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영화 돼지의 왕을 보고

by 격암(강국진) 2016. 8. 27.

16.8.27

2011년에 만들어진 영화 돼지의 왕을 뒤늦게 봤다. 전부터 제목은 알고 있었는데 막내가 숙제로 보고 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같이 관람했다. 돼지의 왕은 포스터가 보여주듯이 두 아이와 그들이 알고 지내는 철이라는 아이를 주요 출연인물로 한다. 그들이 학교에서 어떤 일을 당하고 저질렀는가가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영화는 짜임새를 잘 갖춰서 재미가 있다. 잘 만든 영화다. 그러나 스포일러를 잔뜩 만들고 싶지 않은 나로서는 한가지 질문에만 집중하고 감상평을 끝내려고 한다.

 

 

이 영화는 불편한 영화다. 돼지의 왕은 18세 관람가로 되어 있는데 자살과 폭력이 아주 많이 나온다. 극중 인물들의 대사도 험악하며 영화는 우울하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정말 누구하나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너만은 행복하라라고 말하는 극중 대사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들릴 정도다. 

 

그러나 이 영화를 불편한 것으로 만드는 결정적 이유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이 영화를 불편한 것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영화가 하나의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이 질문을 짧게 요약하자면 이렇게 될 것같다. 우리는 어떻게 악과 동거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불완전한 것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누구나 불공평한 일을 이따금 당하게 된다. 재수없는 사람들은 그것도 유달리 그렇다. 통상 나이가 들면 그런 일들을 피하는 여러가지 방법을 알기 때문에 그 횟수가 줄어들수 있지만 그래도 마찬가지다. 누구를 만날지 모르게 사람들과 섞여 지내야 하는 학교나 군대같은 곳에서는 상황은 종종 더 안좋다. 이거야 말로 운이 정말 좋지 않으면 우리는 악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학교 바깥에서도 상황은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 이 세상에 악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없어지는 때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악과 어떻게 동거해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나올 수 있는 답은 3가지밖에 없는 것같다. 하나는 악에 굴복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악과 싸우는 것이다. 마지막은 악을 무시하고 피하는 것이다. 

 

악에 굴복하는 길은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을 그냥 삼키고 그런 처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오히려 그 악의 부하가 되어서 거기서 이득을 취하려는 태도를 포함하기도 한다. 권력에 굴복하고 권력에 복종한다. 힘이 센 놈에게 당하고 사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당연한 세상의 이치이다. 나도 나보다 힘이 약한 놈에게 악을 행하고 살면 된다. 굴복에 대해 억울해 하지 말고 더 많은 놈들을 굴복시키고 살 노력을 해라. 비굴하게 사는 놈들은 노력을 하지 않거나 어리석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 권력자들 때문에 악한 놈들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내가 악 그 자체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악과 싸우는 것은 그 악을 무찌르고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 싸움은 악과 선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악과 악의 싸움이 된다. 내가 한대 맞았으면 더 세게 때려줘야 한다는 것이 이 선택이다. 적어도 두대 맞았으면 한대는 때려줘야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식으로 악과 싸우는 길은 결말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미친 개가 나를 두번 물었다고 내가 미친 개를 물면 그 개가 그냥 순수히 물러나지 않는다. 결국 싸움은 계속된다. 악의 무서움은 악은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같이 신세망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실 악과의 싸움이란 항상 악이 나를 자기와 똑같은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다. 악의 뿌리는 악이라기 보다는 어리석음이다. 미친 개는 개라서 나를 문다. 물론 나는 개에게 너는 왜 부질없이 나를 공격하는가. 그래봐야 너에게 좋을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해도 개는 이해를 못한다. 이게 왜 안좋냐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미친 개에게 물린 나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도 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도 개를 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미친 개와 물고 물리는 존재, 한 마리의 개같은 존재가 될 뿐이다. 그 개를 죽여버리든지 아니면 그 개를 설득해서 제발 이런 바보같은 싸움은 그만하자고 하고 싶지만 죽이기는 힘들고 싸움이 바보같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은 죽이기보다 더 힘들다. 개를 인간으로 만들어야 하기때문이다. 

 

악을 무시하는 것은 악을 피하는 것이다. 악에 굴복하지는 않지만 되도록 거리를 두고 너는 그렇게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살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똥은 더러우니까 피한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을 피하는 것은 대개 악에게 굴복하는 길로 간다. 누군가가 부당한 짓을 하는데 그걸 그냥 무시하면 악은 점점 더 대담해지고 결국은 더이상은 어디에도 피할 길이 없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적어도 모든 경우에 이렇다고는 할 수 없어도 피할 수 없이 악과 부딪히게 되는 일은 대부분 생긴다. 그러니까 악은 단순히 피해지지가 않는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을 악과의 동거라고 부르자.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언뜻보아 가능해 보이는 3개의 답을 모두 나열한 후 그걸 전부 고려해 보면 모두가 이 모양이다. 별로 신통치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 질문을 대충 넘긴다. 이 질문을 자주 생각하지 않고 이 질문이 등장하면 위에서 나열한 세개의 답중의 하나를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걸 좀 생각해 보면 그 당연한 답이 현실에서 별로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이 금새 분명해지지만 그래서 그런 생각을 피한다. 

 

아이가 말한다. 나를 때리는 놈이 있으면 어떻게 할까? 우리가 악행을 목격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교과서에서는 순수한 선으로서 악과 싸우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요즘은 초등학생도 이런 말을 쉽사리 믿지 않을 것이다. 친구가 도시락을 안싸왔으면 네것 나눠주지 말고 혼자 먹으라고 하는 부모도 있고, 분양아파트 산다고 임대아파트 사는 아이들 못 들어오게 벽으로 막아버리는 어른들도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기는 권력에 굴복할지언정 깡패하고 친구하라고 하지는 않기 때문에 너도 때려서 이기라고 하거나 피해라, 무시하라고 한다. 결국 도움이 되는 답은 하나도 없다. 

 

이 모양이니 영화는 불편한 것이다. 답이 없어 보이는 질문, 그래서 우리가 여러가지 악을 행하게 만들었던 질문을 다시 제기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불편해서 영화를 보지 않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거듭 제기하는 것이야 말로 시대적 양심을 지키는 행위라고 칭찬을 할만 하다. 우리 돼지는 되지말고 인간이 되자고 외칠만하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위에서 말한 답중의 하나를 단언하는 행위인데 외치기는 쉽지만 결국 나중에는 목소리가 잦아들어가기도 쉽다. 

 

나는 이 세가지의 답이외에 답이 없어 보이는 것 혹은 그 이외의 것이 답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객관화의 오류, 절대성의 오류, 계몽주의의 오류같은 것이 저질러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질문이 있고 가능한 답이 3가지가 있다면 비록 내가 그 답을 모를지라도 답은 분명히 그 세가지 중의 하나이어야만 한다는 논리가 전개된다. 그런데 어느 것도 답이 아닌 것같다. 이런 모순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정의를 이룩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절대적인 의미에서 선이 되거나 악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나도 유한하고 다른 사람도 유한하다. 우리는 우선 선한 자가 되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종종 그 중압감때문에 오히려 악인이 된다. 

 

나는 가치의 상대화를 통해서 모든 악과 선을 중화시켜버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왼쪽으로 달리건 오른쪽으로 달리건 거기에는 절대적 이유가 없으므로 각자 자기 맘대로 달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한국의 법규, 한국의 상식이 있다. 우리는 그걸 지켜야 한다. 다만 그것을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테두리를 전제로한 임시적인 것으로 보고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여전히 한계를 가진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한국의 바깥을 볼 수도 있어야 하지만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고맙게 여기고 소중히 다뤄야 한다. 한국이라는 테두리를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절대화하지말고 동시에 그 바깥도 볼 수 있어야 한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크레파스를 훔쳐서 썼다. 어른의 관점에서 그런 행위는 물론 나쁜 것이지만 아주 흉악한 일은 아니며 종종 그저 귀여운 장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크레파스를 도둑맞은 아이가 도둑질을 한 아이에 대해 때려 죽이고 싶을 정도의 분노를 일으킨다면 어른은 그것을 그저 철없는 생각이라고 말하기 쉽다. 이 생각은 어른의 입장에서는 옳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옳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가 당신의 배우자를 훔쳐가거나 당신의 집을 훔쳐가거나 당신의 아이를 죽인 후에 이 일은 뭔가 더 큰 차원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며 여기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철없는 생각이라고 해도 당신은 당연히 그건 그렇지 라고 할 것인가? 어떤 정권하에서 아주 부당한 일을 당했지만 그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이 우리나라를 위해서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니 당신이 그렇게 분노하는 것은 철없는 생각이라고 해도 당신은 당연히 그건 그렇지라고 할 것인가?

 

우리는 도통한 도사인척하거나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즉 객관적이며 유일한 사회적 정의를 내가 알고 있으며 나는 그에 따라서 살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설사 내가 그걸 알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이 존재하며 누군가는 그런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거기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고 우리가 그런 걸 알 수도 없다. 그런 걸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의 분노나 아픔에 대해 오히려 무관심해 진다. 마치 자기가 어린애 앞에서 선 어른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아파하면 철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치고 정말 자기 희생에도 무관심한 사람은 정말 거의 없다. 자기가 아파본 사람이 남의 아픔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 자기가 아픈 것도 참는다. 다른 사람이 더 아플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만원손해보는 것보다 누군가가 천원손해보는 것이 더 아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답은 1번도 2번도 3번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하며 다른 인식의 경계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때로 유달리 넓을 수는 있지만 그래봐야 유한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적당히 살라는 말에 분노한다. 사실 적당히 살라는 말은 종종 악에 굴복하라는 말을 의미할 때가 많다. 악에 굴복하는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그렇게 말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말 자체는 중립적이다.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오늘 착한 일을 하나하고 오늘 악과 한번 싸웠다고 해서 자신이 선 그 자체인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렇게하지 못한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된다. 오늘을 그저 재수 좋았던 날로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바뀔 것이다. 사람은 참 안 바뀌지만 바뀌기는 바뀐다. 미친 개를 미워하기 보다는 미친 개를 동정해야 한다. 미친 개와 싸우게 되더라도 그래야 한다. 미친 개를 미워하는 싸움은 우리를 미친 개로 만든다. 

 

젊은 사람들 중에는 유달리 순수하게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사람들에게 니들은 모두 악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순수한 선이 될 수 있다고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경험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일찌감치 순교자로 죽어 쓰러지는 경우를 제외하면 금새 세상에 절망하고 악에 편입된다.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만들려고 하다가 잘 안되면 세상을 저주하고 세상이 쓰레기니 나도 쓰레기처럼 살아야 겠다면서 자기가 악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구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저 오늘 길에 쓰러진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거나 부당한 대접을 받는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응원하거나 내가 좀 아프지만 다른 사람이 더 아플 것을 고려해서 한 번 참아주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결국 세상을 바꾼다. 이것은 반드시 큰 악에 굴복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뭘 해야 할 것인가는 각자의 문제이며 매 순간 다시 생각해 봐야할 문제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답이 있다고 믿는 것이 오만과 악의 시작이 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