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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나눠서 이해하기와 인과론

by 격암(강국진) 201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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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8

과학의 세계에서는 물론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도 자주 만나게 되는 익숙한 이해의 방식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문제를 나눠서 이해하고 인과를 따지는 환원주의다. 그런데 이것들은 널리 쓰이면서도 나름의 함정이 있어서 우리는 그로 인해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것은 심지어 삶의 방식에서 조차 그럴 수 있다. 

 

나눠서 이해하기

 

나눠서 이해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여기 어떤 여자가 있는데 그녀가 왜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은가를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그녀의 눈을 보자,그녀의 목소리를 보자, 그녀의 직업을 보자 하는 식으로 그녀의 여러가지 특징들을 각각 고려한다. 그리고 그 각각의 요인들이 어떻게 남자들에게 보이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질문을 나누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경제학이나 물리학이나 생물학등 여러 학문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쓰는 방법이다. 통상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연구나 이해의 대상은 매우 복잡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걸 이리저리 잘게 나눠서 각각의 요인을 이해하는데 물론 거기에는 그렇게 하면 일이 단순화된다는 가정과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런 작은 이해들을 다시 합칠 수 있다는, 그렇게 합치면 전체적인 그림이 나온다는 가정이 들어 있다. 

 

인과론과 복잡계

 

인과론은 물론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근원적인 차원에서 인과론이 성립하냐 안하냐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더라도 -예를 들어 양자역학이 인과론을 깬다같은 이야기- 우리는 통상 뭐가 원인이고 뭐가 결과인지에 대해 지나치게 단순하게 확신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들어 누군가가 과거의 기록을 봤더니 부동산 가격과 은행 금리와의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는 것을 발견하여 부동산가격상승이 빠를 때는 금리가 낮고 부동산 가격이 하락할 때는 금리가 높다라고 지적했다고 하자. 문제는 이것이 인과관계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금리를 조절해서 부동산 가격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을 실제로 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이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인과관계에 대한 가정을 한게 아니라 그것은 데이터에서 발견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상관관계에 의한 인과론의 주장은 소위 말하는 선형적 관계를 가정하고 있으며 이런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대표적으로 복잡계라고 불리는 경우들이 그렇다. 이때문에 전체를 부분으로 잘라서 이해하는 것도 복잡계에서는 실패하고 만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있다고 해보자. 이 자동차의 엔진이 힘을 발생시키면 그 힘은 구동축을 따라 바퀴로 전달된다. 엔진이 약간 더 힘을 발휘하면 바퀴는 약간 더 강한 힘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엔진과 바퀴의 움직임은 선형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선형성은 물론 근사에 불과하다. 다른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엔진이 자동차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발생시켰다고 하자. 그러면 차가 고장이 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엔진이 아무리 힘을 써도 바퀴는 힘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선형적으로 생각한 반응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고려하는 시스템은 대부분 매우 복잡한 것으로 여러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요소들중의 어느 하나만 비선형적인 변화를 일으켜도 미래에 대한 예측은 실패하고 만다.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는 일이 문제를 단순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인간의 몸을 연구할때 몸은 머리와 가슴과 다리로 되어있다라는 식으로 연구하는 것도 부분으로 자르는 것이고 뇌는 전두엽과 후두엽 측두엽 전정엽으로 되어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부분으로 자르는것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것을 자르면 그 각각의 부분은 죽는다. 잘라서 다 죽여놓고 나중에 그걸 합쳐봐야 살아있는 뇌가 되지 않는다. 그런 부분을 지나치게 사소하게 생각하면 오해가 생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사회를 그 통합성을 생각하지 않고 기계 조립하듯 하면 잘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오류다. 

 

복잡계가 복잡계가 되는 이유는 그 복잡계를 이루는 여러 부분들이 상호간에 강한 되먹임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두 학생이 학교에서 처음만났다고 하자. 한사람이 잘해주면 다른 사람이 그게 고마워서 잘해주고 그러면 그게 계속되어 두 학생은 매우 친한 관계가 될 수 있다. 이런게 되먹임관계다. 즉 사소한 인연에 따라서 두 사람은 친하게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인간관계란 자동차 부속품 맞추는 것처럼 이건 저기에 잘들어맞겠다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담이지만 세상에는 부부관계나 연애에 대한 여러가지 조언들이 존재한다. 그런 조언들은 때로 매우 그럴듯하지만 기본적으로 위에서 말한 선형성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조금 더 잘해주면 아내도 남편하게 조금 더 잘해준다는 식의 생각을 상식으로 여기는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흔한 부부관계나 연애에 대한 조언은 그럴듯하면서도 잘 맞지 않고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람과 사귀게도 된다. 인생은 복잡계인 것이다. 

 

복잡계에 이르면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거나 이게 원인이라서 저게 결과로 나온다는 식의 설명은 거의 힘을 상실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은 복잡계로 여겨야 한다. 모든 것이 크고 작은 되먹임으로 얽혀있다. 우리는 특정한 사례나 특정한 극한에서만 그것을 선형적 시스템으로 근사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지금 금리를 올리면 다음 한달동안 집값동향은 어떻게 될까하고 묻는 차원에서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논하거나 부분으로 나누는 전략이 통할지 모른다. 그 되먹임이 작동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길게 본다면 금리를 올렸던 그 정책이 1년 10년의 단위에서 결과적으로 집값을 올렸는지 폭락시켰는지는 다르게 보이는 것이며 바로 그때문에 정책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길게 길게본다면 모든 것이 다 복잡계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성공한 인생을 논할때 짧은 시간간격에서 통하던 인과론적인 꼼수로 접근하면 성공적인 방법과 실패하는 방법은 완전히 반대가 될 수도 있다. 

 

복잡계는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없을까

 

가정이 그렇고 사회가 그러하다. 우리 인생이 그렇다. 모든 것이 복잡계다. 그런데 우리가 통상 쓰는 나눠서 이해하려는 것이 실패하고 인과론을 적용하는 것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결국 이해할 수 있는게 없다는 것일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복잡계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이미 혼돈현상때문에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해 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미래를 예측한다는 의미에서 이해는 불가능하다. 제 아무리 아이의 현재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아이가 어떻게 될지는 알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의미의 이해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은 전일적 혹은 전체적 이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복잡계를 논하지 않을 때 쓰는 환원적 인과적인 방식이란 환경과 나를 구분하고 환경이 주는 영향이 나를 어떻게 바꾸는가 혹은 그 반대의 경우를 일방적으로 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포를 이러저러하게 쏘아주면 이 대포알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날아갈 것인가를 보는 것이다. 빨간색을 보면 나의 두뇌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가를 보는 것이다. 여기서는 한쪽이 한쪽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본다.

 

전체적 이해란 특정한 경험과 조건에 집중하는게 아니라 모든 가능한 여러 조건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는 것이다. 위에서 혼돈현상을 말했는데 그걸 예로 들어 말하자면 어떤 조건하에서 혼돈현상이 일어나는가를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래를 예측하고 어떤 영향이 어떤 변화를 가져온다라고 말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는 약간다르다. 다른 차원에서의 변화를말한다. 혼돈현상이 있으면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 한단계위의 정성적인 차원에서는 그러나 다시 인과론을 연상케하는설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되먹임의강도가 어느 이상이 되거나 어디에서 어디까지의 구간값을 가지면 혼돈현상이 일어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부모에 의해 키워지는 아이의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성적인 이해를 통해 부모와 자식이 어떤 상호작용을 할때 지금 아이가 보이는 행동이 사라지거나 줄어들까를 이야기할 수는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상호작용에 대한 것이고 조절에 대한 것으로 부모와 자식을 구분하고 따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능동적인 태도를 기본에 가정하고 있다. 이것은 일방적 영향에 대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게임의 법칙이 어떤 동적 평형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부모던 자식이던 변화에 대한 의지가 없다면 이런 이해는 의미가 없다. 넓은 가능성의 평면에서 어떤 한점이 현실을 상징한다면 거기에 그대로 있겠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이런 사람이고 아이는 이런 아이다라고 단언해 버린다. 그런 경우 미래의 예측은 결국 불가능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힘을 과도하게 과신할 경우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우리가 변화의 의지를 통해 넓은 가능성의 평면위에서 존재하는 현실의 한 점을 움직인다면 우린 정성적으로 다른 미래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 복잡계에서의 이해다. 부모와 자식이 하루에 한번 만나는게 아니라 두번 만나면, 아빠가 아들을 하루에 한번씩 안아주기로 한다면, 그래서 상호관계를 강화한다면 이 가정은 어떻게 변화해 갈것인가에 대해 여전히 우리는 어느 정도의 이야기를 확률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맺는 말

 

변화의 의지는 변화의 가능성을 인지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변화의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흔히 너무 쉽게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단정해 버린다. 너무 쉽게 세상을 환원론적이고 인과적으로 본다. 그런경우 결과는 흔히 양극단이다. 본래 극단적 낙관론자와 근단적 비관론자는 모두 예측을 너무 잘 믿는 사람이다. 그들은 이건 이거니까 이 사람은 이런 저런 특징을 가지고 있으니까 구세주라고 해버린다. 뭐든지 너무 잘안다. 스위치 하나 누르면 세상이 천국이 된다. 그러다가 때로 이런 사람들은 비관론자가 되어 너무 일찍 뭐든지 해도 소용없다고 한다. 이건 이거니까 이젠 망했다. 다 소용없다고 한다. 이건 이것이고 저건 저거니까 어차피 내가 고생고생해서 조금쯤 뭘 바꾼다고 한들 세상은 아주 쬐끔 정말 쬐끔 밖에는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같은 사람이 누군가를 돕거나, 의견을 말하거나, 뭔가를 거부한다고 해서 이 세상의 광대함을 생각했을때 그게 무슨 차이가 있다는것인가하고 생각한다. 

 

변화의 가능성을 인지하는 사람, 세상을 복잡계로 보는 사람은 세상과 나는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뭐가 뭐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다. 내가 세상을 바꾼다던가 세상이 나를 바꾼다던가 하는 식으로 원인과 결과를 나누는게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지금 변화의 벼랑에 있을수 있다. 내가 변화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변화의 의지를 가질때 세상은 변할 수 있을수도 있다. 작은 것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어느새 세상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전체적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보다 낙관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어준다. 변화의 의지, 변화의 희망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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