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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내가 글을 쓰는 방식

by 격암(강국진) 2014. 5. 1.

2014.5.1

글이란 여러방식으로 여러목적을 위해 쓰이는 것이며 나도 한가지 방식, 한가지 목적을 위해 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글은 이따금씩 흐리멍텅하다거나 너무 길어서 읽기 힘들다거나 하는 평가를 듣는데 그것은 내 글쓰는 방식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따금은 나도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토해내듯이 글을 쓸 때도 있다. 그럴 때의 내 글은 아마도 보다 분명한 색깔과 분명한 메세지를 보여주는 글에 더 가까울 것이다. 게다가 그럴 때면 나는 또한 세간의 글쓰기가 그러하듯 보다 많은 자료와 증거를 통해 뭔가를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글이 되려고 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꼭 그런 식으로만 글을 쓰지 않는다. 나도 물론 객관적 사실적 증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소위 먹물좀 먹었다는 지식인들이 강조하고 실제로 실천하는 것처럼 나는 많은 자료를 나열하고 꼼꼼히 증거를 제시하려고는 크게 노력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글은 신문에 나는 글하고는 좀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내 글이 좀 더 많은 자료와 증거로 채워지기를 바란다. 그것이 개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의 뒤에는 바로 내가 반복해서 우리가 피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런 것을 강조하다보면 자체 모순적인 상황이 될 때도 있다. 그러니 나는 생각끝에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내 글은 섬세하게 조립된 기계이기 보다는 힘차게 쑥하고 한번에 그려진 사군자 그림같은 면이 있다. 나에겐 그걸 남기는 것이 소중했다. 

 

어느 글이나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만 내 글은 대화다. 무엇보다 나 자신과의 대화다. 내가 수없이 많이 말하는 것처럼 나는 손가락을 가지고 나 자신과 대화를 하려고 한다. 내가 진정한 토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나도 글을 쓸 때 내가 뭘 쓰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글쓰기는 재미있고 보람이 있는 것이 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토론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내가 보기엔 전투고 싸움일 뿐이다. 즉 이런 저런 사실들과 표현들로 상대방이 뭔가를 부정할 수 없도록 궁지에 모는 것이다. 사람들은 한쪽 편이 어떤 증거를 들고 나와서, 어떤 논리와 표현으로 다른 사람의 모순을 지적하고 다른 사람의 메세지를 붕괴시키면 종종 그렇게 한 사람을 명쾌한 논리를 가진 훌룡한 토론자라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 훌룡한 것이며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할때는 그런 방식을 피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토론은 아니다. 진정한 토론은 소통이며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행위다. 그것은 그런 주고받음속에서 상호간의 공감대 증진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내가 이기려고 할 때 공감대는 생길 수가 없다. 나의 승리는 상대방의 패배이며 패배한 사람은 그렇게 된 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토론이 싸움이라면 이미 우리는 우리 마음속의 답을 처음부터 바꿀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사실들로 싸워 이기려고 할 때 거기에는 진정한 대화란 있을 수 없다. 사실들은 항상 더 작고 더 큰 스케일에서 무한히 많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보도에서도 그것을 목격한다. 세월호 사건의 범인은 누구인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언뜻 생각하면 간단한 질문이고 사실들만 제대로 확인하면 답할 수 있는 것 같은 이 질문도 실은 말솜씨가 좋고 얼굴이 두꺼우며 기억력이 좋고 사실들을 많이 조사해 올 수 있는 사람들이 싸우듯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물론 선장을 비롯한 청해진해운, 관련 기관, 나아가 정부, 해경, 언딘같은 회사들, 언론등 여러 관련 단체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들이 이런 저런 일에 대해 잘못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은 그것들간의 인과관계의 강도, 즉 책임의 강도가 늘상 당연한 것은 아니라서, 법정드라마에 나오는 솜씨좋은 변호사가 그렇게 하듯이 말을 만들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 그러다보면 뻔한 답도 애매해지고 나중에는 우리들의 상상이상으로 사소한 책임밖에는 물을 수 없게 되기도 한다. 

 

나는 가치는 상대적이며 따라서 모든 것이 애매하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게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는 상식이라고 하는 큰 틀에 대한 감수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 그럴 것같지만 우리가 뭔가를 자꾸 파고들다보면 우리는 그런 감성을 잊게 되기 쉽고 상식이 사라지기 쉽다. 그러나 논리와 객관적 증거로 문제를 돌파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종종 그 힘에 너무 취해서 이것을 잊는다. 크게 보면 배가 산으로 가는데도 한번 어딘가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가 없다. 모든 단계 단계를 자기가 다 꼼꼼히 확인한 것같으면 그 결과가 정말 말도 안되도 그 결과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든다.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명쾌한 걸 좋아한다. 나도 그랬고 지금도 명쾌한 글에 감탄할 때가 있다. 하지만 명쾌함이란 양날의 검이다. 그것이 제 아무리 훌룡해 보여도 그것은 항상 착각이고 환상이며 우리의 시야가 좁다는 의미다. 제 아무리 정교하고 복잡한 기계라도 기계는 기계이듯이 명쾌한 논리와 증거로 정돈된 글이란 그만큼 인간이 배제된 글에 불과하다. 인간과 삶 그리고 세상은 애초에 명쾌할 수가 없다. 그것들의 본질은 언제나 불확실성이다. 

 

우리가 어떤 집이 좋은지 이야기한다고 해보자. 우리가 아무리 길게 그것에 대해 글을 쓴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집에 관한 무한히 많은 사실들을 누락시킨다. 건축가는 그래서 집을 짓기전에 그저 이런게 좋은 집이라고 가르쳐 주는게 아니라 집주인과 대화하면서 집주인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묻는다. 그 집에는 어떤 인간이 들어가 살게 될 것인가를 묻는다. 그것뿐일까? 그 집의 바깥과 안이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 집은 어떤 지형에 지어질 것인가, 그 집에 사는 사람은 어떤 마을에서 어떤 이웃과 살게 될 것인가. 심지어 어떤 나라, 어떤 사회에 존재하게 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다. 세상에는 어떤 사람들이 정말로 멋진 집을 몇년을 걸려 지었지만 불과 2년을 살고는 그 집에 못살겠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흔하다. 제 아무리 설득력있고 명확한 집의 설계도 사실 진짜 집에 대한 어설프고 불확실한 그림에 불과하다. 그래서 확신은 어리석음의 증거다. 

 

애초에 우리가 무한한 경계들과 사실들의 바다앞에서 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뭔가에 대해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산수정도 밖에 모르는 초등학생은 숫자가 뭔가라는 질문을 하면 쉽게 답할지 모르지만 평생 수학을 공부한 수학자에게 숫자가 뭐냐고 물으면 그들은 그 질문이 매우 어려운 질문이라고 느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글을 쓸 정도로 무지하다. 어쩌면 내가 좀더 현명하고 느끼는 것이 많아지면 침묵하고 오로지 행동으로만 의사를 표현하게 될지 모르겠다. 내 글은 언제나 완벽하지 않고 오류를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애초에 완성이 불가능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는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적어도 지금은 글을 쓰고 싶고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다. 내가 영적으로 지적으로 혹은 무슨 애매한 기준으로 말하든 유년기에 있기에 글을 쓸 뿐 혹시 내가 성년이 되면 글을 쓸 필요가 없어진다고 해도 내가 유년기에 있다는 사실이 유감스럽지도 않다. 삶이란 도달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게 아니라 그 과정이 중요한 여행같은 거니까. 유년기는 중장년기나 노년기를 위해 전적으로 거름이 되어야 할 쓸데없는 부분이 아니라 즐겨야 하는 인생의 어느 부분이니까. 

 

나는 내 글에 공감해 주는 사람들에게 두가지 의미에서 감사함을 느낀다. 그 중 하나는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위해 쓴 글이 남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할 때 내 글과 내 자신에게 그리고 내 삶에 내가 좀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나와 같은 상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다고 할 때 그런 사실은 나를 안심시키고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은 꽤 좋은 곳이라는 증거로 작동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내 글이란 결국 나의 방이고 나의 집이며 나의 마을이고 나의 세계다. 내가 편안하게 있고 싶어서 청소하고 구조를 만들어 놓은 곳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내 몸에 맞춘 옷이 남의 몸에 안 맞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듯 내 글이 소통불가한 것으로 판정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면 물론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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