우리는 거기에 어떤 가정이 있다는 생각자체를 하지 못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같은 가정을 믿고 계속 그것을 당연시 하면 어느새 어떤 가정이 있다는 생각자체가 없어진다. 다시말해 죽음으로 가는 줄에 서있는 닭들은 그 줄을 벗어나는 선택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자체를 하지 못하고 그 줄을 따라가서 죽는 것이 닭의 당연한 삶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 한국어 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국어라는 줄에 갇혀서 그 바깥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한국어라는 언어의 바닥에 깔려있는 가정을 꽤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학문이란 지적활동이며 우리가 어떤 가정과 습관을 강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지적인 조직화가 명료해 지는 경향이 있다. 조직화의 명료화란 그 가정아래서 펼쳐지는 세계의 일들에 대해서 더욱 간단명료한 설명을 제시할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공적인 지적활동이나 이데올로기는 거꾸로 사람들로 하여금 더더욱 세상을 좁게 보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세계, 당신의 세계

 

철학에 대한 고민은 사람들이 같은 세계에 사는 것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의미로 우리는 모두 환각적인 자신의 세계에 살고 있다. 여기 한 아이가 자신의 못생긴 얼굴을 놀리는 동급생들때문에 매우 괴로워하고 있다고 하자. 이 아이는 그런 괴로움속에서 자기와 자기의 동급생들로 이뤄진 세상에 갇혀 있는 것일 수 있다. 이 아이는 가능한 선택지가 그 동급생들을 막던가 참던가 아니면 자신이 자살이라도 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 아이가 보고 느끼는 세계는 실질적으로 그런 정도의 선택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어느날 아프리카에서 굶어죽어가는 아이들을 보고 왔다고 하자. 그리고 이 아이는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사람은 살며 학교를 다니기는 커녕 당장 먹을 물, 당장 먹을 음식조차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가능성을 당연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자살을 하느니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면 될거아니냐고 말하기 쉽지만 좁은 세계에 있는 아이는 학교를 그만둔다와 같은 선택이 존재할 수 있으며 학교바깥에서 자신이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자체를 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 아이를 어리석다고 말하기 쉽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을 절대적으로 옳으며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아이를 두고 어리석다고 말하면서도 누군가가 나를 욕하거나 나를 경멸하거나 침을 뱉는다는 이유로 점점 더 흥분해서 칼부림이 나는 극단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장자에서는 빈배의 비유를 통해 이것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내 배에 어떤 배가 부딪혔을때 거기에 사람이 타고 있다면 화를 낸다. 그러나 그것이 빈 배라면 화를 내지 않는다. 내가 받은 피해가 같아도 우리의 반응이 크게 다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세상의 인과를 어떻게 파악하는가의 문제다. 

 

철학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세계의 확장에 대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보다 만족스럽게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더 넓은 세계를 추구한다는 노력이 진정 넓은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확장은 하나의 생명이 성장해서 점점 더 큰 생명이 되어가는 것과 같다. 항상 외적 자극과 내부적으로 가진 것이 서로 반응하면서 커지는 것이지 고의적으로 자신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면 그 생명은 죽고 만다. 나무가 빨리 크기를 바래서 그 나무를 억지로 잡아당긴다고 그 나무가 빨리 자랄 리는 없다. 또한 더 큰 나무가 빨리 된다는 것이 그 나무의 행복과 반드시 같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성장을 체험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대단한 청장년기가 있다고 해서 불행했던 소년기가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당장 아내의 기분을 풀어주거나 자식들 가르키는 것을 고민해야 할 순간에 보다 큰 세상을 꿈꾼다면서 세계평화나 고민하고 있다면 옳은 일이 되지 못할 것이다. 

 

철학의 만족도

 

철학은 우리가 그 존재를 느끼기 어렵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근본적인 가정들을 인지하고 점검하고 수정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일상을 넘어서면 철학적 사고는 매우 괴상한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즉 현실이 뭔가, 존재가 뭔가, 신이 뭔가 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런 복잡한 생각들을 해야 할까? 그렇게 해서 무슨 만족을 얻는가? 

 

철학이 주는 한가지 만족에 대해 말하기 위해 코리올리의 힘을 말해 보자. 코리올리효과란 지구자전때문에 움직이는 물체가 휘어져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코리올리 효과때문에 욕조의 물은 점점 돌면서 수채구멍안으로 빠지게 되고 포탄을 쏘면 그것이 휘어져서 날아가게 된다. 우리가 우리는 단단히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땅위에 있다고 한다면 물체에는 코리올리의 힘이라고 불리는 힘이 작용하는 것으로 세상 물체들을 기술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뉴튼의 법칙을 수정해서 보정항을 넣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지구가 자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상황에 대한 기본적 가정을 수정하는 순간 우리는 훨씬 단순한 뉴튼의 운동방정식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코리올리효과는 관찰되는 생생한 것으로 환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관점에 따라서 마치 코리올리효과는 환각처럼 느껴지며 어떤 의미에서 실제로 그렇다. 

 

철학의 만족도란 우리가 기본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가정했을때 이 세상이 얼마나 명확하게 보이는가에 대한 것이다. 물론 지구의 자전은 우리가 가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관측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계의 진실된 모습에 근거해서 사고하면 가장 올바르게 사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우리는 하게 된다. 그러나 과학과 생각의 근저에 이를정도로 사고를 파고들면 이미 그것은 관찰의 영역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뭔가를 관찰하기위해서 어떤 가정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어떤 것을 가정해 놓고 행한 관찰의 결과를 통해 우리가 우리의 가정이 옳은가를 논하는 것은 순환논리일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관찰로 그것을 결정할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은 소위 형이상학, 메타피직스의 문제가 된다. 

 

근원적인 것은 기묘하고 복잡해서 그저 평범한 우리와는 관련이 없어 보일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리는 물질이라는게 뭔지 어리둥절해진다. 생명이라는게 뭔가를 깊이 고민해 보면 과연 생명이 뭔지가 어리둥절해 진다. 그러한 것들은 너무도 근원적인 것이므로 이렇든 저렇든 우리의 일상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어지기 쉽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돈과 시간을 쓰고 있다. 엄청난 돈들이 기초과학에 씌여진다. 우리는 산과 바다를 개발한다. 전쟁을 하기도 한다. 사실 지구가 돌건말건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사람들이 난리를 피우겠는가. 중세 서양의 농노들이 천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근원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일수록 거꾸로 그것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화이트헤드는 관념의 모험에서 플라톤 시대에 제기된 근원적인 가정과 관념은 수천년간동안 서구문명을 변화시켜왔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대단하다고 말하는 현대문명이 바로 그렇게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천년전에 비하면 문명의 변화속도가 몇십배 몇천배 빠를지 모른다. 전에는 근원적 철학의 문제가 세상을 바꾸려면 천년이상이 걸렸을지 모르나 요즘은 한인간의 수명내에 세계가 바뀔수 있다. 한국에서 저출산율이나 이민이나 자살이나 교육이나 FTA나 SSM이나 환경개발문제등이 거론될 때 우리는 어떤 가치판단에 근거해서 대응해야 할것인가. 그런게 당연할까? 수백 수천년간 천천히 변해왔던 4대강유역에서 불과 몇년만에 엄청난 양의 모래를 퍼올렸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모래성을 쌓을정도의 양이다. 과연 철학은 그리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세상은 날로 복잡해만 보인다. 그 복잡성은 마치 코리올리의 힘이 우리가 서있는 기본적 시각에 의해 만들어져서 세상이 복잡해 보이듯이 그래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서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근원적으로 다시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만족스럽지 않은 철학은 인류를 멸절시키는게 가능할것 같은 시대가 되었다. 모두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그것이 쉽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너무도 쉽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일상에 머리를 처박는 것은 더 넓은 세계를 보려하지 않고 죽음으로 다가가는 철학하지 않는 닭의 태도다. 

 

맺는 말

 

한국인에게는 한국인으로서 철학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들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무수한 관습이 있다. 그리고 그 관습은 안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변하는 한국에서 모순을 누적시킨다. 그리고 그 모순은 한국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깨뜨리는 경향이 있다. 극단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이 있는게 아니라 다른 철학, 다른 믿음을 자신의 삶의 기반에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편안하게 공존하면서 서로에 대한 믿음을 키워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지금 한국이 가진 시대적 과제다. 그것이 다문화 문제는 물론 지역감정의 문제, 빈부격차의 문제, 남북의 문제, 여야 정치분열의 문제들에 다 관련되어 있다.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철학이라고 해서 생각과 논쟁에만 빠지지 않는 것이다. 철학은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철학적 입장이 크게 다를 경우 논쟁이 어떤 진전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보다 효과적인 것은 행복하게 살아갈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다. 철학은 마치 문화 전파처럼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논리 이전에 그 철학이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게 철학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을 가지지만 역시 그 출발점은 개인이다.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는 먼저 생각하고 느끼고 자신의 일을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행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자기가 누구인가를 고민한 끝에서 다시 자기와 우리와의 관계를 깨닳는 것이 필요하다. 공동체가 뭔지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고 조심스런 실천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는 것도 필요하다. 그럴때 우리는 한국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한국의 문화가 세계에 기여하게 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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