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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두번째 탄생

by 격암(강국진) 2016. 6. 21.

16.6.21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은 아주 자명한 것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이란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순간일까 아니면 아기가 엄마 몸에서 나오는 순간일까. 알에서 태어나는 거북이같은 동물들을 보면 탄생의 순간이란 알이 엄마 몸에서 나오는 순간도 아니다. 우리는 통상 알이 부화하여 새끼가 알바깥으로 나오는 순간을 탄생의 순간으로 생각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탄생의 순간이란 더욱 애매한 것이며 인간은 적어도 두번 이상 세상에 태어난다. 그 중에 어느 탄생이 가장 인간적이며 중요한 탄생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다른 동물들과 비교했을 때 인간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기나긴 유년기다. 어떤 동물도 수십년 동안 아기를 돌보며 키우지 않는다. 인간은 무력한 아기로 태어나고 어른에 의해 길러진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아이는 기초적인 희노애락의 감정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부모로부터 배운다. 유년기는 아이가 부모로 이뤄진 세계안에 인식적으로 갇혀있는 알의 시기다. 유년기 동안 이 세상에서 부모를 넘어서 존재하는 다른 존재들은 제대로 의식되지 못 한다. 아이가 성장하고 또 부모가 그 세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서야 그 껍질은 깨어지고 아이는 비로소 그 껍질의 균열 너머를 보기 시작한다. 헤르만 헷세는 데미안에서 이 무섭고 위험해 보이는 바깥 세상을 엿보는 아이를 잘 묘사하고 있다. 

 

종종 유년기의 끝은 첫 사랑으로 시작되는 데 사랑이란 결국 부모를 넘어서 존재하는 누군가에게 큰 관심을 가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반항하면서 유년기를 끝내기도 하지만 부모에 대한 반항이 반드시 그 유년기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종종 가장 반항적인 아이도 작은 세계에 갇혀 있다. 그 아이는 결국 여전히 자기와 부모 혹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더한 아주 작은 집단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 부모에 대한 지나친 반항은 결국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다 아니 부모의 인정만이 중요하다는 유아적 발상의 결과다. 어떤 아이는 세상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그 알에서 나오지 않고 살아가려고 한다. 마냥 응석을 부린다. 이것은 마치 깨어진 알껍질을 뒤집어 쓰고 눈을 감은 채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본인의 성장과 부모의 능력에 따라 탄생의 순간은 본인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본인이 그것을 자각했건 그렇지 못했건 오기 마련이다. 우리는 세상에 던져진다. 

 

인간의 두번 째 탄생은 여러모로 특이하다. 첫째로 인간은 유년기에 대한 상당량의 기억과 습관을 가진 채로 태어난다. 이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탄생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의식적으로 부정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알에서 깨어난 거북이나 뱀은 알속의 세계와 알 바깥의 세계를 혼동하기 힘들 것이다. 그 둘은 서로 다르기도 하지만 거북이에게 알 속의 세계에 대한 기억이 강력하게 남아있을 것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유년기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종 그것이 자신이 계속 살아가게 되는 세상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거기에 집착한다. 

 

부모로 이뤄진 알 속의 세상에서 아이는 부모로부터 많은 관심과 보호를 받는다. 인간의 아기는 애초에 그렇지 않다면 살 수가 없을 정도로 무력하다. 아기가 뭔가를 잘못 먹거나 어떤 벌레에게 물리거나 위험한 곳에서 떨어지거나 춥거나 더울까봐 부모는 언제나 정신이 없다. 그리고 아이는 이렇게 관심받는 것에 대해 익숙하다. 즉 아이는 그 세상에서 영화배우나 왕자처럼 주목받고 관심받는 것에 익숙하다. 사실 아이는 부모에게는 슈퍼스타같은 존재다. 다른 사람들은 그 아이에게 그 정도의 관심이 없지만 부모는 자기 아이의 표정하나 행동하나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아이는 부모의 알 속에 있는 동안에는 부모의 진짜 의미를 거의 모른다. 그 관심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종종 자신이 관심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실감하지 못한다. 

 

이 당연함이 문제다. 바깥 세상과 유년기 세상의 가장 큰 차이란 바로 이 관심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바깥 세상이란 기본적으로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 적어도 그 관심이 당연하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당신이 아기였을 때 당신이 배고프다던가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면 세상은 당신에게 관심을 가졌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은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깥 세상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항상 그런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이따금은 우리가 죽을 것처럼 외롭고 힘들고 배고프고 아파도 세상은 우리에게 완전히 무관심하다고 느끼게 된다. 

 

생각해 보면 세상의 무관심은 새삼 충격받을 일은 아니다. 정도의 문제일 뿐 당신도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당신도 지구 어딘가에서 천원이 없어서 죽거나 고통받거나 불구가 되거나 하는 사람의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이다. 당신도 잠깐만 생각해 보면 끔찍한 일이 지구 여기저기에서 아니 당신의 주변 여기저기에서 엄청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것때문에 매번 충격받지는 않는다.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거나 그들은 당신의 가족이 아니다. 그들은 당신과 어차피 타고난 계층이 다르거나 학력이 다르다. 그들은 임대아파트에 살기때문에 혹은 직급이 당신과 다르기 때문에 당신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혹은 그들은 당신과는 달리 비정규직 노동자거나 농부거나 과학자일지 모른다. 그들은 당신보다 가난하거나 당신보다 부자다. 그들은 당신과는 달리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은 사람들일지 모른다. 다시 말해 그들은 당신과는 다르다. 그들은 우리중의 하나가 아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장소에서 수없이 많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분별의 벽을 세운다. 그리고 그 벽의 너머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무지해 진다. 내 손가락이 아픈 것은 참을 수가 없지만 누군가의 뼈가 으스러진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그 무관심의 벽 뒤에 있다면 우리는 관심이 없다. 어느새 누가 불에 타죽었다거나 일가족이 동시에 자살했다는 말을 들어도 우리는 느끼는게 없다. 우리가 그 벽의 안 쪽에 있을 때는 말이다. 우리는 대개 벽이 존재한다는 것, 그 벽 뒤에 사람들이 있고 생명이 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다. 굉장히 잔인한 말을 굉장히 태연하게 말해 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따끔식은 벽의 바깥 쪽에 선다. 차별받고 무시당하는 쪽에 선다. 당신은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혹은 못생겨서 혹은 운동을 못하거나 춤을 못추거나 해서 별 매력이 없다는 말을 듣거나 하면서 차별을 받을 것이다. 심지어 너무 똑똑해서 너무 예뻐서 너무 부자라서 남들의 선입견에 당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당신은 세상이 당신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느낀다. 당신의 아픔과 고독에 대해 그들은 아무 관심이 없다. 이것은 알속의 세상과는 다르다. 부모의 세계와는 다르다. 그러나 이미 알 속의 삶은 불가능하다. 당신은 공포를 느끼게 된다. 당신의 마음은 아파진다. 당신은 갑자기 스스로를 어떤 외계행성에 홀로 떨어진 존재처럼 느끼게 된다. 

 

옛 말에 사람은 결혼을 해야 진짜 어른이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중요한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 중요한 하나의 진실을 자각하기 위해 반드시 결혼하고 아이의 부모가 되는 일이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종종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워보면서야 비로소 세상의 관심과 사랑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유년기의 반복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역할을 맡는 것이다.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유년기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 안과 바깥은 같지 않고 적어도 당연하다는 듯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번에는 부모로서 관심과 사랑과 에너지를 제공하면서 위대한 부모는 커녕 그저 변변치 못한 부모, 심지어 자식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부모가 되는 일도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이 간단하지 않은데 그것이 어떻게 당연한 일이 될 수가 있고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 될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진정한 바깥 세계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두번째 탄생을 진정으로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두번 째 탄생이 가지는 두번 째 특징은 동물은 기본적으로 태생이건 난생이건 자연 환경속으로 태어나는 것인데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적 인위적 환경속으로 태어나는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동식물도 자연을 변화시킨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측면이 있겠지만 동물에 비해 인간은 매우 자연스럽지 못한 환경속으로 태어난다. 따라서 탄생의 성공과 실패는 그 개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 인위적인 환경을 만들어 내는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냉장고 속에서 알이 부화할 수 없고 진공속에서는 설사 알이 깨어난다고 해도 깨어난 새끼는 바로 죽어 버린다는 의미에서 그 탄생은 실패다. 인간은 부모로 이뤄진 알속에서 사회적 공동체라는 더 큰 알 속으로 태어난다.   인간의 탄생이 두번 이상일 수 있는 것은 이때문이다. 

 

인간은 때가 되면 알을 깨고 새로운 탄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바깥 세상은 무섭고 우리는 연약한 존재다. 바깥 세상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데 우리는 완전한 무관심속에서 살 수가 없다. 그런 식이라면 인간은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다. 우리가 사랑과 관심이 완전히 불가능한 세계를 살고 있다고 100% 믿고 있다면 그것은 마치 독방에서 종신형에 처해지는 것과 같다. 우리의 삶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텅빈 지구위를 날마다 홀로 걷고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어느 쪽으로 소리쳐봐도 그저 자기 소리의 메아리만 돌아올 뿐 살아있는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다. 생각없이 움직이는 무서운 좀비들만 가끔 보게 될 뿐이다. 삶이 이런 식으로 영원히 계속되며 변화의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다면 우리는 하루 빨리 이 무섭고 외롭기만한 삶을 끝내고 싶어지지 않을까? 오랜 부부생활을 한 사람들의 경우 사망의 시기가 서로 비슷한 경우가 많다. 그것은 한 배우자가 죽게 되면 남은 사람에게 이 세상이 그렇게 보이게 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 세상 사람들은 나의 삶에 별 관심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가야할 새로운 알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가족과 같은 사회적 공동체다. 사회적 공동체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외국에 처음 나가 본 사람은 전에는 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도 어떤 사람이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매우 반갑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외국인들과는 달리 한국인 끼리는 비록 전에 본 적도 없는 사이라도 서로의 기쁨과 아픔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줄 것으로  기대하게 된다. 

 

요즘 청년이 힘들다는 말들이 많다. 그 이유의 중심에는 공동체의 붕괴가 있다.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사랑하고 관심을 버리지 않을 때 신세대는 외롭지 않고 공포에 빠지지 않는다. 청년의 아픔이란 반드시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날마다 라면을 먹는가의 차이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 기성세대는 신세대들에게 사랑이 없다. 기껏해야 내 자식만 직장 잘 잡고 잘 산다면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대책이 있건 없건 내 알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는 남의 자식뿐만 아니라 내 자식도 외롭고 힘들다. 알의 바깥으로 나왔더니 지옥같다는 생각이 든다. 알속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내 자식에게 언제나 도시락을 줄 수 있다고 해서 짝이 굶고 있어도 너 혼자만 자기 도시락을 먹으라고 가르치는 부모는 그 친구와 동시에 자기 자식도 지옥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 자식도 부모하고만 사는게 아니라 세상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죽음의 메세지가 가득하다. 우리는 어느새 사람은 그저 자기 힘으로 산다라는 반공동체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빠지고 그것을 당연시 하며 그것을 열심히 가르친다. 요즘 어린 아이들은 그런 것만 봤기 때문에 사람이 이기적인 것이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 것같다. 그들은 사회적 연결을 느껴보지 못했다. 사자가 사냥을 해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반드시 노동의 댓가를 받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자가 먹이를 찾을 수 있는 생태계 안에 있기 때문에 먹이가 사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수조나 수십조의 세금을 투자받거나 사회적 인력의 제공으로 연명해가는 대기업들이나 은행들이 내가 잘나서 잘먹고 잘산다고 말하는 것은 웃긴 것이다. 

 

사람들은 외롭고 힘들다. 두번째 탄생은 실패하는 것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어느 때보다 더 높은 자살률이 이것을 말해준다. 세상은 무섭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세계를 사는 현대인이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기는 점점 더 힘들어 진다. 이제 우리는 대개 위대한 가문을 위해서도 위대한 국가를 위해서도 위대한 신을 위해서도 살지 않는다. 가치와 의미의 창출은 어렵지만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파괴하는 방법은 널리 알려져 있고 쉽다. 한국은 출산률도 매우 낮다. 이것에는 직접적인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이유들의 뿌리에는 두번째 탄생이 실패하고 있다라는 공통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기를 낳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그 아기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보이지 않거나 그렇게 하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이 필요해 보인다. 무수한 경쟁을 통과한 명문대 학생도 먹고 살 걱정부터 해야 하는 시대니까 말이다. 

 

모든 논란의 시작이자 마지막에는 한가지 사실이 남는다. 그것은 인간은 두번 이상 탄생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것은 당연한 것이고 널리 알려진 사실인 동시에 뜻밖에 거의 무시되고 별로 생각되어지지 않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냥 자신이 누구인지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당연한거 아니냐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망각하고는 어떤 논리나 계산도 무의미하다. 내가 누구인지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다시 생각해 보는 자세가 없다면 세상을 더 좋게 만들겠다는 이상주의자의 행동과 열정도 실은 인간을 급속도로 죽이고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지금 시대에는 인간은 전에 없이 더 인위적인 세상에 태어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생각의 작은 차이가 세상을 지옥으로도 천국으로도 쉽게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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