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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대학에 대하여

21세기 교육에서의 평등의 중요성

by 격암(강국진) 2017. 3. 18.

21세기 교육에서의 평등의 중요성.

 

말콤 글래드웰은 그의 책 아웃라이어에서 괌에 추락한 대한항공의 여객기 사고를 분석하면서 어떻게 사고가 거의 일어나기 어려운 항공기가 의사소통의 실패로 추락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위계질서와 권위를 강조하는 문화는 기장과 부기장 그리고 관제탑간의 의사소통을 망치게 하고 이때문에 통계적으로 권위적인 국가일 수록  항공기 사고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한 평가에 따르면 한국은 전세계에서 두번째로 권위적인 국가이며 이때문인지 항공기 사고율도 높다. 괌사고 이후 내려진 처방중의 하나는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한국어 대신 영어로 기장과 부기장이 대화를 나누게 하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한심한 일이지만 영어로는 복잡한 한국식의 위계질서를 전부 반영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사람이 한국어로 소통하는 것보다 오히려 영어로 이야기할 때 더 정보가 잘 흐르게 된다.

 

21세기 미래교육의 핵심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지식의 양이 폭증하고 그 정보들이 쉽고 빠르게 망을 통해 제공되는 시대에는 직접적 접촉의 중요성은 오히려 증가한다. 진짜 중요한 정보나 기회는 더욱 더 사람을 만나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 사회를 준비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이전보다 더 이른 시기에 관심과 재능을 가진 분야의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을 학교 안에만 머무르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대한항공 여객기 사고의 예를 통해 보듯이 단순히 만나는 것만으로 배움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문화적 변화가 필요하며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한국은 그 문화적 이유로 해서 미래 교육에 실패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실패는 인공지능과 4차산업혁명의 시대에 점점 더 치명적인 것이 되고 있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초중고 수준에서 학력이 아주 높은 것으로 나오는 한국인이 왜 갑자기 대학이상의 수준에 가면 선진국에 뒤지는가에 대해 미스테리라고 말해 왔다. 그것은 미스테리가 아니다. 그것은 교육의 실패다. 그것은 우리가 시험점수를 높이는 교육을 해오고, 책에 나오는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을 해오면서 사람을 직접 만나서 현실세계에 대해 배우게 하는 교육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그저 죽은 지식을 테스트하는 것에서는 높은 성취를 보이지만 대학이상의 무대에서는 갑자기 사회적응에 실패한 무능력자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미래교육의 핵심은 종종 전혀 잘못 이해되고 있다. 코딩이나 인공지능에 대해 배우는 것, 나아가 어떤 정해진 지식을 다수의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배우는 것은 미래교육의 핵심이 아니다. 그런 표준화된 지식에 근거하여 일하는 노동자들은 차차로 인공지능에 의해서 대체되어 버릴 것이다. 망에 연결되어 가장 첨단의 것을 배우고 거기에 창의력을 발휘하며 참여하는 것이 미래의 핵심이다.

 

관계속의 학습 즉 학술공동체나 이익공동체에 연결됨으로써 배우게 되는 교육은 정해진 교과목에 대한 시험을 통해 측정되는 점수에는 잘 반영이 안된다. 시험이란 그 본질 상 다수의 사람들에게 표준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표준화나 체계화가 시험의 기본적 전제다. 그런데 인공지능시대에 더욱 중요해 지는 것이 바로 표준화나 체계화가 어려운 것을 배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주로 시험점수라는 창을 통해 교육을 살피는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의 교육이 가진 기괴한 모습에 대해 충분히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교육도 물론 나름의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마치 중세의 종교교육이나 조선시대의 성리학교육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만약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조선말엽인 20세기초에 여전히 사서오경만 보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우리는 대개 그 사람은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우리가 그와 다르다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천천히 곱씹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주요 교과서의 내용만으로 판단했을 때 우리의 초중고 교육은 최소한 반세기 전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백년 이상의 전과도 차이가 없다. 백년전에는 고교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상당히 선진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상대성이론을 만든 아인쉬타인이나 양자역학을 만든 하이델베르크 같은 과학자의 전기를 읽으면 대학과정에 들어갈 무렵이면 이미 첨단학문에 지극히 가까이 있었다. 그들이 뛰어난 천재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 당시의 첨단학문이 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난 백년간의 발전도 발전이지만 지식이 폭발적으로 자라나는 시대라서 고교과정에 나오는 정도의 지식으로는 첨단 산업이나 첨단 학문과 거리가 아주 멀다. 물론 새로운 지식이 새로운 교과서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의 총량이 크게 증가하고 엄청나게 많은 분야들이 생겼기 때문에 그 지식은 상당히 피상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피상적인 지식은 아무리 쌓아도 피상적이다. 어떤 사람이 대중과학 서적을 천권을 읽는다고 해도 그 사람은 과학연구를 혼자 시작할 수 없다. 과학연구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현장의 경험, 현장의 지식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오늘날은 전에 비해 교과서 안의 지식과 사회 현실과의 괴리가 엄청나게 증가했고 그 괴리가 지금도 엄청난 속력으로 커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미적분을 고교과정에서 배우니 마니 하는 토론을 한다. 이것은 마치 어떤 어려운 유교경전을 고등학교에서 가르쳐야 할까 말까 하는 질문처럼 들린다. 현실사회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지극히 먼 곳에서 빠르게 변해가고 있는데 학교에 있는 학생들은 몇백년전의 지식들을 모든 학생들이 배워야 하는가 마는가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교사들은 대학입시같은 여러가지 선발과 평가시험을 통해 인재들을 걸러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시대에 인재가 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테스트를 설계한다. 그리고 이 선발과정은 맹렬한 속력으로 유학경전이나 신학적 지식으로 과학자를 뽑는 것과 비슷해져가고 있다. 이미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대학교수들은 과연 미래의 학문들을 하고 있을까? 사실 교육의 위기는 초중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대학 자체가 지금 위기다. 대학도 사회와 괴리되어 실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에서 말하는 인재가 반드시 인재일까? 이런 선발과정은 공연히 학생들을 좌절만 시키고 있으며 해야할 공부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에 공업수학을 공부해 보겠다는 학생에게 너는 과거시험 공부를 해야 하니 인재로서 인정받고 싶다면 어서 사서삼경을 외우라고 하는 꼴인 것은 아닐까? 우리는 시험에 통과한다는 목적 이외에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의 대부분이 쓸모가 없으며 적어도 그렇게 고생해서 서둘러 배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관심이 있다면 살다보면 알게 되고 공부하게 된다. 관심있는 것만 깊이 있게 배우려고 해도 배울 것이 너무 많다. 수없이 많은 피상적 지식을 채워넣느라 낭비할 시간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관계속의 학습 즉 학술공동체나 이익공동체에 연결됨으로써 배우게 되는 것들은 등수를 가리는 시험 시스템속에서 반영이 잘 안된다. 4차산업혁명 시대의 핵심이 바로 그렇게 표준화되어 시험보기 좋은 지식들이 아닌 것들이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시험을 없애버리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가장 훌룡한 소설가를 양성하는 방법이 1단계 2단계 하는 식으로 10단계로 단계를 짜서 1단계에서는 상식테스트를 하고 2단계에서는 체력테스트를 하고 하는 식으로 선발시험을 시행하는 것일까? 그렇게 하고 10단계 시험을 다 통과한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돈을 투자해서 소설을 쓰게하면 희대의 작가가 탄생할 것인가? 아니다.


그런데 점점 더 많은 분야의 본질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그게 왜 작동하는지 모른다. 심지어 인공지능분야조차 왜 이방법이 저방법보다 좋은지 명확한 설명이 있는게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분야에서 같은 실수를 하고 있다. 집을 짓고 싶은 사람은 집을 지어볼 기회를 주는 문화가 좋은 건축가를 탄생시킨다. 수학연구를 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을 주는 문화가 훌룡한 수학자를 만든다. 다가올 시대에 무슨 기준으로 자꾸 시험을 보고 뭘 외우게 해서 인재를 키운다는 것인가. 안 그래도 귀한 오타쿠 같은, 매니아 같은 특정분야에 진정한 관심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점점 더 좌절시키고 평준화시키면서 무슨 인재가 남는다는 말인가.

 

오늘날 학생들은 지나치게 작은 틀안에서 갇혀서 교과서만 공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교육은 점점 더 시대에 뒤진 것이 되어가고 있다. 교육의 일선에서도 그들은 누군가가 중간단계에서 수집하고 정리한 지식을 가르치면 학생들이 미래에 대한 준비가 된다고 생각하곤 한다. 학생들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최신의 것에 노출되어야 하며 사회와 학문의 최전방에 되도록 빨리 접촉해야 한다. 인공지능에 대해 단 한줄도 몰라도 첨단 농업방식이나 향토음식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배우는 학생은 미래를 위한 교육을 제대로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실패를 개인이 감당해 낼 수 있는 사회적 보호망도 만들어야 하겠지만 더욱 더 평등한 만남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평등한 만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나같은 어떤 한 개인이 정의할 것이 아니라 상식처럼 사회적으로 결정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등한 만남은 적어도 두가지 측면들에 크게 의존한다. 하나는 만남의 당사자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모든 면에서 똑같다면 평등한 만남은 상상하기 쉽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대칭적인 만남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실은 우리는 모두 다르다. 그리고 우리가 뭔가를 배우고 소통하고 협력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만나야 하는 사람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지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과연 인간은 모두 평등하니까 내가 빌게이츠나 워렌 버핏의 방문을 열고들어가서 맘대로 대화를 있을까? 이게 이런 것이라면 워렌 버핏과의 점심이 경매에 나와서 무려 23십만불에 판매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이 평등하다고 주장하면서 누군가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당신의 시간을 나에게 달라, 나의 시간과 당신의 시간의 가치는 같지 않냐라고 한다면 그것은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이다.

 

현실을 무시하고 평등한 만남을 모든 면에서 대칭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만남을 드문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마치 시장에 공평하게 참여하겠다는 시민들이 세상에 가득해도 서비스와 물품대금을 지불하는 방식이 엉망인 나라에서 시장경제가 발전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나는 내 라면이 만원짜리라고 생각하는데 손님은 그걸 백원짜리라고 생각하거나 신용도 없이 외상거래를 하려고 한다면 싸움이 날 수 밖에 없고 시장경제는 정지될 것이다. 만남은 무조건 얼굴을 보고 그냥 아무 말이나 떠들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는 우선적으로 서로의 가치에 대한 공정히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즉 만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서로 깊이 이해하는 일없이는 만남은 불공정한 것이 되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에서 사람들의 만남의 폭은 크게 제한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과 모든 면에서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몰라 허둥댄다. 부장은 과장을 만나지 않고 선배는 후배를 만나지 않으며 교수는 대학생을 만나지 않는다. 만난다고 해도 그 내용과 형식이 만나는 사람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진다. 그런 만남을 통해서는 정보는 흐르지 않는다. 평등하지 못한 만남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솔직할 수 없고 판에 박은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똑바로 봐야 한다. 우리는 그저 누군가가 선배나 선생이라는 이유로 혹은 후배나 학생이라는 이유로 그 사람이 이러저러한 사람이라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자신과 상대방에 대한 속단은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대화를 실패한 것으로 만든다. 만약 우리가 자신과 상대방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사실 배울 것도 대화를 나눠야 할 이유도 없다. 중학생은 중학생이니까 인턴은 인턴이니까라는 혹은 부장은 부장이고 교수는 교수니까라는 이유로 그저 이러저러할 것이다라고 시각을 고정시켜 버리면 애초에 가르칠 것도 배울 것도 협동할 것도 없어지게 된다.

 

평등한 만남을 결정하는 두번째 측면은 만나는 사람들간의 관계다. 나는 워렌 버핏의 아들이 아니다. 나는 그의 아내도 아니다. 다시 말해 나는 워렌 버핏같은 사람과 강력한 공동체 관계를 이루고 있지 않다. 따라서 설사 모든 면에서 내가 그들과 같다고 해도 나와 워렌 버핏과의 관계가 그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두 경우에 있어서 평등한 만남이란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일 수 밖에 없다. 나와 내 아내는 단일한 경제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즉 내 돈이 내 아내의 돈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내 아내와 나눌 수 있는 대화와 아내아닌 어떤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당연히 다르다. 당신이라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통장 비밀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하면 아내에게 그렇게 하는 것처럼 쉽사리 번호를 가르쳐주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불공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결국 공평하고 평등한 만남이란 우리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분명히 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인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우리는 모두 가족공동체처럼 강력히 미래를 공유하는 관계가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형이나 동생 사이가 아니고 부자 관계도 아니다. 게다가 21세기에는 그 가족공동체조차 이전에 비해 크게 와해된지 오래다. 이제는 부모도 자식이 노후연금인 시대가 아니다. 부모의 삶과 아이의 삶은 점점 더 분열되어 독립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한국의 사회공동체가 다른 선진국의 그것보다 더 강력하지도 않다. 그렇기는 커녕 복지같은 것을 주장하고 사회주의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은 종종 빨갱이로 불리기나 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은 타인을 만날 때 가족관계의 형식으로 밖에는 만나는 법을 모르는 것같다. 그래서 사장은 스스로를 쉽게 아버지로 말하고 정치가는 스스로를 어머니로 말하며 선후배는 형동생이 되고 만다. 별 관계도 아닌데도 딸같아서라면서 추행을 정당화하는 사람도 가끔 신문에 실리곤 한다. 배움이 없는 무식한 사람은 물론 배웠다는 사람도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직원은 사장의 가족이 아니다. 진짜 가족과 같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의 경우 불공정한 의무와 책임을 직원에게 요구하는 일이 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현실과 우리가 서로를 만나는 형식간의 불일치는 위선과 비극을 만든다. 그리고 소통과 배움을 불가능하게 한다. 물론 사람은 주관적이며 누구나 어느 정도는 위선적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관계건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건 그것이 고정되어 가만히 있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항상 유동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오해와 불일치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가 정말 어쩔 수 없는 수준으로 살고 있을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여러가지 가면을 쓰고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인척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도 과장하고 속단하는가.  얼마나 많은 어른들이 젊은이들앞에서 마치 그들이 그 젊은이들의 부모라도 된 것처럼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전혀 그와 다르게 행동하는가이런 위선의 벽들이 얼마나 우리를 갈라놓는가. 이것이 배움과 교육을 실패하게 만들고 있다이것은 실제로 부모나 교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부모나 교사들은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처럼 말하면서 아이들을 부모나 학교의 세계에 갇히게 만들고 있는가.  거듭 말하지만 이런 관습은 바로 4차산업혁명의 시대에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최근 삼성에서 호칭파괴를 시도하고 있다. 첨단제품을 만들고 외국인 노동자들도 고용하는 회사로서 삼성은 우리가 어떤 곳에서 실패하고 있는지를 느꼈을 것이다. 물론 문화적 변화가 단순히 호칭 하나 바꾸는 것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의사소통과 교육이 문화적인 장벽때문에 실패하고 있으며 이 문제가 지금도 빠르게 변하는 망의 시대, 사차산업혁명의 시대에 급격히 치명적인 문제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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