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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대학에 대하여

단순한 삶과 4차산업혁명

by 격암(강국진) 2016. 10. 13.

단순한 삶과 4차산업혁명

 

오늘날 단순한 삶을 사는 것은 그저 권장되는 일을 넘어서 꼭 필요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날은 즉흥적으로 살아야 하고 가볍게 살아야 하는 시대이며 자유롭게 살아야 하는 시대다. 사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건 이해하지 못하건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다만 시대를 이해하고 노력하지 못하면 우리는 시대에 뒤지고 시대를 오해한 댓가로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을 고통받게 만들게 된다. 마치 공화정의 시대가 이미 왔는데 헛되이 왕조시대를 아직도 살아가려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먼저 단순한 삶이라는게 뭔지 정리해 보자. 단순한 삶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종종 어디 오지에 가서 거의 사람 안 만나면서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것을 상상하곤 한다. 그런 것도 확실히 단순한 삶이며 무소유의 교훈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맞다. 이런 저런 일에 부질없이 관여하게 되고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면 우리는 어느새 노예처럼 바쁘게 살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말 그대로의 무소유를 전면적으로 실천한다는 것은 그냥 얼마 안가서 굶어죽거나 짐승처럼 살게 될 어리석은 일이다.

 

단순한 삶은 단지 적정한 수준의 소유란 어느 수준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단순하게 사는 일의 핵심은 그보다는 우리의 삶을 시공간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경계를 분명히 나눠서 사는 것이다. 여러 개의 다른 게임의 법칙 혹은 철학을 동시에 지키는 것이며 어떤 특정한 하나의 사회적 역할을 자신의 정체성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지켜지면 때로 아주 많은 형식을 지키는 번잡한 삶을 살아도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가볍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 될 수 있다. 그 번잡함이 경계를 넘어 우리의 삶 전체를 잠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차 설명하겠지만 바로 이 특징때문에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도 같이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당신이 어딘가에 있는 테마파크나 온라인게임에서 왕대접을 받고 왕의 행세를 한다고 하자. 그렇다고해도 당신은 그 테마파크나 온라인게임을 벗어나면 당신은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은 첫번째 직장에서는 중요한 리더일지 모르지만 두번째 직장에서는 단순 신입사원일 수 있다. 당신은 주방장으로서 주방에서는 카리스마를 발휘할지 모르지만 동시에 산에 등반하러 가는 팀에서는 당신은 제일 사소한 일을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당신은 선생인 동시에 제자이며 주인인 동시에 세입자이고 달인인 동시에 초보자이며 오타쿠같은 수집가인 동시에 인문학 강사일 수 있다. 이것을 명심하면 우리는 아주 바쁘고 복잡한 삶과 아주 단순하고 조용한 삶을 동시에 살 수 있으며 더불어 다른 사람들을 부질없이 억압하고 그로 인해 싸움이 벌어지는 일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의 본질은 특정한 직업이 아니다. 오늘날은 이미 한 사람이 하나의 역할을 고정적으로 해서는 잘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4차산업혁명이 열어가는 세상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지금도 몇개의 직업을 동시에 가진 사람들이 많지만 가까운 미래에 사람들은 더욱 그렇게 살게 되어서 하나의 직업이나 사회적 역할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앞으로 없어질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런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은 시대로부터 처벌을 받아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것이라는 말이다. 이미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무너졌고 퇴직후 정체성 혼란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은 세상에 흔하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날에도 이 경계와 분할의 문제를 무시하고 이 세상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하나의 세계로만 보려는 시각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 그들은 자기가 한번 대장이면 어디서나 언제나 대장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고위직 직원이면 부인도 자신이 직원들의 상전인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아예 왕조시대의 발상이 아니라면 마치 훌룡한 요리사는 훌룡한 장군이고 훌룡한 과학자이며 훌룡한 탐험가라는 식의 발상이다. 그리고 이런 착각이 싸움을 만들고 사람들의 삶을 구질구질하게 만들며 소위 갑질논란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정체성, 당신의 존재이유를 어떤 한 직업이나 한 역할과 동일시 하지 말아야 한다. 왕의 옷을 한 번 입었다고 그 옷과 자기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어쩌다 스타가 되었다고 그 스타라는 간판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 사고 방식은 흔히 허세를 만든다. 이 허세는 한국에서 특히 심한 것같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경력중 가장 화려한 것으로 고정되어 불리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선배님, 사장님, 박사님, 이사님, 회장님으로 불리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자신은 계속 그렇게 대접받아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크게 실망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그게 다 허세다. 직위나 인기는 가라앉기 마련이고 허세를 유지하고 가면에 집착하면 우리는 너무 많은 댓가를 치뤄야 한다. 때로는 그 댓가가 진짜 나쁜 인간이 되는 것일수도 있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시각은 우리의 행동범위를 줄인다. 예를 들어 세상에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학습을 강조하는 대안 교육이 있고 우리가 흔히 스파르타식 교육이라고 부르는 타율을 강조하는 고전적 교육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이 둘중의 하나가 답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대안 교육이 맞으면 고전적 교육이 틀린 것이고 고전적 교육이 맞으면 대안 교육은 틀린 것이 된다. 객관적 세계는 하나밖에 없으니 올바른 답도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흑백론적 세계에 사는 사람은 삶이 고달프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둘 중하나를 답으로 택하고 그 반대편을 악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 내가 맞으니 저쪽은 틀렸다는 것이다. 답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싸움이 나기 쉽다. 싸움이 나면 점점 선악구분은 극단적이 되어 이제 상대편은 지옥에서 탈출한 마귀처럼 보이게 된다. 어떤 사람의 일면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해서는 다 알겠다고 생각한다. 저 사람은 좌파라던가 우파라고 부르면 그걸로 판단 끝인 것이다. 세상은 반으로 명확히 갈라져 우리편 반대편으로 갈린다. 그러니 이런 사람과 그 사람 주변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고 불안하다.

 

이들보다 약간 더 복잡하게 생각하는 부류는 이렇게 사고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대안교육이 적합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고전적 교육이 적합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객관적 세계를 시간으로 확장한다. 즉 같은 사람도 대안교육이 적합한 때가 있고 고전적 교육이 적합한 때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의 객관적 세계는 개인의 차이와 시간적 차이가 존재하는 좀 더 복잡하고 확장된 차원을 가진 곳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앞에서 말한 흑백론적 사고를 하는 사람보다 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며 물론 확장된 차원의 세계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것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단일하고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를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즉 다시 말해 비록 우리자신이 그걸 모를 지라도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매우 똑똑하신 분은 그 정답을 알고 있을거라고 믿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정답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지적 권위앞에서 약해진다. 얇팍한 토론이 뭔가를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느낌과 힘으로 선택을 하기보다는 어떤 복잡한 이론을 따라가려고 하기 쉽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이해가 잘 안되는 이론을 따라가는 일도 고되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단순한 삶의 관점이란 정답따위는 애초에 없으며 우리는 그저 이것저것 힘자라는대로 체험하고 느끼며 살 뿐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테마파크들이나 마찬가지다. 대안교육도 체험해 보면 좋고 고전적 교육도 체험해 보면 좋다. 그렇다고 되도록 많은 수의 것을 체험하기 위해 너무 많은 금전적 시간적 낭비를 하게되고 어딘가를 깊게 파고 드는 것을 망각하면 그것도 안좋다. 우리는 유한한 시간과 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으니 그저 각자 취향에 따라 또 알 수 없는 운에 따라 살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세상이 반드시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인간이다. 우리는 제한된 능력과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있다. 이 세계는 너무나 높은 차원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지식과 이론으로써 이해하는 것은 둘째치고 설사 그런 이론이 있어도 인간은 그 이론에 따라 살 수가 없다. 이것은 야구하는 물리학자도 뉴튼 방정식이나 쉬뢰딩거 방정식 풀면서 경기 안하고 지구는 둥글지만 축구할 때 지구는 평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는 대개 너무 많은 엉터리 이론 즉 엉터리 인과관계에 대한 주장에 노출되어 있다. 그것들은 사실 충분히 높은 차원에서 통하는 이론이 아니고 매우 근시안적인 이론이다. 그런 이론을 만드는 사람들은 세계를 아주 단순화해서 답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예를 들어 잘 사는 법이나 아이를 잘 키우는 법에 대한 많은 이론들은 단순 광고에 가깝다. 어학연수의 중요성을 선전하고 싶은 사람은 그것없이는 세상 못사는 것처럼 말하고 명문대 학벌을 강조하고 싶은 사람은 그것없는 사람은 인간취급 못받는 것처럼 말한다. 이런 식의 이론들이 세상에 가득하니 우리는 유행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린다. 유행에 휘둘리는 것은 단순한 삶도 즉흥적인 삶도 가벼운 삶도 아니다. 부동산 투기 바람에 휘말리거나 강원카지노 같은 곳에서 도박에 빠져든 사람들의 삶이 여기서 말하는 단순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아주 복잡한 삶이다. 우리는 수렁에 빠지고 고통받으면서 코가 꿰여져서는 거기에서 탈출하지 못하게 된다.

 

문제의 핵심은 오늘날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정보에 둘러쌓인 세상을 살고 있으며 4차산업혁명같은 것이 그것을 급속도로 더 더욱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하나의 단일한 객관적 세계에 기초하여 모든 사람을 계몽하겠다는 발상은 점점 더 비현실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이론이 언제 발견될지 설사 그런 이론이 있다고 한들 그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결국 개혁을 주장하는 진보적 인물이 사회에 공인으로 나가면 그 사람은 엄청난 수의 제약에 빠진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처신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무력해 진다. 계몽주의자의 정의로운 사회란 실은 모두가 불편하고 불행해지는 사회가 되며 그 문제의 근원은 모두가 객관적인 하나의 세계에 산다는 가정때문이다. 그들의 이론은 대개 암묵적으로 이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것이 개혁이 실패하는 중요한 이유다. 단순한 삶의 철학없이는 개혁도 안되는 것이다.

 

사실 나는 궁극적으로는 이런 일 때문에 과학의 시대와 망의 시대는 종국에는 극적으로 충돌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마치 종교의 시대와 과학의 시대가 충돌할 때 부르노나 갈릴레오 같은 순교자내지 박해자를 만들어 냈으며 또는 많은 여자들이 마녀로 몰려서 화형을 당했듯이 과학의 시대와 망의 시대의 충돌이 또다른 순교자를 만들어 내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변화기에는 사문난적 같은 말이 잘 나오기 마련이다.

 

과학의 시대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세계를 전제하고 그 안에서 보편적인 관점을 만들어 내고 답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런 관점에 따라 우리는 사회나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어떤 절대적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방식이 만들어 내는 그늘은 아주 작은 세계만을 인식하는 사람이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답을 찾은 후 그것만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에서의 답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일이다. 바로 특정 이데올로기의 광신도들을 양산하게 만든다. 그들은 물론 마녀사냥에 나선다. 그들의 눈에는 악마가 분명히 보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왜 순교자가 안 생기겠는가. 

 

4차산업혁명은 사회가 가지는 정보의 양과 변화의 폭을 극적으로 키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점점 더 앞에서 말한 경계와 분할에 의존하는 답, 데이터에 의한 답을 찾는데에 만족해야만 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사실 이것이 바로 최근에 사람들을 놀래킨 알파고의 방식이다. 고도의 정보처리로 찾아낸 답을 인간은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바둑은 어쩌면 인간을 이해해야 강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알파고식으로 바둑을 두면 바둑은 바둑이고 인간은 인간이 된다. 바둑을 두는 문제와 인간을 이해하는 문제는 보다 분명히 구분된다.

 

사람들은 이미 시대의 변화때문에 조금씩 자아의 분리를 겪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연극하듯이 산달까. 예를 들어 당신은 실은 어떤 종교에서 말하는 교리를 전혀 믿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은 성실한 신도인척 연기할 수 있다. 당신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 과학적으로는 전혀 동감하지 않지만 혹은 장례식이나 결혼식의 형식에 대해 전혀 논리적으로 동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것을 따를 지 모른다. 특정한 시간대에 특정한 장소에서는 말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더 크고 넓은 어떤 문맥에서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일지 몰라도 어떤 문맥속에서는 그것들이 훌륭한 역할을 해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적 스케일의 합리성이 있달까. 우리는 그것이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아도 생일에는 케익에 불을 피우고 소원을 빌려고 할 것이다. 왜냐면 그런 걸 믿는 척 하는 쪽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 과학적 불합리성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런 미신을 진심으로 믿는 광신도라는 뜻도 아니다. 우리는 다만 생일파티라는 문맥속에서는 그런 척하면서 산다. 과학자도 그렇게 한다.

 

경계와 분할이 생기는 것은 물론 생일파티나 장례식장 정도가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다가올 시대의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는 인간은 유한한데 시스템의 크기, 지식의 크기는 그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당신은 댐을 건설하면 좋지 않은 과학적이고 경제학적이며 역사적 이유에 대해 조목 조목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걸 진심으로 이해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에게 산의 정령이 상처받으면 노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런 언어만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이라면 정말 이렇게 말하는 것이 거짓말일까?

 

오늘날의 사회는 여러가지 다른 언어를 쓰는 작은 사회들로 갈라져 갈 수 밖에 없다.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단일하고 보편적인 언어는 보편적 체험을 전제한다. 그런데 그런 걸 주장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넓고 너무 복잡하다. 예를 들자면 그냥 뜻이 맞는 사람들이 인간적 규모로 육아공동체를 만들고 각자 테두리를 가지며 그 안에서 자기의 고유한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역화는 가장 보편성이 강화되는 시대에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자연스런 대세다. 물론 이것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구경도 하고 그러다가 방식을 바꾸기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이 오늘날 작은 경제운동, 공동체 운동, 마을 만들기와 지역자치운동이 번지게 되는 핵심적 이유가 아닐까?

 

오늘날의 세계는 여러가지 삶이 중첩되어 진행되는 다차원세상이다. 우리는 물론 이렇게 날로 복잡해지는 세상을 하나로 관통하여 이해하려는 고전적인 통합의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되며 그런 것에 경의를 표하기도 해야 한다.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도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런 시도는 자기 수양을 강조하고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유교사상이나 낡은 시대의 신학처럼 시대에 뒤져 있다.

 

세상은 날로 더욱 복잡해 지고 있으며 전에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다툼이 없었던 것이 이제는 나란히 있어서 서로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 우리가 하나의 객관적 세계를 전제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잘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해 훌룡한 이론이나 관점을 가지면 좋지만 그렇기에는 너무 힘든 것이다. 고전적 방식으로 답이 만들어 지는 속력보다 질문이 만들어 지는 속력이 훨씬 빠르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한 삶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미래는 무서운 속도로 닥쳐오는데 세상에는 아직 구시대의 망령이 가득하다. 비록 과도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많은 세부적 규칙에 대해 고민하고 싸워나가야 하겠지만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따라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고통을 겪을 것이고 쓸데없이 싸워야 할 것이며 누군가를 미워해야 할 것이며 순교자들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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