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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글을 쓰는 힘의 원천

by 격암(강국진) 2015. 10. 11.

2015.10.11

 

사람마다 글을 쓰는 방식과 이유는 다를 것이다. 또 그 답이 하나뿐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글이란 일반적으로 이런 힘으로 쓰는 것이다라고 나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내가 글을 쓰는 힘의 원천은 질문이다. 즉 나는 뭔가를 아니까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기 보다는 나도 뭔가를 알고 싶어서, 나도 내가 손가락을 움직여 쓰게 될 글이 읽고 싶어서 글을 쓴다. 적어도 상당부분은 그런것 같고 그래서 나는 내가 내 글의 첫번째 독자라는 말을 하곤 한다.

 

내가 모르는 걸 어떻게 글로 쓰는가. 물론 아무 것도 모르거나 어렴풋한 인상이나 영감도 없이 글을 쓰지는 않는다. 다만 이건 이래서 이런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써보고 써보면서 앞뒤가 맞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건 답이 될 수가 없겠는걸 하고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처음의 생각이 실마리가 되어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글이 써진다. 다 쓰고 나면 아 그게 이런거였구만 하고 나도 신기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 글이 남에게 재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설사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그걸 내가 어떻게 할 수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재미가 있다. 그러니 쓰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사실은 잊기 쉬운 것이다. 글을 쓰다보면 막연히 재미있는 글이나 막연히 유익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도 멋진 소설 한편 써보고 싶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뭐가 객관적으로 멋진 소설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은 멋진 소설의 특징들을 고민하고 그걸 어떻게 잘 조합해서 하나로 만들어 낼까 하는 식으로 이어진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글을 써내는 전문가들도 있는 것같아 보이지만 나는 도통 이렇게 할 수가 없다. 나는 누구도 진짜로 이렇게는 할 수 없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은 글의 핵심되는 부분을 별로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잘 해결할 수 있으니까 장식에 공을 들인다는 것일 것이다. 직업으로 글을 파는 사람은 남에게 재미있는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재미있는 글을 쓰지 않으면서 남에게 재미있는 글을 쓰는 재주를 나는 타고 나질 못했다.

 

나는 이제까지 소설도 몇편 썼다. 나쁜 꿈이라던가 철학을 하지 않는 닭 같은 소설을 몇편이나 썼다. 소설이란 뭘 위해 쓰는 것일까. 단편소설이라고는 해도 사실 상당한 분량의 글이다. 그런 것을 이유도 없이 쓰지는 않을 것같다. 그런데 사실 거의 그랬다. 그냥 쓰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고 이야기가 써지니 썼을 뿐이다. 이제와 돌아보면 그 글들도 안 그런것 같지만 질문에 답하는 나의 방식이었다. 이제와 새삼스레 그걸 깨닫다니 웃기는 일이다. 질문에 답하려고 하고 있었으면서 그렇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나쁜 꿈은 이 세상과의 연결점을 잃어가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건 왜 그럴까, 그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무렵에 비슷한 주제의 소설을 또 하나 썼는데 그것이 마음이 평화로운 남자다. 물론 그것은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 온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외국에 사는 것은 뿌리 없이 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뿌리 박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모질지 못하고 내가 한국을 너무 사랑한다. 한국을 사랑하는 것을 그만 둘수 없다면 한국으로 돌아와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좋은 방법이지만 유일한 방법은 당연히 아니다. 인간을 묘사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누구인지는 잊었지만 그 작가가 말하기를 줄거리따위는 아무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있는 인물의 묘사라고 했다. 이런 걸 보면 내가 과학도 였다는 것이 내 글쓰기의 방법에 큰 영향을 준 것같다. 아니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과학도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질문에 답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철학이고 과학이고 논증이다. 나는 사물에는 주관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질서를 찾고 법칙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인간에 촛점을 둔다. 그들은 주관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 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게 거의 전부다. 거꾸로 말해서 세상에는 객관적인 면도 있기는 있지 하는 정도 인 것이다. 논리니 법칙이니 하는 것은 거의 상관이 없다. 그들은 그저 하나의 인간을 열심히 묘사한다. 이런 인간 재미있지 않아 하는 식이다. 그런 인간이 세상에 얼마나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내 글쓰기의 근본에도 인간이 있고 인간을 쓰는 사람들의 근본에도 법칙과 질서가 있다. 애초에 내가 풀어야 할 질문이 있다는 것은 내게 어떤 제약이 있다는 것과 같다. 깊은 산중에 홀로 앉아서 풀처럼 살다가 가기로 했다면 세상에 무슨 일이 있든 누가 어떤 일을 당하든 상관이 없을 것이고 그러면 질문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질문이 없으니 답도 없을 것이다. 질문은 종종 이 세계가 엉망이라는 것 그리고 나도 그 세계의 일부라는 것에서 시작된다. 한국의 과학은 왜 이런가, 인간은 왜 싸우고 살아야 하는가, 막장 드라마는 도대체 뭐하는 물건인가, 이런 혼란한 세상을 합리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모든 질문뒤에는 결국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다. 나는 한국 사회에 관심이 많으니 따지고 보면 결국 한국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 쉽다. 

 

인간을 쓰는 사람들의 글에도 결국 관찰자가 있다. 즉 그 글을 쓰는 사람, 그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왜 하필이면 그런 인간들이 흥미롭다고 느끼는가 하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엉터리 정치가들을 풍자한 코메디를 보면서 마구 웃을 수 있다. 하지만 계속 웃다보면 그 코메디가 단순한 웃음거리 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현실의 아픔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다. 왜 저런 멍청이들에게 우리는 휘둘려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 피하기는 어렵다. 비슷한 방식으로 흥미로운 사람,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현실을 일깨운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내 삶은 평안해졌다. 불확실성이 감소했다. 그래서 질문이 줄어든다. 그건 그 나름대로 좋지만 결국 이런 변화도 극에 가면 또 해결이 필요할 것이다.  흔들리는 것이 인간이다. 흔들릴 때마다 질문이 생기고 거기에서 글이 생겨나는 것이 나의 글쓰기다. 질문하기와 인간에게 관심가지기를 멈출 때 내 글쓰기는 멈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질적으로 사는 걸 멈추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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