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2.26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말은 우리가 사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존재라는 말과 완전히가 아니면 거의 같은 말이다. 그런데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몇번이나 이 질문과 부딪힌 적이 있고 이에 대해 말한 적이 있지만 오늘은 그것을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통상 우리가 뭔가를 이해했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뭘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가 이해의 대상으로 삼은 것에 대해 전보다 더 간결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해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지극히 간단한 것이거나 더 간단한 형태로 표현될 수 없을 때 우리는 거기에서 아무 것도 이해할 것이 없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간단한 형태라는 것도 여러가지 의미를 가진다.
예를 들어 1969123이라는 숫자를 보자. 이 숫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몇자리 되지 않는 숫자이므로 이해할 것이 없다. 그리고 무작위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더 간단한 형태로 이해할 수도 없다고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1969년 12월 3일에 태어났다면 이 숫자는 외우기가 더 쉬울 것이다 즉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의 생일이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1969123이라는 숫자를 그것과 연관지을 때 더더욱 이 숫자는 간단한 형태로 변하는 것이다.
보다 복잡한 경우인 친구를 이해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여기 한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는 아버지만 보면 어쩔줄 몰라하는 행동을 하고는 했다. 그 아버지는 별다른 행동이나 말도 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이 친구가 과거에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면서 성장했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면 혹은 당신이 그러한 것을 가설로 내세웠다면 이런 경우 당신은 그 친구의 행동을 이해했다고 느낀다. 그 친구는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여러가지 행동을 하는데 그 모든 행동들은 학대라는 과거와 연관을 가지고 보다 간단하고 일관된 이야기로 설명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간결한 형태로 표현한다라는 것은 이 두가지의 경우들에 있어서 차이를 가진다. 1969123이라는 숫자의 경우는 1969년 12월 3일이라는 생일과 단 하나의 숫자도 다르지 않게 상관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친구가 아버지 앞에서 행동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수없이 많이 있으며 그 모든 행동을 아버지의 학대라는 단 하나의 정보를 가지고 다 설명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아버지의 학대라는 요소에 다른 과거에 대한 지식을 몇개나 몇십개 더한다고해도 우리는 친구의 행동을 마치 숫자를 맞추는 것과 같은 정확도로 예측할 수있지는 않다.
다시 말해서 일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가 뭔가를 이해했다고 할 때 우리는 거기에 잡음 혹은 노이즈라고 하는 개념을 도입한다. 그래서 이해하려고 하는 대상에서 그 노이즈에 해당하는 부분을 설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근사의 과정내지 방식이다. 우리가 노이즈를 도입하면 그 대상을 이해했다고 느끼는 능력이 굉장히 커지게 된다. 왜냐면 간결한 형태로 설명되는 것이 대상을 설명해 내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쇠구슬을 던지면 그 쇠구슬의 움직임은 진공속을 중력이 존재할 때 움직이는 질점의 움직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질점의 움직임은 뉴튼방정식으로 묘사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쇠구슬의 움직임은 간결하게 표현된다. 즉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뉴튼의 운동법칙이 옳다고 해도 중력장은 엄밀하게 말하면 아주 복잡하게 존재한다. 게다가 쇠구슬은 질점이 아니므로 회전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또 쇠구슬이 무겁기는 해도 공기의 저항도 받는다. 쇠구슬이 아주 빨리 움직이는 경우는 쇠구슬의 질량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상대성이론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튼의 이론은 틀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해를 제공한다고 해야 한다. 만약 무한대의 엄밀성으로 이해의 대상을 묘사하는 것만이 옳은 이해라고 한다면 그런 이론은 있을 수가 없다. 누구도 그런 것을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기본적인 공리가 무한한 정밀도로 참이라고 가정하고 연역적으로 그 공리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수학에서 뿐이다. 현실은 수학이 아니다. 수학도 현실을 설명하는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이야기로부터 이해라는 것이 객관적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세가지는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이해는 우리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1969123이라는 숫자는 무작위로 만들어진 숫자일 것이다. 그런데 1969년 12월 3일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이 숫자는 무작위로 만들어진 숫자가 아니다. 그래서 이 숫자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저 내 생일이라고 기억해 두면 충분하다. 과연 이해의 이러한 측면은 무시되어지고 이해란 객관적인 것이라고 말해도 좋은 것일까?
만약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 부터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하자. 그래도 이 사람은 글을 읽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이 베토벤의 교향곡이나 크리스마스 캐롤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수없이 많은 노래와 말들을 들었던 사람과 같을 수가 있을까? 우리는 때로 우리가 과거에 이해할 수 없던 것이 매우 이해하기 쉬워지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는 도대체 왜 이렇게 간단한 것을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을까에 대해 신기해 한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전과는 많이 달라져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뭔가를 이해시키는 것을 교육이라고 부른다면 이것을 세뇌와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적어도 많은 경우에 우리가 배우려고 하는 사람의 내부 세계를 바꿔버려야 뭔가를 이해시키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꿔져버리고 만다면 그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더이상 전과 같은 사람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통상 세뇌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이해라는 것이 객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두번째 측면은 바로 무엇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길 것인가하는 문제 즉 노이즈의 선택문제에 있다. 우리가 한국 사회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경제학적인 측면이나 예술적인 측면 혹은 역사적인 측면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공부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서로 다른 것들을 암묵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가정하게 된다.
이런 예에서 보듯이 뭔가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어떤 면을 중요시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여자를 늘상 무시하는 한 남자를 이해하려고 하는데 당신이 지극히 남녀평등적인 입장에서 접근한다면 그 남자는 보나마나 가치가 거의 없는 존재로 이해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인간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한다고 하자. 그 내용은 강연을 하는 사람에 따라 어쩌면 세포에 대한 것이 될지 모르고 혹은 인간의 머리카락이나 화장하는 법에 대한 것이 될지 모른다. 여자에게 있어서 외모 이외의 것은 모두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자의 이해라고 말하면서 외모에 관련된 것만 말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 이해의 비객관성을 다음과 같은 말로 대처하려고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충분히 만족스럽지가 않다. 두가지 혹은 그 이상의 서로 다른 이해의 방식들이 과연 공존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의 논리적 이해와 예술적 이해가 서로 부딪히는 것은 우리를 고민하게 만들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는 때로 극단적이 되어 기술에 저항하거나 예술을 무의미한 것으로 말하게 되지 않는가?
우리는 실상 이 세계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 불만족스러운 설명의 방식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주 많은 구멍이 있으며 서로 잘 붙지 않은 자재를 엉터리로 붙여서 만든 집같은 모양을 가진다. 오직 각각의 설명에 깊게 세뇌된 사람에게만 세상에 대한 설명은 빈틈이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다시말해서 그 사람은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본래 이해불가능하고 이해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그것들에 대해 장님이 되기로 선택한 상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자신의 설명이 완벽해 보인다.
이해와 관련하여 우리는 종종 논리적 문제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나는 살아있는 생명이며 인간이고 한국인이다. 그러나 나는 사실 그 이상으로 복잡한 존재다. 왜냐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이고 인간이고 한국인이지만 그들은 나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생명을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고 한국인을 이해하면 나라는 개인을 이해할 수 있다라고 착각하곤 한다.
우리는 엉성한 부분들을 전체와 착각한다. 다시말해서 강국진은 한국인이다. 그리고 한국인은 이러저러하다. 따라서 강국진은 이러저러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면 강국진을 이해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보통명사적인 뇌를 이해하면 강국진의 뇌라는 단 하나의 뇌를 가진 강국진을 이해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옳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강국진이라는 나 개인의 여러측면 중에서 한국인 혹은 인간 혹은 뇌라는 단어가 말하는 것 이외의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 설명할 수 없는 무작위적인 노이즈로 여기기로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무시하기로 한 그것이 안중요하다는 것에는 어떤 근거가 있는가? 혹시 그것이 나를 나이게 하는 부분이지 않을까? 내 머리카락에 대해 이해했다고 떠들면서 따라서 나는 당신을 이해했어요라고 말하는 거랑 비슷한 거 아닐까.
이해의 비객관성을 말해주는 마지막 측면은 바로 이해의 대상의 문제다. 우리는 대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을 이해하거나 여자를 이해하거나 뇌를 이해하려고 한다. 다시말해서 세계의 어느 일부분 테두리를 치고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의 과정에 있어서 본질적인 문제는 생명이라던가 인간이라던가 뇌라던가 한국인이라는 개념 혹은 세계의 일부는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점에 있다. 이해의 대상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고 그런 분류는 편견을 만들어 낸다. 문제와 답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논리처럼 만들어 진다. 문제안에 미리 답을 넣어놓고 그 답을 찾아내고 나서 의기양양해 한다.
당신은 나와 당신을 모두 인간이라고 우리가 분류한다는 이유때문에 나와 당신은 유사하고 당신과 개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지구상의 모든 수컷 짐승들에 남자들을 포함시키고 따라서 수컷 짐승들의 행동에는 공통점이 있다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고 우리는 때로 그렇게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인간인 여자와 인간으로서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보다 수컷개나 수펄과 같은 존재로 분류되어 공통점을 가진다고 말해지는 것에 대해 그다지 기쁘지 않아 할 것이다.
나는 나와 당신이 모두 인간이므로 비슷할 것이라는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이며 우리가 편의상 만들어낸 분류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비슷한 것들끼리 서로 묶는다라는 분류는 가치중립적이 아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름의 창조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분류의 절대적 기준은 있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부자와 가난뱅이라는 분류를 만들어 내고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가난뱅이는 가난뱅이끼리 서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는게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지겠지만 적어도 거기에는 절대적 근거는 없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런 말을 만들어 차별을 만들어 낸 사람의 편견에 쫒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한국어나 영어를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는 대상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다. 누군가가 중산층이나 부유층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자본가나 노동자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는 그 말들 자체를 인간들이 허공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말은 꼭 그런 식으로 만들어 질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것을 보고 거기에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이름을 만들어 낸 것은 우리 자신이다. 이걸 생각하면 이해란 논리적 순환에 빠져들기 쉬운 행위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해의 형태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이 글을 마치자. 우리는 대개 세상의 사물이 이해가능하다고 가정하는데 익숙하다. 즉 모든 것은 아직 이해되지 않았을 뿐 노력하면 이해의 방법이 찾아질거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해가 뭔가, 이해의 형태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이해란 간단한 표현이라는 말로 이 글을 시작했다. 물론 그것이 이해의 유일한 형태는 아닐 것이다. 간단한 형태가 무슨 말인가가 애매하다는 점도 그걸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인간이나 뇌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과연 뉴튼물리학처럼 간결한 형태를 가지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에 대해 아직 우리가 인간이나 뇌를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으로 희망을 가지는 것이 긍정적 태도다. 미리 포기를 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긍정적이 되는가 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해를 하는 것을 답을 찾는 것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그 답의 형태에 대해 미리 어떤 선입견을 가짐으로써 어떤 진전을 이루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인간이나 뇌를 이해한다는 것이 뭔지 모르면서 이해를 한다면 이렇게 될꺼야라고 암묵적으로 가정해 버리고 있을 수 있으며 바로 그것이 우리를 계속 어리석게 만들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엉뚱한 장소에서 답을 찾고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이나 뇌를 이해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통상 과학이라고 부르는 형태가 아니라 예술이나 사귐이나 사랑의 형태로 생각되는 것과 비슷한 것일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도 위험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아는 어떤 것과 다를 것이다. 우리는 아직 어떤 형태든 이해를 못했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귐이란 인간과 인간의 뇌를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런 말은 기괴하게 들리겠지만 전세계 사람들이 SNS으로 무선의 형태로 연결되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아주 기괴하지는 않다. 전세계 인간들이 머리에 칩을 박고 공감대를 형성하여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미래가 올까? 전쟁도 없고 에너지문제나 환경문제도 없는 미래를 만들까? 나도 모른다. 그게 좋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이해라는 것의 형태를 아직 모른다. 적어도 나는 모른다.
우리들 인간은 참 많은 것을 이해하고 싶어한다.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한다. 때로 그것때문에 자기 목숨을 희생시키는 사람도 있다. 그 이해의 과정은 우리 자신을 바꾼다. 그 이해의 과정은 우리가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가하는 선택에 달려 있다. 그 이해의 과정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허공에서 이해의 대상을 어떻게 만들어 냈는가 하는 것에도 달려있다. 우리가 뭔가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된다. 무엇보다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조금쯤 더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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