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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대학에 대하여

인공지능의 시대에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이란 무엇인가 1.

by 격암(강국진) 2017. 3. 7.

17.3.7

세상의 변화가 빨라진다는 말은 미래가 점점 더 빨리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그 미래를 준비하게 해줄 필요를 더욱 더 절실하게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미래를 준비시켜주는 교육이란 과연 어떤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답하려고 하면서 나는 한가지 내적인 테스트를 진행했다. 그것은 만약 내가 타임머쉰을 타고 30년정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시대의 학교에 가서 미래를 위한 교육을 강의할 수 있을 것인지, 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하는 사고 실험을 해 본 것이다. 당연히 아무리 열심히 생각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과거만큼 잘 알 수는 없다. 그러니 과거를 아는 상황에서 우리가 30년전의 우리에게 지금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과 없는 말을 구분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런 테스트의 결과 나는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에대해 적어도 네가지의 사항들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사항들을 하나 하나 점검하는 가운데 우리는 새로운 교육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첫째로 우리가 대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교육이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교육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충 세가지의 답을 얻을 수 있다. 하나는 국가나 사회이고 또 하나는 학부모이며 마지막으로는 그 교육을 받는 학생 자신이다. 우리는 교육은 당연히 교육을 받는 학생을 위한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또한 그것이 그래야만 한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꼭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미래에는 이런 저런 산업이 발전할 것이므로 그런 산업을 위해서는 이런 저런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사고할 경우 우리는 어느새 사회를 위해 학생들을 어떤 형태의 노동자로 생산해 내겠다는 식이 되기 쉽다. 그러면서 과연 그 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느끼는 것은 무엇이고 그들의 행복은 어떻게 되는가하는 점은 지나치게 간략하게 생각하거나 완전히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다. 적어도 어떤 분야의 발전을 위해 그 분야에 진출하는 사람을 늘려서 경쟁을 더 심하게 만들자는 발상은 사실 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키자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30년전으로 돌아가보자.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88년에는 물리학과는 이공계에서 가장 인기가 좋고 합격점수가 높은 학과였다. 그런데 이것은 그후 불과10년이 되지 않아 완전히 바뀌고 만다. 요즘에 보면 그 시대에 공부했어야 하는 것은 물리학이 아니라 생물학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과거를 기준으로 했을 때 미래에 인기있을 학문은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이언스나 네이쳐등의 저명과학잡지에 실리는 논문들이 어느 분야가 많은가를 봐도 자명한 일이다.

 

이런 과거를 보면 30년전 사람에게 나는 물리학 말고 생물학을 공부하라고 했을 법하다. 그리고 이것이 통상 우리가 소위 미래 예측을 통해서 발언하는 방식이다. 미래는 이러저러하므로 이것이 유망하다는 식인 것이다. 하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나는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물리학대신에 생물학을 공부하라고 과거의 나에게 조언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는 심지어 박사과정이후에는 생물학에 가까운 뇌과학분야에서 연구를 했는데도 그렇다. 그 이유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물리학을 공부해서 좋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래예측을 기반으로 조언을 한다는 것은 교육을 받는 당사자의 주관적 행복이나 만족감은 무시하고 취업가능성이나 사회의 이득 따위를 따지는 시각속에서 다시 말해서 주로 외부로부터의 시각속에서, 타인의 시각속에서 사고하는 일이 되기 쉽다. 이것은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와도 반대되는 일이다. 지금 내 눈으로 봐서 관심있는 것은 억누르고 남의 예측과 평가를 존중하라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험하고 가능성이 없어보이지만 그래도 좋아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흔히 주변에서 제공하는 일반론적 미래예측을 무시하는 일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민주적 교육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 올 세상에서는 더더욱, 학생을 위한 교육이라는 것은 상당부분 학생앞에서 진리나 정답을 가진 존재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선배나 친구로서 학생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이나 도구를 제공해 주는 제한된 태도를 취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면 다가올 미래의 세상은 무엇이 좋은 것인지,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인지를 일률적으로 정의하고 말할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왕이 모든 것을 선택하지 않고 국민들이 스스로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마찬가지로 학생의 행복과 미래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면 교육은 학생 스스로가 선택권을 가지고 미래를 열어나가도록 돕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민주적 교육의 핵심이 아닐까? 그리고 이럴 때 학생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가장 후회하지 않고 살게 될 것이다. 예측불가능하게 복잡한 세상에서 책임질 수 없는 것을 누군가가 대신 선택해 주는 것은 학생에게 아쉬움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학생들은 좀 더 일찍 학교 바깥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지식을 배울 필요가 있다. 담장안에서 보호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더 일찍 바깥과 소통하고 스스로 미래를 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학생은 독립적 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의무나 사회적 가치를 학습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찾는 방법 그리고 재정과 경력을 관리하는 문제를 배우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자칫하면 학교가 학생들에게 돈투기 방법을 가르친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일찍부터 돈을 어떻게 빌리고 투자하고 관리해야 하는 지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노동자로서 자신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주택 임차인의 권리는 어떤 것인지, 연금이나 보험가입이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에 대해 현실적인 조언을 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위해서 이런 일들을 대신해 주거나 자식에게 사적으로 이런 부분에 대해 조언을 준다. 즉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런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학교교육에서는 이런 부분들이 상당히 미약하거나 때로 완전히 포기되고 있으며 노동조합분야에 대한 지식같은 어떤 지식들은 좌파적 교육이라고 강력한 정치적 반대를 받을 가능성도 보인다. 종종 이런 지식들은 개인적으로 알아서 해결해야하는 문제로 취급된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교육이란 학생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부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섹스가 개인적인 문제이므로 아이들에게 성교육을 시키지 말자는 논리가 통하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미래 예측의 문제는 상당부분이 단순 예측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의지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30년전으로 돌아가보자. 한국신문은 2016년에 과거에 합격점수가 높았던 학과를 지금의 학과들과 비교한 적이 있다.

 

배치표 상위 20개학과 (종로학원 하늘교육, 한국경제 2016.9.2)

 

이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30년전에는 과는 무시하고 무조건 서울대에 가는 것이 선호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 포항공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던 나는 내 친구들과 함께 서울대에 들어가라는 엄청난 압력을 받았다. 당시에 내 친구중 한명은 서울대 동물학과에 합격했으나 진학을 포기했고 또 다른 한명은 원하던 연세대 전자공학과를 포기하고 서울대의 비인기학과에 진학했었다. 후에 서울대 동물학과는 분자생물학과로 이름을 바꿔 매우 인기높은 학과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비인기학과였다.

 

전공학과는 중요하지 않고 대학교 이름만이 중요하다고 믿었던 당시의 선생님들은 잘못된 예측을 했다. 10년이 지나지 않아 전공이 대학이름보다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모든 사람들이 당시의 선생님들처럼 학과는 중요하지 않고 대학이름이 중요하다고 계속 강하게 믿었었다면 과거는 다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리가 지금 어떤 미래예측을 했을 때 그것이 틀리거나 맞는다면 그것은 일정부분 우리가 어떤 미래에 대해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여러가지 정치적 사건들이 한국 사회를 바꿨다. 그것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학생들이 어떤 끔찍한 미래를 가지게 된다고 할 때 그것은 개인이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미래를 예측하기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미래를 피하고자 하는 의지를 충분히 강하게 가지지 않았다는 뜻 일 수도 있다. 가장 비관적인 사람은 비극을 스스로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의 예측을 옳은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합리적이고 윤리적으로 옳은 선택을 해도 실패할 있다결과적인 성공과 실패가 미래예측의 가치를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가 수는 없다미래를 준비하는 교육이란 어떤 것인가하는 문제는 단순하고 수동적인 예측의 문제일 수만은 없고 어떤 것이 가치있는 미래 사회인가에 대한 우리의 의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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