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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논쟁에 있어서의 사실의 역할

by 격암(강국진) 2013. 9. 13.

2013.9.13

토론은 무엇으로 행해지는가.

 

오늘날 우리는 프로스포츠를 구경하듯이 티비 토론회를 본다. 이런 저런 논객의 수준 높고 낮은 싸움질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모두 토론이라고 생각하고 그 토론의 가장 큰 무기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논쟁에 있어서의 사실의 역할은 매우 과장되어 있으며 이때문에 오히려 진정한 논쟁이나 토론은 종종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토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럼 무엇인가. 서로를 느끼는 것이다. 서로를 느껴서 각자의 느낌을 합치고 그래서 새로운 견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랑과도 비슷하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나의 약점을 들어내는 행위를 가져온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순간 나는 그 상대방에게 나를 휘두를 고삐를 쥐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사랑의 고백은 당연히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토론도 그렇다. 진짜로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내가 믿는 것을 최대한 그대로, 최소한의 선입견을 가지고 말할 필요가 있고 듣는 사람도 상대방의 말을 최대한 그대로 들으면서 그 안에 있는 상대를 느껴야 한다. 진정한 토론에서 말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상호간의 오해는 오히려 증가하고 만다. 사람들은 종종 남에게서는 뭔가를 빼앗고 자기는 안주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대화는 방어와 공격처럼 변한다. 그것이 더 심해지면 이제 대화는 약탈전이 된다. 최대한의 허위와 거짓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 토론이고 논쟁이 된다. 그래서 그런 것을 잘하는 기술을 습득한 사람을 가르켜 논쟁의 달인이라고 부른다. 누구누구는 참 논쟁을 잘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검투사의 싸움을 보듯 티비토론을 즐긴다. 관심은 무엇이 정의이고 진리인가라기 보다는 온통 누가 누구를 찔러 죽이는가에 있다.

 

확실히 사람들이 평가하는 논쟁의 기술이라는 것이 전혀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형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라가 군인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듯 공격과 방어기술이 논쟁의 알맹이는 아니다. 결국에 가면 진짜 중요한 것은 말을 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뭔가 진짜 메세지가 있는가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제국은 군대가 만드는 것같지만 제국은 실제로는 문화가 만드는 것이다. 문화없는 군대란 결국 도적떼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가지 못한다.

 

이 세상에는 아무런 느낌도 메세지도 없이 철갑으로된 공처럼 공격방어는 잘하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는 것도 느끼는 것도 없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은 우리가 몸담은 사회가 사람들을 그렇게 교육시킨다. 그렇게 되는 것을 권장한다. 아는 것이 100이면 100만 말해서는 안된다. 최대한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아는 것처럼 말하고, 내가 끼어들어야할 논쟁인지 아닌지 상관없이 어디든 끼어들어서 승리할 것, 그것이 영광으로 가는 길이며 정답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해진다. 잘난체하는 기회주자도 그렇게 말하고, 처세술이나 자기피알의 전문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그렇게 말하며, 자유주의의 신봉자들도 그렇게 말한다. 서로 이유는 조금씩 다르지만 그런 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 요즘 세상은 가득차 있다.

 

과학적 논쟁의 한계

 

이것은 주로 서구로부터온 병이다. 적어도 서구가 그것을 더 심화시켰다. 사람들이 어설프게 흉내내고 있는 것은 과학논쟁이다. 과학논쟁에 있어서 사실의 역할은 물론 더할나위없이 중요하며 과학자들은 서로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사실적 문제가 없는지를 살핀다. 그러나 사실 이런 식의 논쟁은 과학에 있어서조차 제한된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과학은 엄밀한 기반위에 서있으므로 사실들은 과학의 시스템안에서 아주 엄밀한 의미 혹은 상호관계를 가진다. 당신이 자동차 수리공이라면 그리고 수리공들끼리 이야기를 한다면 자동차의 핸들은 자동차와 어떤 관계를 가졌는가를 생각하고 이야기되며 거기에 개념적 혼란이 들어갈 이유는 없다. 수학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단어들은 다 엄밀한 정의를 가진다. 그러나 일반론적으로는 누군가는 자동차핸들을 장난감이나 예술품의 일부나 모니터받침으로 인식하거나 살인무기로 인식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 그것의 가치를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과학적으로 말해 모짜르트의 의자는 의자일뿐이다. 의자는 주로 그 재료인 나무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의자는 예술품일지도 모르고 역사적으로 그 의자는 매우 중요할 수 있다. 예술과 역사에 장님이 되는 것이 더 옳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실을 기반으로한 과학적 논쟁을 위해서 우리는 일부러 어느정도 장님이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은 사실들에 대해 매우 엄밀한 관계를 정의하기 때문에 한가지 특징을 가지게 된다. 바로 가치중립적이다. 과학이 왜 중요한지를 답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적 발견을 만들어 내는 영감도 과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훌룡한 과학자는 사실을 잘 모으는 사실수집 오타쿠가 아니라 영감을 찾아헤매는 예술가에 가깝다. 아인쉬타인은 이런 점을 가르켜 나는 코가 좋다고 말했다. 즉 자기도 그게 왜 답인지 잘 모르지만 이게 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후에 그걸 증명하려고 노력하면 실제로 증명이 되더라는 것이다. 과학연구를 하고 논문을 쓴 사람들은 논문이나 교과서에 써져있는게 뭔지 안다. 논문이나 교과서는 마치 지극히 당연한 문제에서 시작해서 지극히 당연한 과정을 거쳐서 결론이 나오는 것처럼 쓰지만 연구단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연구단계에서는 종종 그 반대다. 우리는 여러가지를 시도하지만 왠지 이게 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이 답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순수히 모든 가능한 경우를 다 시도해서 답을 찾는 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이다.

 

우리는 왜 달탐험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게놈프로젝트에 돈을 써야 하는가, 우리는 왜 거대 가속기같은 것에 돈을 들였던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답이 있는 과학적 질문이라고 착각하지만 이 질문들도 궁극에 가면 결국 과학적 질문이 아니며 따라서 사실들만 가지고 답해질 수 있는게 아니다.

 

과학의 시대에 과학자들의 토론을 흉내내고 스스로를 과학자로 인식하는 것은 당연하고 좋은 일일까? 과학자들은 제한된 영역에서 제한된 전문가들이 그런 토론의 효과를 극대화하도록 훈련받은 끝에 하는 것이며 당연한 일이지만 적어도 특정 분야에서는 과학자들은 많은 지적인 훈련을 한 사람들이다. 누군가가 폭탄을 유용하게 쓴다고 해서 장소와 방법을 모르고 아무나 폭탄을 쓴다고 과연 좋은 결과가 나올까? 과학적 논쟁에 익숙한 과학자들은 과학적 논쟁이 어떻게 행해지는가를 알지만 오히려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은 이런 것을 모르면서 그같은 방법론을 무한대로 신뢰한다. 그들은 과학적 논쟁 혹은 논리의 힘을 무한대로 믿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사실의 조각들과 방정식으로 뭔가를 증명해냈다고 생각한다. 한 명의 과학자나 수학자가 자기 동료의 이론을 비판하는 것과 일반 사회에서의 토론은 같은게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뭘 소통하는가.

 

다시 사실로 돌아가보자. 어떤 의미에서 객관적이고 엄밀한 의미를 가진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앞에 물컵이 하나 있다고 하자. 여기 물컵이 하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사실의 진술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비슷하게 작년 국민소득이 떨어졌다던가 물가가 몇%올랐다던가 일본부동산 거품붕괴때 부동산 가격은 몇%떨어졌다던가 하는 사실들을 나열한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자. 도대체 우리는 무슨 말을 한 것일까? 거기에는 안쪽과 바깥쪽으로 불확실성이 다 존재한다. 일단 컵이 있다라고 말하지만 컵이란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이다. 우리는 보다 원천적 개념으로 가자면 프라스틱위의 물이라던가 유리위의 물이라고 해야 하지만 그냥 컵이라고 말한다. 두개의 예를 들어보자. 내 앞에 있는것이 컵이 아니라 밥그릇이었다면 사실은 다른 것일까? 여기 종북세력이 있다고 말할때 종북세력이란 개념은 과연 실체일까? 실체라면 어떤 실체일까?

 

우리가 사실을 말한다고 할 때 우리가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어떤 개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그 개념이 매우 명확한 실체라고 느끼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따라서 수없이 많은 개념이 나열되고 있는 논쟁에서 조금씩 개념이 뒤틀어지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말해지는 것같은데 결과는 상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괴상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유령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미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가족을 서로 죽이는 세상을 경험하고 그것을 뼈아프게 느낀적이 있다.

 

노동자라던가 종북세력이라던가 물가라던가 한국이나 중국이라던가 심지어 평등이나 민주주의같은 말들까지 모두 당연히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이다. 우리가 말하고 심지어 눈으로 보는 것조차도 사실 그자체를 보는게 아니라 어떤 개념을 말하고 보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사실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안쪽에서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당신이 보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해 당신 자신이 비친 이미지다. 당신이 과대망상증 환자이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것일수도 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도 무한대로 신뢰할 수 없다.

 

사실에 대한 바깥쪽 불확실성이란 바로 관계다. 나는 이미 모짜르트의 의자라는 이야기로 이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한 바가 있다. 한줄의 사실 혹은 더 길어서 한권이든 수십권에 씌여진 사실이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언제나 유한하다. 거기에는 항상 그 바깥쪽이 있다. 그것이 놓여지게 되는 더 큰 문맥들이 있다. 그 바깥쪽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 바로 우리는 모짜르트의 의자를 불때기 좋은 낡은 나무조각으로 인식하고 결론을 내리는 위험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들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사실의 함의, 의미는 무엇인가? 중요한 건 결국 의미 아닌가? 의미를 알 수 없다면 가치를 알 수없고 가치를 모른다면 토론은 가치있고 의미있는 결론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거라면 뭐하러 시간들여서 떠들고 있는가?

 

아이들에게 이런 저런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토론을 한다고 하자. 무한대의 사실을 늘어놓아도 그 사실자체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내는게 아니다. 의미는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이다. 감수성은 전혀 없는 어떤 어른에게 아이들이 문학이나 역사, 미술이나 음악에 접하는 것은 시간낭비이며 심지어 아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라고 인식될 것이다. 반대로 철학으로서의 과학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수학과 과학이란 돈벌이 수단이며 돈을 벌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행위라고 인식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 여러 외국의 인재들의 예를 들면서 그들은 인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과학과 수학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다고 사실을 늘어놓으면서 설득을 하려고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그게 뭔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사실들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너무 쉽다. 우리는 4대강공사라는 것을 불과 몇년만에 하면서 수없이 많은 역사와 문화와 생태의 자취를 한 순간에 없애버린 나라의 사람들이다. 사실이 과연 우리를 구원해 줬는가? 사실의 힘은 위대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부인한 사악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틀린 것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많은 사람 특히 돈과 권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 적어도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어떤 쪽으로 장님인 것같다. 한국에는 무식한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너무 많다.

 

맺는 말

 

결국 우리는 낡고 오래된 문제로 돌아온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깨어있는 사람이 되는가. 나는 요즘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말씀을 되씹는 일이 많다. 그러면서 초조해지곤 하는 나 자신을 반성한다. 깨어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그 어려움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그럴 때 우리는 조급증에 빠지고 좌절하게 되며 깨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게 되기 쉽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팍하고 깨칠 수 있을까를 묻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의 유한성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유한성을 느끼면서 계속 노력해야 한다. 조금 나아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유한한 존재이며 여전히 상대적으로 흠결이 있고 시야가 좁은 인간일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필요하다. 우리는 어리석은 짓을 해왔고 앞으로도 좀 다르다고 해도 여전히 어떤 시각에서는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될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모두에게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좀 더 관대해질수 있지 않을까? 자기를 미워하고 조롱하고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것이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깨어있는 인간이 되는가. 믿음과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이다. 더 깨어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 세상과 자신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론 그리고 세상의 일들과 부딛히면서 그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깨어있는 인간이 된다. 이것은 바가바드기타의 말씀을 내 식으로, 내가 믿는 식으로 약간 바꾼 것이다. 말하고 보니 옳은 소리같다.

 

우리는 당장 우리 가족을 우리 지역사회의 주민들을 우리 나라 사람들을, 세계인들을 확 바꿔버릴 어떤 기적을 바라는 일이 많다. 이제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어떤 확고한 사실이 발굴되면 그 사실에서 나오는 빛이 온세상을 바꿔버리는 그런 판타지를 꿈꾸기도 한다. 이것이 계몽주의의 꿈이다. 답답하니까 그렇다. 가족과 말이 안통하고, 지역사회의 주민들과 말이 통하지 않고, 우리 나라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고, 세계인들과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마법의 진실을 찾아나서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시간이 없다. 내일 지구는 나라는 우리지역은 우리가족은 망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항상 길은 하나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밖에는 없다.

 

진리는 사실에 있지 않다. 따라서 보다 깨친 사람의 말을 줄줄 외운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의미를 전혀 모르는 것일 수 있다. 눈이 먼 채 사실들만을 뒤적이지 말고 믿음과 이론과 실천이라는 원칙을 잊지 말고 묵묵히 나아가야 할것이다. 그러다보면 기쁜 날도, 말이 통하는 기쁨의 날도 있지 않겠는가. 사실이라는 무기로 세상을 항복시켜서 그런 날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 답은 사실에 있지 않고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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