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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교육에 대하여

영어 공부,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하나.

by 격암(강국진) 2012. 6. 11.

요즘 좀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한국 사람만큼 영어공부에 미친사람도 없고 공부한거에 비하면 영어실력이 별로인 사람도 없다는 이야기가 늘 있었다. 나는 워낙 어학공부를 싫어하고 정말 소질도 없는 듯하지만 어쩌다보니 영어로 논문쓰고 영어로 의사소통하면서 영어에 기대어 외국에서 살고 있다. 이제와 내 영어공부를 되돌아보면서 영어공부 뭐가 문제였는가, 뭐에 도움이 되었는가를 생각해 본다. 


언어는 소통을 위한 것이다. 


기본이 항상 중요하다. 심각한 문제는 기본의 망각때문에 생긴다. 영어뿐만이 아니라 모든 언어는 소통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또한 가장 자주 망각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솔직히 많은 한국사람에게 영어는 시험평가를 잘받기 위한 과목이라고 이해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학교시험이건 취직시험이건 영어를 배우는 기본적 목적이 시험통과에 있기 때문에 도대체 영어를 왜 배우는가에 대한 기본적 질문이 망각되는 것이다. 


언어능력은 세가지로 이뤄져 있다. 쓰기 읽기 그리고 말하기다. 쓰는 것은 남에게 글로서 내 의사를 전하기 위한 것이고 읽는 것은 남이 그 언어로 쓴것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며 말하고 듣는 것은 말로써 의사소통하기 위한 것이다. 


너무 당연한가? 하지만 당연한걸 조금 더 확인해 보자. 소통의 대상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쓰기를 한다면 그것은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거나 외국과 이메일 소통을 하거나 하는 등의 상황에서 필요할 것이다. 특히 잡지나 책을 쓰는데 교육이 필요한데 그런 쓰기는 좀 엄격한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한국어로 책을 쓰거나 논문을 써도 마찬가지다. 문법이 좀 틀리거나 철자가 틀리고 표현이 애매하고 한 것은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편지를 할때는 거의 문제가 안된다. 뜻만 통하면 되니까. 그러나 공식적인 문건을 만들때는 그런게 허락이 되질 않는데 그렇게 되면 쓰기가 훨씬 더 어려워진다. 


읽기는 뭘 읽는가. 당연히 영어지라고 단순히 말하면 생각을 안해본 것이다. 우리는 영어잡지를 읽거나 기사를 읽거나 보내오는 영어메일이나 영어책을 읽는다. 영어를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할때 영어 읽기란 주로 영어권의 고급지식을 가진 사람들과의 소통이라고 할수가 있다. 우리는 막연히 한국신문이나 책들이 외국의 소식중에서 중요한 것을 다 번역해서 전해주니까 이런 소통이 크게 안중요하다고 생각할수 있고 그것은 물론 번역이 양으로나 질로서 훨씬 뒤떨어졌던 수십년전에 비해 사실이겠지만 어디까지나 번역은 나와 소식을 전하는 원저자들 사이에 번역해주는 매체가 끼어들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중간매체는 여전히 엉망이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들은 제멋대로 번역하고 뭘 번역할까, 뭘 널리 홍보할까를 결정함으로서 영어문화권의 일부분을 뒤틀어서 한국어독자들에게 전해준다. 영어원서를 읽는 사람들치고 그 중간매체의 해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더 원천적인 문제도 있다. 경제는 이코노미가 아니고 자유는 프리덤이 아니다. 언어는 원래 일대일 번역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누구나 할수 있으면 원전을 그대로 읽을 것을 권장한다. 영어문화권은 세계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문화권으로 방대한 지식을 축적해 놓고 생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영어를 배우고 직접 그 지식들에 접속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듣고 말하기는 물론 대면접촉을 통해 혹은 전화를 통해 개인과 개인이 접촉하고 소통할때 쓰는 것으로 한마디로 친구를 만드는데 쓴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것이다. 


왜 기본을?


여전히 왜 이런 기본적인 것을 다시 거론하는가를 이해할수 없는 분들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영어교육이란것에 대해 영어공부란것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어를 시험보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소통을 위해 언어를 공부하고 있지 않다. 또한 현실적으로 한시간남짓의 시간동안 시험을 보게 한다는 형식적 제한속에서 시험을 보게하기 때문에 시험이라는 형식은 언어학습의 기본적 원칙을 망각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때문에 영어공부가 더 비효율적이고 더 어려워지며 심지어 영어성적도 안나오게 만든다는 모순이 있다. 이게 꼭 기억해둘 부분일 것이다. 기본을 잊어버리면 시험점수도 결국 안나온다는 것이다. 


시험지와 무슨 소통을 하는가. 만약 시험이 영어 책을 한권주고 하루를 꼬박 줄테니 이책을 읽고 독후감을 영어로 써내시요라던가 구두로 독후감을 발표하라는 것이라면 영어교육의 현실은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바뀔것이다. 그러나 혁명적으로 바뀐다고 한들 그것조차 책을 읽는 것이 독자와 저자간의 소통이라는 근본취지를 망가뜨리는 면이 있다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시험을 보면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저자와의 소통이 아니라 점수를 더 잘받도록 채점자의 취향에 맞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4지선다형이나 단답형 질문들이 죽 늘어서 있는 시험지는 소통의 능력따위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따라서 당연한듯이 지루하고 재미없고 고통스럽다. 사실 그런 시험을 통해 배우는 언어학습이란 내가 보기엔 연애 시물레이션 게임같은 걸 열심히 하면서 나는 지금 연애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도 못하다. 최소한 거기에는 프로그램으로 만든 기괴한 캐릭터와의 교감이라도 있지만 파편화된 시험보기란 언어의 근본을 산산히 조각내놓은 것이다. 


문법좀 틀리면 어떻고 철자가 틀리면 어떤가. 모르는 단어 좀 많으면 어떤가. 그래도 더듬거리며 친구와 대화가 가능하고 거의 반도 이해못하지만 어지저찌 책을 읽으며 내 의사를 전달할수 있으면 그게 진짜 언어다. 그러다보면 시간이 지나면 영어실력도 조금씩 늘어난다. 


나는 한국의 영어교육이 실패하고야 만다는 것에 대한 나름의 과학적인 이론조차 있다. 그것은 거꾸로 교육이론이라는 것이다. 시험은 자꾸 어려운 것, 어려운 단어, 어려운 문법, 어려운 철자를 묻는다. 주로 규칙보다는 언어의 불규칙성에 관련된 것인데 그말은 그런 것들은 일상사에서 사용되는 빈도가 훨씬 더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잘난체하는게 아니라 소통을 위해 필요한 빈도수로 보면 가장 쉬운 단어들과 표현들이 가장 중요하지만 시험은 종종 가장 안쓰는 것들을 문제로 내서 학생의 능력을 테스트한다. 


이렇게 해서 오랬동안 영어를 공부했지만 외국인을 만나면 입이 안열리고 영어원서를 집어들면 읽는 속력이 달팽이보다 느린 학생들이 탄생한다. 쉬운 표현을 여러번 익혀서 즉각 말하게 하는 훈련이 안되어 있고, 단순한 문장을 줄줄이 읽는 것보다는 배배꼬여서 어디가 어딘지 모를 그런 문장을 천천히 분석해 내는 훈련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험에 따라, 교육자에 따라 이런 문제를 약화시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한 개인의 재질과 관심도에 따라 이런 문제가 별로 심각해 지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런 문제에 대한 자각이 선생은 물론 공부하는 학생도 강력하지 않으면 길게 보아 언어학습의 효율성은 지극히 떨어진다. 헛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교육은 영어로 소통하는 친구를 가지게 된다던가 한권일지라도 좀 책다운 책을 -어려운 책일 필요는 없다. 추리소설도 심지어 야한책도 좋다는 주장도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권 거의 쉬지 않고 읽어내는 것으로 종종 큰 비약을 하는데 이는 시험을 근간으로 하는 교육의 해독이 중화되기 때문이다. 진짜로 언어를 쓰는 상황이라서 그렇다. 


언어학습의 왕도는 읽기다.


개인적인 사정에 따라 외국어학습의 목표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 그러나 나는 영어공부는 물론 외국어 학습의 핵심은 읽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읽기에는 포기하기 어려운 매우 중요한 것이 있는데 대개 그것이 충분히 강조되지않는다. 


언어는 소통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쓰기는 나를 표현하는 것이고 읽기는 작가의 말을 듣는 것이며 말하고 듣기는 대면접촉을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것이다. 그렇다고 할때 어떤 것이 가장 훌룡한 사람과의 소통일까? 대개는 읽기일수 밖에 없다. 우리가 역사의 위인이며 노벨상 수상자와 개인적인 면담을 수십시간씩 할수 있을까? 


소통을 통해서 우리는 뭘 얻는가? 단순지식이라면 나는 원서를 읽을 필요가 꼭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건 번역된 것을 통해 더빨리 배울수 있다. 우리가 얻는 것은 사고하는 방식, 관점, 철학과 같은 것으로 때로는 그것이 그 책의 주요목표일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때도 책의 바탕에 그것이 깔려 있다. 


빨강머리앤, 작은 아씨들, 키다리 아저씨같은 책들은 무슨 대단한 철학서는 아니지만 그것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독립적인 인간상, 지식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서양의 방식을 보게 된다. 일상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영어권 사람들의 상식을 보게 된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사람은 3개국어정도는 배우는게 좋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실용적인 목적을 들지 않는다. 그에게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세상을 보는 다른 관점을 익히기 위해서다. 자기와는 다른 관점을 한두개 더 익힘으로써 그는 다른 관점을 알게 될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관점을 바깥에서 볼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그렇게 해서 모든 관점을 같이 보고 비교할 기회를 가질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것은 한개의 문화권안에서 한개의 언어만 계속 쓰고 있는 동안에는 이룩하기 어려운 것이다. 언어와 관습안에 들어있는 모든 가정과 편견을 그 안에서 느끼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아버지로 유명한 독일과학자 하이델베르크는 내전중에 그리스어로 그리스철학자의 책을 읽는다. 대학교를 들어가기 전이었던 그는 그 안에서 그리스인들이 세상물질은 도형으로 이뤄져있었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생각은 나중에 양자역학의 연구에 긴밀히 연결된다. 그가 그리스어 실력을 길러서 책을 썼다거나 그리스사람과 소통을 할수 있었다던가 하는 것이 그리스학습의 결과가 아니었고 그리스 철학자와 직접 소통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많이 읽는 것도 좋지만 내것과 남의 것을 모두 읽어서 그 모든 것을 통합하는 관점을 길러내는 것이 다른 언어를 학습하는 주요한 이유다. 언어는 소통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영어권이라고 한들 한국어를 말하는 사람이 그러하듯이 혼돈된 정신을 가진 사람도 있고 나름대로 정리되어져있는 정신을 가진 사람도 있다. 우린 누구와 소통해서 영어권문화의 정수를 배워야 할까. 대개는 책을 통해야 그런 정신을 가진 저자들과 소통할 수 있다. 이것이 읽기가 언어교육의 왕도인 이유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도 소중한 것을 가르쳐주지만 그것은 또 다른 문맥에서 그렇다. 


맺는 말


세상에 쉬운것은 별로 없다. 가장 빠른 길로 가도 언어학습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너무 바쁘다면서 가장 느린길로 간다. 이 모순은 가장 큰 길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진리를 무시한 결과다. 어떤 학생이 영어를 5년 10년이나 공부를 했는데 뭘 아는가를 보면 그저 파편화된 영어단어들 뿐이다. 아무와도 어떤 방식으로라도 소통해 본적이 없고 소통할수도 없다. 그런데 영어는 부지런히 계속 공부했었다. 


영어공부는 여러가지 기술적인 방법이 있을수 있지만 결국 쉬운것이든 어려운 것이든 책을 계속 읽는 방법밖에는 없다. 원어민과 친구하고 잡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쉽지도 않고 언어학습의 가장 핵심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배우려고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다. 모범적인 언어는 책에 있는 언어다. 책을 읽어라. 계속 저자와 소통하는 것을 시도하라. 그러다보면 다른 것도 어지간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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