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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명, 뇌, 자아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by 격암(강국진) 201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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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은 그 답을 무엇으로 믿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어떤 답들이 세상에 흘러다니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같다. 항상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다. 많은 경우 질문자체를 던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알수 없는 힘에게 스스로를 조종당하곤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은 크게 두종류로 나뉘는데 그것을 자본주의와 종교라고 말할수도 있겠고 물질과 정신으로 말할수도 있을 것같다. 그러나 말이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므로 교회나 절에 간다고 해서 나의 삶이란 정신적인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오히려 그 정반대의 경우가 대부분인것같다. 반대로 돈버는 일에 집중하는 것같은 사업가라도 그가 진정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은 정신일수 있다. 


인간의 근원적 문제


인간이 무엇 무엇으로 산다라고 하는 것은 그 무언가를 우리는 우리의 근원적 문제의 잠정적 답으로 여기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여러가지 가치 판단을 내리게 하는 근원이 된다는 뜻이다. 인간의 근원적 문제란 죽음의 문제, 불확실성의 문제다. 죽음의 문제는 인생의 의미의 문제이기도 하며 불확실성의 문제란 공포와 불안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죽는다. 그리고 죽음을 목격하며 산다. 살아있는 존재가 죽고나면 흙이나 돌처럼 된다. 우리는 애써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잊고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죽음앞에서 우리가 단단한 실체로만 생각했던 모든 것의 의미가 무너지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우리의 친구요 아버지나 어머니였던 그 어떤 존재가 어디로 갔는지를 묻게 된다. 도대체 어차피 죽는거라면 이렇게 아둥바둥하는게 무슨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 애써 죽음을 우리의 의식저편으로 밀어내고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 방법이 없으니까 이렇게 하는게 당연하지 않냐고 주장하지만 그런 주장은 헛소리다. 그건 마치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열차를 탔는데 애써 부산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 나는 왜 거기로 가는지를 묻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방법이 없으니까. 우리는 결국 마치 아무곳에도 안가는척 하면서 살다가 어느 순간 그냥 콱죽는거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 지독한 회의론자다. 죽음의 의미에 대한 완벽한 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 모르고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걸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죽음에 대해 완벽하게 모를거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도 말라는 주장이 올바른 것일까? 그건 마치 은행이 어떤 곳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거기에 저금을 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열심히 돈을 모았지만 막판에 가면 그 돈이 다 사라졌을지 모른다. 실제로 죽음의 가까이에 갔을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은 온통 허구요 낭비였다고 후회하곤 하지 않는가?


그래도 죽음은 저기 멀리에 있는 것이긴 하다. 불확실성의 문제는 우리 코앞에 있다. 우리는 굶는 게 싫고 고통받는게 싫다. 사랑받는게 좋고 배부른게 좋고 따뜻한 집이 좋으며 불안과 공포에 떨고 싶지 않다. 산다는 것은 결국 매순간 우리 앞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것, 즉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 계속 살아남아있기 위해서다. 우리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 불확실성을 해소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는데 실패했을때 우리는 파산하여 비참하게 될수도 있고, 차에 치여서 죽을수도 있다.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지만 몇시간후면 나는 또 배가 고플것이며 그러니까 그때 먹을 것을 마련해 두지 않으면 나는 배가 고파질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것이 바로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때가서 내앞에 먹을게 떨어질지 나는 모른다. 그러니까 먹을 것을 미리 구하고 미리 저장해 둬서 그 불확실성과 싸우고 나를 지키는 것이다. 나를 보존하고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삶의 문제다. 


두가지 해법들 : 물질적 방법


이 세상에는 어떤 의미에서 헤아릴수 없이 많은 해법이 있다. 모든 인간, 이제까지 살아왔던 모든 인간의 삶이 말하자면 인간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해법이자 실패의 기록이다. 그것들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 다르니까 해법의 수는 무한대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거기에는 크게 두가지 방식의 해법이 존재하는 것같다. 이 두가지는 반드시 서로 공존할수 없는 것은 아니며 상호 보완적이기도 하다. 한가지 방법은 물질적 방법으로 위에서 말한 배고픈 사람의 경우처럼 무언가를 예측하고 쌓아두는 것이다. 물질적 방법이라고 하지만 반드시 돈이나 물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나라는 주체를 제외한 모든 것을 미리 예측하고 조절하고 정리해 두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방법에 너무나 빠진 나머지 사실상 이 방법이외에 다른게 존재한다는 것자체를 잊어버린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지식과 물질등 모든 인간문명은 이 물질적 방법에 해당하는 것이니까 이런 모든 것을 다 제외하고 나면 유령처럼 비과학적이고 허무맹랑한 소리만 남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물질적 방법의 해법은 나름의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물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당신은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이 있어서 모든 소원이 다 충족된다면 그다음에는 죽어도 좋다라고 자신만만할지 모르지만 죽음이 코앞에 오면 그 모든 것은 정작 그저 꿈같고 허무하다는 생각에 빠질 것이다. 당신이 현대과학의 모든 결과를 다 이해하고 암기한다고 해도 그것이 당신의 삶과 죽음이 가지는 의미의 문제에 대해 답을 주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물질적 해법은 나라는 주체를 완전히 무시한다. 나라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거나 절대 변화하지 않을 존재인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음식이라도 배탈난 사람에게는 고문이다. 우리가 뭔가를 쌓아서 죽음의 문제와 불확실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면 그건 마치 내몸사이즈는 모르는데 옷을 맞추려고 하는 것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물질적 해법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랄만큼 중년의 위기를 겪을수밖에 없다. 즉 뭔가를 가지면 행복해 질줄 알았는데 점점 어떤 패턴을 보게 되고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방식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모든 것을 가질 수도 없지만 고생끝에 그렇게 했다고 해도 행복해 지지가 않는다. 


주체를 무시하기 때문에 소유한 것이 주체를 짓눌러서 변화시키고 고통스럽게 하는데도 그걸 볼 수가 없다. 마치 너무 먹어서 뚱뚱해지고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내 몸의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는 더 많은 것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되기 쉽다. 그 사람의 눈에는 나라는 존재가 보이질 않는다. 


앞에서 나는 교회나 절에 간다고 해서 반드시 정신적인방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기자신에게서 눈을 돌리기 위해 종교서비스를 쓴다. 부처니 신이니 하는 존재를 끌어다가는 이건 모두 저분들이 해주실거야라고 하면서 삶과 나자신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중단하는 핑게로 삼고 그다음에는 맹렬하게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런 사람들은 가장 물질적인 사람들이지 정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저 더 많이 소유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대상이 신이나 부처다. 


두가지 해법들 : 정신적 방법


정신적 방법이 주목하는 것은 나라는 주체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불확실성에 불편해하는 것도 모두가 이 나라는 주체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그저 나로써 변화하지 않는 존재인가? 나는 어릴때는 된장국이 싫었지만 지금은 좋아하는데 이것은 나의 본질이 변화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나의 비본질적 부분에 불과한가? 


물질적 방법이 옷을 계속 껴입어서 추위에 대처하는 것이라면 정신적 방법은 우리의 몸을 튼튼하게 해서 추위에 견디게 하는 것이다. 물질적 방법에 매몰되어 도대체 나를 찾는다던가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옷을 껴입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서 점점 약해져가는 자신의 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나 같다. 그런 사람이 오래 살수 있을리가 없다.


정신적 방법은 감수성이나 영감이라는 단어를 잘 쓰게 되고 최소한의 것을 소비하는 특징이 있다. 더위의 예를 위에서 들었으니 이런 예를 들어보자.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한다. 그러면 물론 그에 따라서 옷을 맞춰 입어야 할것이다. 그런데 온도를 느끼는 감각은 실종되고 그저 추위에 대한 공포만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 사람은 더운 날씨인데도 추우면 큰일이라고 옷을 잔뜩 껴입었다가 더위에 쓰러질지 모른다. 


자아를 상실한 현대문명속의 인간이란 이런 것이다. 문명속의 여러가지 관습이며 물건들이란 다 어떤 상황에서 필요한 것인데 그 상황을 이해하고 느끼는 능력이 상실되고 그저 습관적으로 살기 시작할때 그 인간의 삶은 점점 더 위기에 빠진다. 상황이 그게 아닌데도 더 많은 소유를 꿈꾸고 자신의 불행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더운날씨에 옷을 껴입고 쓰러지는 사람처럼 자신이 소유한 것에 깔려서 압사하고 만다. 


물질적 방법은 불확실성을 미리 막아버린다. 정신적 방법은 불확실성을 느껴서 대처한다. 환경문제와 신용문제로 고통스러워하는 현대사회는 정신을 잃어버리고 물질에 압사하고 있는것처럼 느껴진다. 물질적 방법은 더 소유하라고 하는데 정신적 방법은 그런 소유가 나를 바꿔버리는 것에 주의하라고 하고 그 소유를 위해서 쓰는 에너지와 시간을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튼튼히 하는데 쓰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그러나 결국 그 두가지 방법은 다시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합쳐진다. 다시 말해 우리가 왜 이렇게 사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구분이 필요로 했을 뿐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 하나다. 예를 들어 여기 소파가 하나 있다고 하자. 그 소파가 얼마짜리고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집의 어디에 놓여지게 되는가 하는 것은 단순하게 물질적이라던가 정신적이라던가 하는 한편의 것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가구의 모양에서 집의 모양, 마을의 생김새에서 나라안의 질서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은 적어도 어느정도까지는 물질이면서 정신이다.


그러나 단순히 뭉뚱그려버리고 말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그것이 왜 본래의 목적, 즉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데 실패하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게 된다. 기울어져가는 문명, 기울어져가는 생활방식은 그 안의 인간들의 시각도 삐뚤어지게 만들어서 모든 것을 정상으로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생명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멈춰지는 순간이 죽는 순간이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그둘의 어떤 조합이든 어떤 살아가는 방식이 필요하고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희망없이는 살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다만 뭘 희망하는가가 문제다. 지나치게 현실에 존재하는 물질을 무시하고 추상에 머무는 사람도 문제지만 어떤 나라의 삶, 어떤 도시의 삶은 지나치게 경직되고 물질적인 것을 추구한다. 사실 그래서는 진짜로 근사한 물질적인 성취도 이룰수가 없다. 근사한 발명이나 과학적 발견의 결과물은 모두 물질적인것이지만 그것들은 정신적 추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예술적 감각이 없는 사람들은 좋은 스마트폰이나 자동차도 못만든다고 하면 분명한 예가 될까?  


단지 물질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질적 방법에 빠진 사람들은  주체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어떤 관습, 법칙, 시스템탓으로 말한다. 교육이 잘못되고 있다면 그것은 물론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교육자와 부모와 교직원과 그 마을 사람들의 문제다. 그사람들이 책임져야 하는 문제다. 우리는 네모단 삽으로든 둥근 삽으로든 땅을 팔수 있으며 시스템의 개혁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시스템을 돌리는 사람의 의지와 관점이 결과를 만든다. 그런데 걸핏하면 자꾸 시스템이 문제라고 시스템을 바꾸는 것으로만 시간과 에너지를 전부 쓴다. 이쪽 시스템을 지지하건 저쪽 시스템을 지지하건 시스템이 문제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우리는 뭘 희망하고 뭘 가르치고 있는가. 그런 정신은 어떤 물질로 실체화되고 있는가. 우리는 설마 아직도 쌀밥에 고깃국먹는게 소원이라는 거기에 머물러 있는가? 처음에 말했듯이 답보다 더 중요한것은 질문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질문자체를 잊어버리고 원래 사는게 이런거 아니냐고 하는 느낌이다. 뭔가를 바라는데 그걸 원래 왜 바랬는가를 잊어버린 것이다. 너무 빨리 이건 이게 아니냐고 말해 버리는 느낌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의 근원적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적어도 이따금씩은 질문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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