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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좋은 글쓰기의 조건들

by 격암(강국진) 2017. 2. 1.

2017.2.1

 

요즘에는 막내때문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일이 많다. 어제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막내가 국어 인터넷 강의를 듣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내용을  보니 글쓰기의 방법에 대한 것이었는데 선생님은 화면속에서 마치 무슨 암기과목 내용설명하듯 글쓰기의 핵심은 이거다 저거다 나열하고 있었다. 그 말들은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고 나는 막내를 혼란시킬 의도는 없으므로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지나치게 형식적인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저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교육일뿐 오히려 저런 교육이 아이들이 글을 못쓰게 만들고 있는 것같아 보였다. 글을 쓰려는 의지나 욕망을 꺽어버리기만 하는 소리들뿐이니 말이다. 

 

이 세상에는 글이란 이렇게 써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있다. 그런 주장들은 대개 나름의 일리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읽어보면 어떤 것들을 지나치게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서술되는 경우가 많은 것같다. 예를 들어 찰스 퍼시 스노가 두가지 문화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만해도 이미 1959년의 일이지만 오늘날에도 이 문화적 분열의 문제에 대해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글쓰기란 당연히 예술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글쓰기란 당연히 논리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당연히 이 두가지 요소는 뒤섞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글이란 이 두가지 요소를 모두 갖출 수 있지만 글 안에서 이 당연히 두가지 요소는 잘 분리되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사실과 주장은 잘 분리해서 말해야 한다같은 것은 널리 알려진 주장으로 시험문제에 나올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요즘은 과거에는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이 합쳐져서 사용되는 일이 종종 있다. 우리는 요즘 광고나 뉴스나 여행정보가 드라마와 서로 구분되지 않게 섞이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말하자면 전에는 전주의 거리를 리포터가 걸으면서 이런 집이 맛있네 이런 곳이 멋있네 하면서 소개하는 식이라면 이제는 전주에서 어떤 드라마를 찍는 것이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는 주인공들의 이야기 이상으로 전주지역을 소개하는 내용의 비중이 크다. 일본의 드라마지만 이런 쪽으로 가장 유명한 예에는 고독한 미식가 있다. 이 드라마는 아슬아슬하게 드라마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을 뿐 주인공이 배가 고플 때마다 어떤 동네의 가게에 가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 대부분의 내용을 차지한다. 결국 그 지역의 맛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이런 합체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각각 다루는 것보다는 합쳐서 제시하는 쪽이 더 매력있고 호소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전주를 소개하거나 서울의 북촌을 소개하면서 어떤 리포터가 호들갑을 떠는 프로그램들은 사실 따분한 경우가 많다. 그들이 그곳의 경치를 나쁘다고 할 리가 없고 그곳의 음식이 형편없다고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드라마가 단순히 드라마로만 남을 때 그것이 매력적이 되기는 쉽지가 않다. 우리는 이미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에 노출된 사람들이라서 작가들은 종종 자극의 강도를 올려야 할 필요를 느끼는 데 그러다보면 극단적으로 이상한 미치광이들만 나오거나 현실과는 매우 동떨어진 판타지가 되기 쉽다. 약에 내성이 생겼는데 점점 더 강한 약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해결책이 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 영화가 이 길을 걸었다. 이제 미국영화에서 선전하는 것은 히어로물이나 판타지, 공상과학 그리고 애니메이션이 주다. 엄청난 돈을 들여서 만드는 이런 컨텐츠들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지루한 것이 되버리곤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의 어떤 작은 측면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을 드라마와 뒤섞으면 이 양쪽이 가지는 문제가 모두 해결될 수있다. 드라마 안에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이제 그 정보의 가치를 훨씬 더 크게 만든다. 리포터가 어떤 찻집에 들어가서 이 차는 이렇게 마시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정보의 제공일 뿐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의 연인이 그 찻집에 들어가서 대화를 하다가 남자가 여자친구에게 차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은 이 차에 대한 정보가 어떻게 사용되어져야 하는가 하는 문맥을 같이 제공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찻집에 이런 드라마가 촬영되었던 장소라는 의미를 더하고 이 차가 이런 저런 배우들이 마셨던 차라는 의미를 더한다. 

 

앞에서 소개했던 고독한 미식가라는 드라마가 소개하는 집들은 사실 보통 맛집으로 소개되는 집들과는 다르다. 그 음식들은 그다지 진귀하고 최고의 맛을 제공하는 것들은 아니다. 주인공인 고로도 대개의 경우 그 가게의 음식들이 전국이나 전세계최고라고 말하지는 않으며 설사 주인공이 '아 이보다 더 맛있는것은 있을 수 없어'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 맛집 소개 프로그램의 리포터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리포터는 사실을 소개해야 하고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기 위해서는 대개 더 강렬한 사실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그냥 짬뽕을 먹는게 아니라 전국 최고 짬뽕을 먹으면서 이게 전국 최고 입니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이한 사실만이 뉴스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국 최고의 기준도 애매하겠지만 최고만 소개하다보면 나중에는 소개할 것도 금새 다 소진되어 할 말도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뉴스는 점점 더 기괴한 것으로 변해 간다. 맛집소개는 엽기적 음식 소개가 되기 쉽고 사회 동향을 전하는 뉴스는 잔혹엽기 범죄에 집중하기 쉽다. 

 

반면에 고로가 소개하는 집들은 훨씬 평범한 가게들이다. 그 드라마가 던지는 메세지는 당신의 집앞 가게에서도 당신은 일상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게가 고로가 방문했던 가게일 때 이제 전혀 특이할 것이 없는 고로케 가게도 고로의 행복을 같이 체험할 수 있는 특이한 가게가 된다. 

 

드라마도 이런 정보를 제공하는 측면 혹은 국지성을 가지는 것에 도움을 받는다. 보편성만을 유지하면서 연애 이야기나 출세 이야기, 전쟁 이야기를 쓴다면 이야기는 자극이 약할 것이다. 하지만 아주 구체적으로 군산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부산 감천마을의 연인들 이야기라는 식으로 무대를 좁히면 훨씬 더 작은 것이 큰 효과를 발휘한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이국의 식당에서 먹는 전세계 최고의 음식보다 비오는 날에 우연히 들어간 분식집에서 연인들이 먹은 떡뽁이가 더 맛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은 이런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이것들이 장르가 뒤섞인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그것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들은 고로가 가상의 인물이라는 것을 안다. 그들은 만약 어떤 지역에 대한 사실을 소개하고 싶은 것이라면 이런 가상의 인물의 입을 통해서 무책임하게 소개되어서는 안되며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은 잘 나눠져야 한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모두 픽션일 뿐이니 이 가게들에 대한 소개는 전혀 현실적인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미 이런 드라마들에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의 이런 반응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글이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그저 관습적으로 반응한다. 수 많은 사실들을 나열해서 학원에서 교과서를 요약해서 강의하는 것같은 글을 읽으면 참 훌룡한 글이라고 생각하며 만약 어떤 글이 주관성을 가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순수 문학적 글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작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지식전달의 글이나 온통 작가의 내면세계에만 빠져 버린 두 개의 글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글을 재미있고 감명깊게 잘 읽고도 자기 검열에 들어가는 일이 많다. 이 글은 잘 읽었는데도 읽고 나서 자기가 아는 좋은 글의 조건과 비교하니 뭔가 다른 것이다. 그러면 뭐 별거는 아닌 글이지만이라던가 이 글은 이런 단점이 있지만 하고 그 글을 폄하하는 것이다. 반면에 정말 억지로 참고 지루하게 읽고 머리속에 남는 것도 없었으면서도 어떤 글은 읽고 나서 훌룡하다고 칭찬한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문학은 원래 이런 것이고 정보를 주는 글은 원래 이런 것이라는 선입견, 좋은 글은 이런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곰곰히 생각하면 우리는 이것이 객관성의 문제와 깊은 관계를 가진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애초에 절대적 객관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허구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 내 세계가 있습니다 혹은 여기 내 집이 있습니다, 이 세계는 물론 완벽하고 절대적인 유일한 세계가 아니며 따라서 이 세계안의 일은 객관적인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세계는 나름 재미있습니다라고 소개할 수 있는 것이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세계가 지나치게 협소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그 편협성때문에 상처입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 세계가 무한히 광대해 보인다고 해도 혹은 객관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 세계는 실상 무한히 객관적이지 않다. 내가 이 글을 쓰는 탁자가 딱딱한 물체라는 문장도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판타지라는 것을 양자역학을 배운 사람들은 알고 있다. 한계없는 객관성이란 없다. 우리는 언제나 무지의 경계, 정보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는 집착이 오히려 우리를 가난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당신이 당신 동네에서 가장 훌룡한 가수일지라도 당신은 전국이나 전세계 규모에서 보면 가수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 집착한 나머지 노래부르기를 포기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가난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자신의 삶이 블록버스터 영화같아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평생을 위험하고 고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소설이나 드라마는 사실이 아니니까 가치가 없다같은 태도가 당신의 삶을 얼마나 가난하게 만들겠는가. 우리는 객관과 주관사이를 헤매면서 이런 우울에 빠져들기 쉽다. 

 

좋은 글이 뭔지는 과거에도 항상 같지 않았다. 우리가 신을 중심으로 사고했을 때 우리가 응당 말하고 쓸 가치가 있는 것은 그저 신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런 시대에 어떤 한 개인에 대한 자질구레한 사실들을 나열하는 것은 지루하고 알 수 없는 행위였으며 나쁜 글을 쓰는 실수일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관찰하고 일반적 법칙을 도출한다는 것에 중독된 경향이 있다.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과학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 좋다라는 선입견때문에 우리는 글에 꼭 있어야 할 작가의 세계를 빠뜨리게 될 수 있다.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규칙을 나열하는 것은 마치 좋은 그림이란 구도가 확실하고 색채가 매혹적이며 하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런 규칙을 열심히 외울수록 우리는 그림을 조금도 그릴 수가 없어지고 최종적으로 그림을 완성해도 그 그림에는 별 매력이 없을 것이다. 좋은 글이란 쓰는 사람도 쓰면서 즐겁고 쓰고 나서 다시 읽으면서 재미있어하는 글이어야 한다. 즐거움이 있고 쓰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까 좋은 글이 탄생하는 것이다. 자 지금부터 좋은 글을 쓰자, 특히 남들이 보기에 멋진 글을 쓰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좋은 글을 쓰겠다는 것은 황당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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