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들/새빨간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3

by 격암(강국진) 2014. 5. 19.

3

 

일찌기 프로이드는 억압에 대해서 말하면서 우리의 의식이 닿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오늘날 신경과학학회에 간다면 당신은 프로이드에 대해 별로 듣지 못한다. 프로작같은 약이 널려 알려지고 뇌를 직접 열어서 관찰하는 시대에, 적어도 그와 관련된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드니 에고니 하는 말은 종종 낯설게 들린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식에 대한 연구는 더욱 많아졌고 그걸 뭐라고 부르던 우리가 의식적으로 나라고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전부라고 믿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은 뼈아프게 분명한 것이 되었다.

 

사실 아침에 잠을 자다가 자명종 소리에 놀라서 깬 당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그것 자체가 당신은 무의식의 세계의 조종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가? 당신은 잠을 자고 있어서 의식이 없었지만 누군가가 혹은 어떤 것이 자명종의 소리를 듣고 당신을 깨운다 즉 당신의 의식을 시작시킨다. 당신은 당신이 자는 동안 옆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것을 듣지 못하겠지만 용케도 자명종의 소리를 들은 뭔가는 당신을 깨운다. 우리가 오직 의식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당신은 의식적으로 심장을 뛰게하지도 않고 의식적으로 장운동을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물론 심장이나 장의 운동은 당신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깊은 생각에 빠져서 길을 걸을 수도 있다. 그럴 때 당신의 몸의 움직임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행해진다. 의식이란 이런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바다 위에 뜬 배같은 거라고 봐야 한다.

 

크리스토퍼 코흐는 NCC(neural correlate of consciousness)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경생리학자다. 그의 책 의식의 탐구를 보면 그는 의식으로서의 우리가 의식하는 것과 전체 몸으로서의 우리가 보는 것을 구분한다. 좋은 예는 과연 우리는 우리의 눈이 보는 것을 보는가 하는 것이다. 그 답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놀랍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뇌의 일부가 보는 것조차 그것은 의식으로서의 당신이 보는 것과 다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시각적 환각현상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가장 흥미있는 예중의 하나는 양안경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색깔을 서로 다르게 집어 넣은 렌즈같은 것을 통해서 우리는 왼쪽과 오른쪽에 서로 다른 신호를 집어 넣을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오른쪽 눈에는 마차의 그림신호가 들어가고 왼쪽 눈에는 눈사람의 그림이 들어가는 식이다. 이렇게 했을 때 사람들은 눈앞에서 마차와 눈사람이 중첩된 그림을 보게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한동안 마차를 보다가 그 그림이 눈사람으로 변하고 다시 마차로 변하는 것을 본다. 우리의 눈들에 들어가는 그림신호는 변화가 없는데 의식의 내가 보는 세상은 혼자서 양쪽 그림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우리의 눈이 보는 그림과 의식을 가진 우리가 보는 것은 다르다.

 

뇌신호를 연구하면 우리는 시각정보가 전달되는 통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이게 언제까지 그럴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눈의 신호는 아직 착시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 위의 LGN이나 V1같은 뇌의 상위영역에서는 어떻게 되는가를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코흐는 눈은 물론 V1조차도 아직 의식의 영역이 아니라고 말한다. NCC의 일부가 아닌 것이다.

 

의식을 가진 우리가 보고 듣는 것 이외의 것에도 우리는 영향을 받고 그것은 우리가 통상 우리가 우리 몸이라던가 우리 뇌의 일부라고 부르는 부분에 의해서도 그렇게 된다.

 

생각해 보면 자아를 세상과 가르는 선조차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분명한게 아니다. 인간은 뇌로 생각을 한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이래 우리는 뇌가 곧 인간이라는 생각에 익숙하다. 이제 의식은 내 손가락에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의학적 지식이 없었을 때는 어땠을까. 우리는 우리의 몸안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지 이렇게 구체적으로 선을 더 좁혀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피를 수혈하거나 심장을 서로 바꾼다는 것은 요즘 세상식으로 말하자면 뇌를 서로 교환하자는 이야기처럼 기괴한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수혈과 심장이식수술이 흔해진 요즘 우리는 그런 그들을 비웃지만 우리의 의식 혹은 자아가 뇌안에 있다고 상식적으로 믿는 우리는 과연 그들보다 얼마나 더 지혜로운 것일까?

 

세상에는 사고나 수술로 뇌의 일정부분이 파괴되었거나 심지어 뇌의 절반이 파괴된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느 정도 멀쩡한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은 물론 그들을 사고 이전, 수술 이전의 사람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로 뇌가 파괴되어져 가는 환자의 의식과 자아는 과연 전과 같은 것일까? 우리가 그나 그녀는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에는 어떤 문제점은 없을까? 아래에 소개할 분리된 뇌를 가진 사람은 아예 우뇌와 좌뇌가 서로 소통을 못한채 행동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 그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오른쪽 뇌에 있는 사람? 왼쪽 뇌에 있는 사람?

 

뇌가 당신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근사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의식이 뭔가에 대해 잘못된 이해에 기반한 말이다. 당신이 바다에 생긴 파도 같은 존재라면, 즉 당신이 하나의 현상이라면 어떨까. 우리가 바다위의 파도가 정확히 여기서 저기까지 있다고 말하는 것에는 오해가 없을까? 파도의 위치는 편의상 어디서 어디라고 부를수 있을뿐 엄격히 말하면 바다 전체에 퍼져있다. 우리의 의식도 이런 것일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이란 건 주로 뇌에 있을 뿐 엄격히 말하면 몸전체 나아가 몸바깥에 까지 퍼져서 온 세상에 다 있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사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지만 그리 신기한 이야기는 아니다. 생명이란게 물질이 아니라 사건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다시 말해 죽은 사람 즉 시체와 살아있는 사람의 차이는 물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신비의 물질이 사람몸을 떠나는 것이고 그것이 생명의 핵심이라고 믿는 사람은 요즘은 거의 없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라 사건이요 현상이다. 의식도 소리나 파도처럼 물질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요 현상이라는 것은 말은 그리 신기한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그럼 의식이 공간속의 어느 특정부분에 존재한다는 말이 왜 당연한 이야기이겠는가. 그런 말은 기껏해야 근사에 불과하다.

 

이게 무슨 비과학적인 신비주의처럼 들린다면 이런 걸 생각해 보라. 양자역학에 따르면 우리가 말하는 입자의 위치도 무한히 여기라고 정의 되어질 수 없다. 전자는 특정위치에 있는 돌멩이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물질의 위치를 정확히 잴 수 있다고 가정하는 뉴튼 역학식의 세계관을 쓰는데 그것도 큰 문제는 없다. 다만 그것이 좋은 근사이며 때로는 세상의 아주 중요한 부분, 예를 들어 고체의 안정성 같은 부분을 설명하는데 실패하는 근사라는 점만 기억한다면 말이다. 일찌기 쉬뢰딩거가 지적했듯이 인간의 DNA같은 고분자도 양자효과 때문에 그런 성질을 가지는 것이고 따라서 양자효과가 없었다면 애초에 진화나 생명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아메바같은 것과는 달리 무엇보다 훌룡한 기억력과 일반화 능력을 가져서 긴 역사를 기억하고 세상에 대한 이론을 통해 아주 넓은 세상과 소통하면서 사는 생명이다. 다시말해 그것들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세포 생명체보다는 넓게 퍼져서 존재하는 파도로 생각해야 하는거 아닐까?

 

생명의 정의까지 우리의 생각을 넓히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분명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것에 의지하고 영향을 받는 존재이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로 부터, 무의식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흔히 우리가 의식하는 그 가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의식적으로 느끼는 것들에 따라서 세상을 판단하고 움직인다.

 

어떤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서 어떤 신호, 예를 들어 손가락을 튕기면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명령했다고 하자. 최면술사는 이윽고 손가락을 튕기고 최면에 걸린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에게 왜 자리에서 일어났냐고 물으면 물론 실험대상자는 당신의 명령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최면이 아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말이 가장 있을 것같은 대답이지만 그들은 종종 다른 대답을 한다. 자리가 불편하다던가 그냥 일어나고 싶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유를 모르니까 이유를 만들어 넣는 것이다. 우리는 이유없이 뭔가가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자기합리화의 동물이다. 거기서 자주 쓰이는 것이 바로 나 혹은 나의 욕망이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는 것이 이유로 등장하는 것이다.

 

보다 극적인 예는 뇌수술을 받은 사람의 경우다. 인간의 뇌는 좌뇌와 우뇌가 대칭적으로 있고 그것이 뇌량이라는 부분으로 연결되어져 있다. 그런데 의학적인 이유로 이 연결부분을 잘라버린 사람이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마치 두 사람을 하나의 몸에 집어 넣은 것같은 상태가 된다. 그런 수술을 하면 왼쪽 뇌에게 어떤 정보를 주고 문제의 답을 선택하라고 하면 그 사람은 정답을 선택할 수 있는데 오른쪽 뇌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뇌도 자신이 어떤 답을 택했는지는 알고 있다. 이럴때 오른쪽 뇌에게 당신은 어떻게 답을 모르는데 정답을 택했냐고 질문을 할 수가 있다. 그러면 오른쪽 뇌는 또 왠지 그러고 싶었다라는 식의 이유를 대는 것이다.

 

최면술 대상자와 뇌수술 환자 두경우 전부 자기 행동의 진정한 원인은 알지못하는 다른 곳에 있는데 자기가 왜 그렇게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를 때 그것이 자신의 욕망때문이라고 즉 왠지 그러고 싶었다고 말한다는 것이 주목할만 하다. 당신이 고개를 휙 돌리면 세상이 돌아간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대개는 나라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머리를 돌렸다고 이해를 한다. 즉 나라는 존재가 뭔가를 해서 우리에게 보이는 세상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면 내 몸안의 기관들이 내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나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말고도 나는 그것말고 세상이 왜 그렇게 보이는지를 설명할 다른 좋은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보이는 세상의 변화의 이유를 세상에서 전부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 같은 것은 애초에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 말은 우리라는 것의 존재, 우리라는 것의 성격은 이 세상이 이렇게 움직이는 이유에 대한 설명의 중요한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동과 선택을 포함해서 세상에서 보는 일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때 쉽사리 그것은 나때문이라고, 나의 욕망과 선택때문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것은 나의 선택이었다라고 믿는 것이다.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남자가 떠오른다. 하늘에서 왜 벼락이 치는지 이 남자는 전혀 모른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순간 벼락이 번쩍하고 쳤다고 하자. 그러면 이 남자는 종종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나?

 

 


'소설들 > 새빨간 거짓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빨간 거짓말 6  (0) 2014.05.19
새빨간 거짓말 5  (0) 2014.05.19
새빨간 거짓말 4  (0) 2014.05.19
새빨간 거짓말 2  (0) 2014.05.19
새빨간 거짓말 1  (0) 2014.05.1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