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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사물의 가치 사전1 - 커다란 꿈과 대화

by 격암(강국진) 2015. 10. 2.

2015.10.2

커다란 꿈

 

과학자만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자들은 종종 허황되어 보이는 커다란 꿈을 꾸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화성을 개조하여 식민지로 만든다던가 상온 핵융합에 성공해서 인류를 영원히 에너지 고민에서 벗어나게 만든다던가 하는 꿈이 그렇다. 그런 꿈들이 허황된 꿈인가 아닌가는 개인적인 관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아무래도 그런 꿈들은 일상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상의 꿈이란 기껏 커봐야 승진을 꿈꾼다던가 집을 사는 꿈을 꾸는 것이요 그것도 너무 크다고 생각한다면 오늘의 회사 급식밥이 맛있기를 기대하거나 새로 사무실에 나온 아가씨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면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꿈꾸는 수준인 것이다.

 

커다란 꿈은 일상의 꿈과 비교되어 종종 부질없는 것으로 비판되곤 한다. 비록 역사에서는 허황된 꿈들이 현실이 되는 일들이 많이 기록되어져 있지만 허황된 꿈이 실패하는 경우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허황된 꿈이란 실로 오늘 저녁 먹을 것도 없는 사람이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 사회를 이렇게 개혁해서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철없고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커다란 꿈을 잊고 일상속에 빠져들 때 우리는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고 우리가 뭘 잊었는가를 잊는다. 우리는 때로 허황된 꿈에 빠질 필요가 있다. 당신이 비록 로켓 과학자가 아니고 탐험가가 아니더라도 화성여행을 꿈꾸고 화성에 이주하는 것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화성 개발에 대한 꿈에 빠지는 것은 바보같은 일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넘어서는 꿈을 통해 우리를 확대함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잊어버린 것에 대해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화성을 생각해야 지구가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야를 우주가 아니라 여기 한국 그것도 서울이나 부산이나 전주의 어느 한 동네 혹은 어느 골목에 제한해야 한다고 말을 자주 듣는다. 우리는 우리 발앞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지구를 보지 않고 한국만 보고 있으면 지구를 잊어버린다. 일단 지구가 잊혀지면 시야가 좁아지면서 이번에는 한국도 잊혀진다. 한국이 잊혀지면 다시 이번에는 서울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인간은 점점 더 작아져서는 좁쌀같이 된다. 그래서 뻔한 자신의 앞일에 대해 알지 못하고 커다란 문맥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커다란 꿈은 무엇보다 우리를 인간으로 남아있게 해주는 가치를 가진다. 적어도 그저 짐승이나 벌레처럼 먹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인간으로 말이다. 일상을 넘어선 커다란 꿈은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가치가 있다.

 

대화

 

사람은 언어를 통해 여러가지 일을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다. 인류의 문명이란 모두가 협력과 소통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인간이란 혼자서는 실로 무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뭔가 중요해 보이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대화만이 가치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대화는 모두 소중하다. 대부분의 대화는 시시하다. 하지만 서로 문맥도 맞지 않는 시시한 이야기로 이뤄진 대화라고 해도 대화는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경험을 공유하게 한다. 같은 상식을 가지게 한다. 서로의 이야기가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그래서 어떤 논리적인 결론이 나온다거나 어떤 문제의 해답이 찾아진다던가 하는 일이 없어도 그렇다.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서 그저 잘있냐는 질문을 반복할지 모른다. 그리고 말주변 없는 아버지도 잘있다는 대답을 할뿐 그 이상의 대화를 이어지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이 대화가 하나마나한 대화인 것은 아니다. 서로의 마음이 이어지고 신뢰가 생긴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은 그 대화에 참여하는 두 인간은 동일한 상식의 테두리안으로 당겨지게 된다.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힘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대화를 포기하고 대화의 가치를 과소평가한다. 설사 대화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은 뭔가 결과가 나오는 대화거나 정보나 재치있는 농담이 포함된 대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가치는 보이는 것 물질적인 것에만 있다는 생각을 한다. 시시한 잡담이 뭔가를 유지하고 뭔가를 만들어 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매일 같이 한시간씩 잡담을 나누는 친구보다 몇 달에 한번 나타나서는 비싼 음식을 사준다던가 돈을 준다던가 옷을 주고 가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나에게 해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자기와 많은 대화를 나눠준 사람에게 당신이 도대체 나에게 뭘 해줬다는 말입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외로운 독거노인이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나 먹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보자. 한 남자가 절벽에 끈 하나를 붙잡고 매달려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바나나를 던지자 끈을 놓고 바나나를 잡는다. 이 사람은 물론 바나나와 함께 추락하여 죽을 것이다. 물질만 보고 대화의 중요성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같은 실수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대화라는 끈에 매달린 존재다.

 

외로운 사람들 예를 들어 외로운 노인들이나 외로운 청소년들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그렇다. 그 대화가 꼭 인생에 대한 답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이야기의 내용보다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어떤 돈보다 어떤 음식보다 중요하다.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서다.

 

고립된 사람은 망가지기 쉽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아끼는 가족을 의심하고 사기꾼을 믿게 될 수 있다. 남이 보기에 터무니 없는 판단을 내린다. 자기 자신과도 대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서도 타인이 된다. 어제의 내가 가진 상식과 오늘의 내가 가진 상식이 달라진다. 결국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이런 것이 가능한데 그 사람이 돈이 더 있거나 부동산이 있다는 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노인들은 사기꾼에게 당할지 모르고 외로운 청년은 범죄자가 되거나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고립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때문에 고립된다. 우리는 가지지 못해서 고립되고 부자라서 고립된다. 인기가 있어서 고립되고 인기가 없어서 고립된다. 배워서 고립되고 배우지 못해서 고립된다. 그리고 커다란 사회는 작은 조각으로 나뉘어져서는 서로에게 미친 사람의 집단처럼 보이게 되기 쉽다. 대화가 중단되면 말이다.

 

우리는 대화를 중단할 수 없다. 대화는 우리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느끼게 하고 우리가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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