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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공동체를 꿈꾸며

공동체를 꿈꾸며 1 : 자유

by 격암(강국진) 2015. 12. 15.

소방관이 된 철학자를 쓴 프랭크 맥클러스키는 좋은 사람들속에서 서로 신뢰하면서 지금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공동체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다. 다시말해 인간이 하게 되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 공동체를 만들고 참여하고 키우는 일이다. 

 

또한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자아를 실현하는 것,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한한 우리는 결국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떤 환경속에서 자아를 찾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살아간다. 이렇다고 할 때 자아와 환경사이에 명확한 선은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어떤 공동체에 참여할 것인가는 자아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공동체가 있다. 종교적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도 있고 성장장애아를 가진 가족들이 모여서 만드는 생활 공동체도 있으며 농부와 소비자가 합쳐지는 생활협동조합도 있다. 가족은 물론 가장 중요하고 흔한 공동체지만 친인척간에 연락하고 지내는 보다 핵가족보다 범위가 넓고 보다 느슨한 공동체도 있다.

 

또한 직업적 테두리 안에서도 공동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나는 몇개인가의 연구집단에 소속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물론 직장이지만 또한 그것은 종종 지도자를 가진 공동체와 가까웠다. 그 집단에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더 크게 테두리를 그으면 과학자들의 전체 집단은 하나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과학자들은 과학자들로 이뤄진 공동체를 이루고 자기들끼리 소통하는 한편 일반사회와 소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과학자들은 사회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고 사회는 과학자들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는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는 하나의 중대한 질문과 만나게 된다. 좋은 공동체란 어떤 공동체일까. 그것이 비록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꿈이라고 해도 어떤 공동체가 현재 시점의 내가 꿈꾸는 공동체일까.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야 할까. 나는 공동체가 최소한 세가지 덕목을 가지기를 바란다. 그것은 자유와 솔직함 그리고 보람이다.  

 

자유에 대하여

 

우리는 왜 부자유스러워지는가. 어떤 공동체가 더 많은 자유를 제공해 주는가. 사람들은 종종 자유란 인간의 타고난 상태이며 부자유는 그런 자유가 악인이나 자연재해같은 외적인 원인들에 의해 파괴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부자유란 공동체의 실패라기보다는 공동체의 일부가 아닌 악당이나 자연재해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대개 그 반대가 더 진실에 가깝다. 부자유란 우리의 한계, 공동체의 한계에서 온다. 인간은 본래 자유로울 수가 없다. 부자유한 것이 타고난 상태이고 자유란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보기드문 일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 태어났고 영원히 유한하다. 그래서 살아가기 위해 외부에서 뭔가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고 동료와 연인도 필요하다. 어릴 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성장한 어른도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는 대화와 학습이 필요하다. 

 

공동체의 질서 혹은 규칙이란 우리가 그것을 구하는 방식이다. 그 방식이 엉망일 때 우리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그저 숨쉬고 굶어죽지 않기위해서 너무 많은 댓가를 치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방식이 훌룡하면 우리는 더 많은 자유를 누린다. 이런 의미에서는 질서라는 속박이 곧 자유다. 교통법규가 없는 나라는 자유롭게 운전하는 나라가 아니라 대개 아무도 안전하게 운전할 수 없는 나라이고, 법없는 나라는 자유로운 나라가 아니라 동네깡패에게 날마다 협박당하면서 사는 나라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정신적 넓이다. 어린 아이들은 화해도 잘하지만 싸우기도 잘한다. 어른이 보면 이유가 안되는 것으로 싸우고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욕심을 낸다. 어른이 만든 틀이 없다면 살아남기도 어려울 것이다. 관점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부자유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중요한 한가지 이유도 우리의 관점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싸움은 어린애 싸움이다. 누구도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싸움과 부자유는 정신적 능력의 실패고 우리의 한계가 들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좋은 사회를 꿈꾼다. 이런 것은 분명 좋은 의도다. 문제는 우리가 설계한 질서가 가정하는 정신적 넓이가 종종 너무 작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세상 안에서 사람들은 불편해 하고 결국은 불행해 진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다른 대안은 없다고 확신한다. 인간이란 원래 이러저러하다는 말들이 다 당연하다고만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독재자라고 부르는 사람을 어떤 사람들은 구국의 영웅이나 반인반신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이래서 그렇다. 그들은 인간이 지금과는 다르게 살 수도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런 소리는 사기꾼의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때로 확신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자신이 볼 수 있는 세상이 전부라고 너무 확신하는 사람은 설득은 하지 않고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무서운 일을 저지른다. 

 

우리는 소유에 중독되어 있다. 게걸스럽고 유치하게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한다. 어린애들이 욕심부리는 거나 매한가지다. 인간은 불안하니까 혹은 욕심이 나서 뭔가를 마구 소유하려고 한다. 내게는 쓸모가 없거나 영영 쓰지도 않을 것이면서도 다 끌어모아다가 자기 것이라고 이름표를 붙여서 독점하고 싶어한다. 물건을 가지고 명성을 가지고 인간을 가지려고 한다. 더 올라가려고만 할 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멈춰서 생각해 보지 않는다. 그러다보면 싸움이 나고 우리는 부자유스러워진다. 

 

자유는 기억력과 깊은 연관이 있다. 건망증은 자유의 적이다. 하나의 집단에 기억이 없으면 공평한 일처리라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오늘 내가 양보해도 그것이 기억에 남지 않을 것이고 내일은 또다시 양보해야 할 테니까 아무도 양보하지 않게 되기 쉽다. 어제의 기억을 잊어버린 사람은 어제 자신이 양보받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오늘의 나만 피해자라고 생각하면서 분해 한다. 그러면 싸움이 나고 아무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집안의 가장이라던가 어떤 집단의 리더가 가져야할 가장 첫번째 덕목은 두루 듣고 기억하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모두의 일을 듣고 비교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평가되고 기록되고 보상받을 것을 기대한다. 어떤 집단은 단 한사람의 리더가 사라지면 붕괴하기도 한다. 이는 그 사람과 함께 과거의 기억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진실의 기록이 사라지면 그 공동체가 죽는다. 은행에 불이나서 빚의 장부가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흩어진다. 기억이 없는 곳에는 자유도 없다. 인류는 글로 기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제대로 된 자유를 얻었을 것이다. 기록된 역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기록을 왜곡하고 독점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유의 적이다.

 

위선과 차별은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든다. 사람들은 뒤에서는 많은 일을 하지만 남의 앞에서는 금욕적으로 산다. 정도문제일뿐 누구나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똥을 싸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섹스를 한다. 그러나 소수의 변태나 모든 사람 앞에서 그렇게 한다. 위선에는 사회적인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모든 부모는 자식앞에서 적어도 한동안은 위선적이다. 어린 아이는 아직 부모와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안믿는 산타클로스 이야기같은 것을 하면서 아이를 환상의 세계에 머물도록 유도한다. 우리는 위선이나 차별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는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거기에도 정도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만큼 매춘이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나라도 드물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포르노가 불법이다. 성인여성이 여고생 교복을 입고 찍은 음란물을 봐도 불법이라고 할만큼 도덕적 수준이 높은 나라에서 아동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에 대한 처벌수위는 그다지 높지 않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가를 떠나서 사방에 이상한 불균형, 어설픈 환상의 세계가 있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성인군자처럼 살고 뒤로는 부패한다. 마음에도 없으면서 예절만 따진다. 이런 위선의 바닥에는 인간에 대한 불신, 차별 그리고 권위주의가 존재한다. 어른이 애들앞에서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애들이 아직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많은 사람들을 하등하다고 취급한다. 하등할 거라고 가정한다. 성인이 다른 성인이 뭘 읽고 보고 듣고 말하는 가를 허가제로 만들려고 한다. 

 

권위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흔히 예의를 엄청 따진다. 상황에 따라 행동 방식이 크게 바뀐다. 친구들끼리 있거나 술자리에 가면 추잡하게 행동하면서 부하직원이나 후배나 자식 앞에 가면 부처님처럼 엄숙하게 행동하는 사람 혹은 그 반대가 되는 사람은 아주 많다. 세상에는 자칭 사회지도층도 아주 많다. 뒤집어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사회피지도층으로 인식한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사람들을 온갖 방식으로 구별한다. 세상에는 규칙들이 많은데 그 것들이 일관성도 없으니까 자꾸 무리가 생긴다. 시간과 에너지가 낭비된다. 위선과 차별과 함께 산다는 것은 부자유스러운 일이다. 그 수많은 변신의 틀에 자신을 얽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없는 말, 우리가 가면 안되는 장소, 우리가 어겨서는 안되는 금기가 쓸데없이 많다. 우리의 말들은 금지된 주제를 다룰 때면 헛소리가 된다. 우리의 정신은 왜곡된다. 위선의 벽이 서있기 때문이다. 

 

 

 

자유란 정신적 성취다따라서 행복한 공동체바람직한 공동체가 무엇보다 많이 가져야 하는 것은 정신적인 공간의 넓이다 구성원이 모두 편안하게 공존할  있는  집을 정신세계에 만들어야 한다그렇지 못할  공동체는 우리에게 아픔을 준다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든다나는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많은 자유를 주는 공동체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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