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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공동체를 꿈꾸며

공동체를 꿈꾸며 2 : 솔직함

by 격암(강국진) 2015. 12. 18.

솔직함에 대하여


솔직하다는 것은 쉽지는 않아도 단순한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실 완전한 솔직함이란 완전한 자유처럼 도달할 없는 목표다. 우리는 종종 침묵함으로써 가장 거짓말을 하고 뭔가를 말함으로써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실질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을 피할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아는 것도 불가능한데 자기가 정말 솔직한지 어떻게 수가 있겠는가


공동체에 관련된 핵심적 문제는 집단은 개인보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럴 없다면 공동체는 모여서 서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만든다. 오래가지 않아 망하거나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면서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다시말해서 거짓이 공동체에 보편적일 공동체의 선택은 비합리적이 되고 수명이 제한되거나 애초의 의도와는 다른 일을 하는 단체가 되고 것이다


우리는 솔직함의 문제를 확신과 문맥 그리고 서로 다름의 세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있다. 먼저 확신의 측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여기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의견을 합쳐서 결론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결론이 사람 각각의 의견보다 합리적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지식을 고려했을 스스로 어느 정도나 자신의 의견에 대해 확신하는가를 솔직히 발언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은 자신의 의견에 대해 90% 확신하는데 다른 사람은 100% 확신한다고 해보자. 그런데 사람의 답이 다르다. 그렇다면 당연히 선택되는 답은 후자의 주장대로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과정에 있어서 어느 한쪽이 자신의 의견에 대해 지나친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면 사람이 가진 서로에 대한 신뢰는 배신당할 것이다. 합리성을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영특함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현실 사회는 어떤가오늘날 우리는 모두에게 자기피알의 시대라면서 무조건 된다, 있다라고 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이것은 누구 한사람의 태도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남들이 과장해서 말하는 것을 보면 자기도 점점 강한 어조로 말을 하게 된다. 우리는 남들이 말하는 것을 보고 이정도 알고 이정도를 확신하면 이정도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수위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알지도 못하는 확신자들때문에 일이 잘못될 것같아서 그렇다. 따라서 악순환이 계속되면 너도 나도 무조건 된다고 말하기 쉽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입장을 되도록 자신있게 말하는 것만이 용기라고 조언받는다. 자신의 무지와 망설임을 속이는 것이 지혜로 조언된다. 이런 세상에서는 뭐가 진실인지를 알기 어렵다우리는 무지한 확신의 유령과 싸우느라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불행하게도 정치가와 기업가들을 포함하는 여러 그룹의 리더들이 좋은 예들이다. 이들은 뭐든지 된다고 말하는데 중독되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현대는 많은 분야들이 전문화되어져서 전문화된 지식들이 조합되어져야만 하는 시대다. 현실사회의 중요한 질문들은 대개 여러가지 측면을 가지고 여러 전문분야에 관련되어져 있다그리고 여러 방면의 지식들은 조합되고 비교되어져야 한다. 오늘 저녁은 먹어야 하는가에서 과학예산을 얼마 배당할 것인가,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이르기까지. 아플 어느 병원에 가야 하는가에서 FTA 해야 하는가 혹은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건설해야 마는가 하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질문들은 고려해야할 여러 측면들이 있고 그것들은 비교되고 조합되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제아무리 과학이 중요해도 사람을 대량으로 죽여가면서 그럴 수는 없다. 그러니까 예산이 얼마나 필요한지, 만약 예산을 위해 저쪽 예산을 줄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예측이 필요하다. 춥다고 집에 불을 지를 수는 없다. 우리는 과학이전의 문제인 가치판단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뢰와 솔직함에 문제가 있으면 세계적 전문가들이 강당가득히 있어도 쓸모가 없다. 우리는 그런 전문적 지식을 조합해서 아주 엉터리 결과를 내놓을 있다. 나는 뭐든지 있다라고 쉽게 말하는 정치가, 내가 해봐서 알고 있다라고 자신에 차서 말하는 정치가를 매우 싫어한다. 왜냐면 흔히 그런 사람들이 자기 입맛에만 맞는 자칭 전문가들을 조합해서는 엉터리 결과를 내놓기 때문이다. 결과는 재정적 손실, 환경적 재앙, 도덕적 파산이


우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검증과정을 고안할 있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함의 문제는 수치나 증거로 모두 해결될 있는 것은 아니다. 수치나 증거로만 해결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기껏해야 인공지능프로그램이 빅데이터를 이용해서 모든 것을 인간대신 판단하는 세상을 살아가게 것이다. 규칙과 검증과정을 복잡하게 만들면 나중에는 미로속에서 진실은 더더욱 없어 수도 있다. 솔직함은 인간의 책임이고 인간이 발휘해야할 능력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잘난 하는 인간들이 자기의 무지를 솔직히 드러내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는 일이 많다. 우리는 솔직함이 부족한 사회에 살고 있다. 무지하지만 확신을 가지고 책임감은 없는 위선적인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뭔가를 결정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옳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문맥의 측면에서 솔직함과 거짓말에 대해 말해보자. 모든 말은 그것이 의미를 가지는 문맥이 있다. 우리는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거짓말도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대개 상대방이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침묵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거짓말이다


우리는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말은 대개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심지어 이런 말조차도 우리가 지구위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런 전제는 대개 너무나 당연해서 굳이 지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아주 많은 경우에 실은 진짜 중요한 차이는 이런 전제에서 나온다.


세상 경험이 많은 어른들이 젊은 세대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신입사원에게 기성세대나 사장이 거짓말을 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것이다. 어설픈 어른들이나 얇팍한 거짓말을 한다. 똑똑한 어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신참들이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뿐이다. 그들의 거짓말은 침묵이거나 모든 것이 괜찮다고 암시하는 작은 신호들이다. 때로는 잘하고 있어. 괜찮아. 멋져라고 말하는 격려가 가장 거짓말일 수도 있다. 그리고 결과 신참들은 날마다 엄청나게 일을 하고 노력하는데도 희생이 낭비되곤 한다. 게임의 법칙자체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노예문서에 도장을 찍고는 코가 꿰이고 은인을 미워하고 원수를 존경하면서 산다


부모로서 자식과 대화할 때와 그저 남남으로서 누군가와 대화할 때를 비교해 보면 우리는 침묵의 거짓말이 무엇인가를 쉽게 이해할 있다. 부모는 자식에 대해 애정이 있다. 따라서 자식의 일을 부모가 모두 결정할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의 생각이 모두 자식에게 전달되는 것도 아니지만 자식이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을 지적하려고 한다. 질문의 답이 중요한게 아니라 지금 네가 무슨 질문을 던지고 어디에 관심을 둬야 하는가 하는 것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려고 한다. 부모뿐만 아니라 애정이 있는 후배나 학생에게 선배나 스승이 조언하는 것은 대개 이런 부분이다. 소위 멘토가 하는 일도 이런 부분이다. 자잘한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답을 찾을 있는데다가 기본 전제들이 약간만 바뀌어도 아무 쓸모가 없다. 만리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은 내일 하루 편한 것에만 신경쓰다보면 망한다. 보는 눈이 달라지면 질문도 달라지고 답도 달라진다


물론 우리가 세상사람들에게 가지는 애정에는 정도차가 있을 밖에 없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친자식처럼 아끼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내가 거듭 말하듯이 거기에도 정도차가 있다. 자식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 남의 자식이니 죽던 말던 신경쓰지 않는다는 말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사람도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생각을 하는 , 서로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는 것이 솔직함의 기초다


솔직함이 없다는 것은 소통의 포기나 부재와 같다. 솔직함이 없는 사회에서는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 두고 그것을 이용하려고 한다. 아니 오히려 서로 서로가 다른 사람들이 착각에 빠지고 환상에 빠지는 것을 기대하고 방치하고 조장한다. 그래야 자신만이 진실을 알고 이득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행위를 적당히 어쩔 없는 일이라면서 정당화한다. 과연 그것은 어느정도까지는 어쩔 없다. 그러나 대개 우리의 정당화는 너무 강하다. 우리는 너무 일찍 소통을 포기하는데 그것은 이기적인 이유때문이다우리는 귀찮고 우리는 일만 생각하려고 한다. 경쟁에 이기려고 한다


우리는 경쟁에 이기려고 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서 침묵이 거짓말의 형태라는 것에 눈을 감는다. 휴전선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소식을 되도록 늦게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득이 수가 있다. 그는 혼자만 쉽게 피난을 가고 싶거나 물자를 잔뜩 사들여서 돈을 벌고 싶을지 모른다. 현재 상태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정치적으로 좋지 않아서 아무에게도 알리고 있을 수도 있다혼자서 해결해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행동은 때로는 다수의 사람들을 심각한 위험에 빠트리는 나쁜 행동이다. 세월호에서 학생들에게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하고 자신은 배를 떠나는 승무원을 생각해 보라. 이런 식이라면 집단으로서 국가나 사회는 심각한 상황에 대해 합리적으로 대처하지 못할 것이다. 솔직함은 합리성을 위해서 공동체에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을 막기는 힘들다. 우리가 스스로 환각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기는 힘들다


하나의 사회가 서로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질 수록 사회는 따뜻하고 솔직해 진다. 그렇지 못할 사회는 뻔한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찬다. 당장 나라가 망할 것같아도 괜찮아 괜찮아 같은 말만 세상에 퍼진다. 우리에게는 솔직함이 필요하다. 도시사람에게 시골사람들은 때로 폐쇄적인 이기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작은 공동체 생활에 익숙한 시골사람들에게는 도시 사람들이 깍쟁이처럼 보이는 일이 많다. 도시사람들은 왠지 거짓말은 안한다고 해도 동시에  상대방에게 중요한 정보는 하나도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별별 사소한 것까지 자꾸 숨긴다. 그런 도시인의 정서로는 공동체는 장님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이제 서로 다름의 측면에 대해 말해보자. 우리가 솔직하지 못하게 되는 가장 흔한 이유는 아마도 우리의 서로 다름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상황에 대해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같은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확실히 우리는 완전히 솔직하게 말하며 살기 어렵다. 나는 항상 솔직하다라고 믿는다면 사람은 무책임한 사람이고 말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말이란 결코 모든 진실을 한꺼번에 표현할 없다. 그러니 나는 항상 솔직하게 말한다라고 하는 사람은내가 하는 말들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거짓말이 아니야 하지만 오해의 소지는 있지, 그러나 오해를 하는 것은 너의 잘못이지 잘못은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많은 대화를 하면 우리는 오해를 줄일 있다. 여기서 바로 솔직함과 서로 다름이 가지는 핵심적 관계가 나온다. 사람의 차이가 너무 크면 도저히 대화로 오해를 제거하는게 불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대화를 하면 수록 오해가 쌓여서 나중에는 서로의 말을 듣지도 않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거대한 인식의 차이, 세대차이를 느낄 솔직할 없다고 느낀다. 나는 사랑해라고 말해도 저쪽은 당신 따위는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라고 알아 들을 판이다. 다소 극단적이지만 쉽고 흔한 예는 어린 아이와 부모간의 대화일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부모의 사랑의 결실이기를 바라는 낭만적 환상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경우 진실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부일 뿐이다.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우연과 실수의 산물이라는 것도 또한 진실의 일부다. 솔직한 것이 간단한 것이라면 부모가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에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드라마들을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이가 가지는 환상이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산타며 도깨비며 요정에 대해 이야기 하는 모든 부모들은 나쁜 사람들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을 왜곡한다. 친구며 부모며 스승이며 상사며 배우자 앞에서 어느 정도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척 한다.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비난할 수도 없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모두 한계가 분명한 작은 인간들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다. 종종 그게 아니면 우리는 완전히 대화를 단절하고 상대방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미쳐있다. 미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사람의 환상에 어느 정도 동조해 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우리는 물론 누구도 서로 꼭같지 않다. 궁극적으로는 모두 서로 다르다. 그래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우리는 모두에게 제한적인 수준에서만 솔직하게 산다. 그것이 솔직함의 한계다. 이것은 나쁜 의도때문이라기 보는 삶을 계속하기 위한 한계다. 진짜 의미를 전달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한문장을 말하고 의미를 부연설명하기 위해 우주가 끝날 때까지 떠들어야 것이다. 상대방이 계속 듣기나 한다면 말이다


결국 솔직하게 산다는 것은 자기 독립과 관련을 가진다. 우리가 틀속에서 모두를 바라볼 우리는 솔직하게 같이 살아갈 수가 있다. 서로가 자신을 설명할 있는 언어를 가진 셈이니까. 그러나 그런 언어도 없고 서로가 너무 다르다면 그런 때가 때까지는 같이 있는 사람들은 같이하고 같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조금은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밖에 없다. 독립적으로 혼자 서야하고 그것을 인정해 줘야 한다. 같이 하는 사람들은 공동체적으로 사는 것이지만 거리를 두는 사람들은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다. 너무 쉽게 모든 사람이 다같이를 외치는 사람은 문화적 제국주의자들이다. 자신의 생각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솔직함에 대해야 확신과 문맥 그리고 서로 다름의 측면에서 이야기했다. 우리는 솔직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기 삶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와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솔직함이 넘치는 삶이란 달성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외롭다. 어떤 사람들은 특히 외롭다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는 한가지 방법은 작은 공동체, 작은 자치단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집단의 결정이 어리석기 쉽다면 보다 작은 집단이 자기가 아는 문제에 대해 각자 판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작은 집단들은 물론 다시 커다란 집단속에서 공존할 있어야 한다. 지방자치나 마을만들기, 공동체 운동의 성공은 사회의 합리성을 증가시키는데 있어서, 사람들의 외로움을 해소하는 있어서 필수적이다. 그렇지 못할 우리는 끊임없이 답을 모르는 질문을 받고 답을 아는 척하는 일을 계속해야 것이며 그러면서도 결과로 고통받아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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