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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우리는 왜 책을 읽지 않을까?

by 격암(강국진) 2017. 9. 1.

2017.9.1

우리는 책을 충분히 많이 읽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실 어느 정도 책을 읽어야 적정수준으로 책을 읽는 것인가하는 기준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므로 이런 질문은 좀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우리의 독서 문화를 보면 개선의 여지가 많은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솔직히 말해서 책이나 글의 가치를 진심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어른들은 주로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말한다. 도서 시장은 아이들에게 독서 숙제를 내주려는 부모들에 의해 상당 부분 지배된다. 이것은 사실 역설적이다. 책의 가치를 진심으로 모두가 느낀다면 왜 어른들 스스로는 그다지 읽으려고 하지 않는 것인가.  

 

이런 현실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좌절이 그 이유가 될 수가 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책들을 염두에 두고는 있다. 그런데 읽어보면 머리에 쥐가 날 것만 같고 억지로 책장을 조금 넘겨보지만 사실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에 대한 해설서를 보거나 그에 대한 사전지식을 주는 책들을 보려고 하는데 그것도 재미없고 힘들기는 매한가지 인데다가 그걸 읽으면 뭘 배울 수 있는지 잘 못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이래서야 언제 원래 읽고 싶었던 그 책을 읽는 날이 올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좌절해서 아예 읽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은 사실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는지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서점에 나가서 베스트셀러들을 읽어보거나 서울대나 하버드대학이 추천한 백권같은 목록을 보면서 그 안의 책을 읽어보지만 영 신통치가 않을 때가 있다. 사실 출판계에 있는 사람이 최근에 비판한 것에 따르면 상업적인 이유로 추천도서목록이나 베스트셀러 목록이 오염되어 서점이 좋은 책을 소개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면도 있다고 한다. 그러고 나면 이제는 눈에 보이는 대로 들춰보는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래도 가끔은 좋은 책을 만나지만 사실 이런 식으로는 성공률이 워낙 낮다. 세상에 책은 엄청나게 많은데 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니 독서는 매우 비효율적인 오락이나 취미처럼 느껴진다. 

 

마지막으로는 세상에 정말로 읽어볼 만한 책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는 좋은 책이 아주 많다는 메세지에 거의 중독되다 시피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은 당장 부인하고 싶겠지만 나는 이 말에도 일정정도의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한국어 도서시장은 당연히 영어권 시장보다 훨씬 작다. 게다가 한국이 세계의 문화와 사상을 선도하고 있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민과 문제에 대해 당장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는 쓸모있는 책은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다르게 말해보자면 한국의 사상적인 깊이와 통일성이 부족한 것이 한국인이 독서를 즐기는 것에 장애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을 즐길 수 있는 관점과 문맥을 제공받지 못한 독자들에게 책은 해독할 수 없는 암호와 같다. 

 

물론 이런 이유들은 모두 별개의 것이 아니고 서로 긴밀히 연결이 되어 있다. 결국 컨텐츠가 문제다. 이건 정말 읽어두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확신을 한다면 사람들이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좌절에 젖어 있다. 고생해서 읽어도 그때 뿐이지 솔직히 말해 뭔가가 나에게 남는다는 느낌이 없다. 독서를 지도받고 싶고 좋은 책을 소개 받고 싶은데 어느 것도 그다지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해 많은 추천도서들의 목록은 광고거나 자기 자랑처럼 느껴진다. 서울대 교수들중에도 평생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의 절반을 읽은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나도 거기에 나오는 돈키호테를 읽다가 지루해서 접은 기억이 있다. 결국 항상 큰 도움이 되는 추천은 아니다. 

 

뭐가 문제일까? 나는 우리가 자아를 가진 독서 즉 자아독서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오늘날 그것이 강조되지 않고 종종 완전히 무시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아독서란 그것이 비록 매우 소박하고 엉성한 것이라도 자기 나름의 생각, 관점 혹은 사상을 키워나가는 독서를 말한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나서 그 내용에 대해서 생각하고 가능하면 그 소감을 글로 써서 정리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우리는 같은 책을 여러번 읽을 수도 있고 사실 대개의 경우 그 것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책을 읽는 것이 종종 한정없이 느려진다는 것이다.  읽은 책을 자꾸 또 읽기까지하면 당연히 독서는 느려진다. 게다가 생각하고 정리를 한다는 것은 책속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을 어떤 진리로 받아들이고 무조건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비판하고 의심하면서 진도를 나간다는 뜻이다. 그러니 진도가 종종 한정없이 느려질 수 밖에 없다. 

 

이쯤에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물리학자인 파인만이 자기 여동생에게 권한 독서법을 소개해 보자. 파인만은 여동생에게 권하기를 책을 읽다가 이해가 안되면 다시 맨 처음부터 읽으라고 권했다. 그렇게 해서 또 책이 이해가 안되면 다시 맨 처음부터 읽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결코 이해가 안되도 꾹참고 읽고 다 읽었으면 서둘러 다른 책을 또 많이 읽으라고 권하지는 않았다. 나는 파인만의 독서법도 내가 말하는 자아독서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독서법을 소개하면 불평을 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대개 세상은 이와는 정반대의 독서를 권하기 때문이다. 무조건 빨리 더 많이 읽으라고 한다. 그렇게 천천히 읽어서 어느 세월에 저 똑똑한 몇몇 사람들처럼 엄청나게 많은 양의 책을 읽겠냐고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직접 이렇게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를 둘러 싼 현대사회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이런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 게다가 내가 말하는 자아독서나 파인만의 독서는 모두 엄청나게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도 사실 종종 매우 어렵다. 독서에 있어서의 문제를 몇줄의 요령만으로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일단 허영을 버려야 한다. 사실 책한권을 상당부분 이해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많은 책들은 그 저자가 혼신을 다해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압축해서 내놓은 결과다. 그 책을 깊게 이해했다는 것은 그 대단한 저자와 거의 같은 수준의 지적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철학책 몇백권을 읽은 사람들도 대개는 그 책의 저자중 한명의 철학자와 비교할 수도 없이 생각의 수준이 좁다. 잡스런 지식으로 뭔가를 이해한 척 할 뿐이지 아무 것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항상 지금 쉬워보이는 길이 나중에는 더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대학교 2학년때 대학도서관에서 망연자실해서 앉아있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 나는 물리학 원서책을 가지고 물리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 일은 어려웠는데 물리도 어려웠지만 영어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진도나가는 속력은 내 생각보다 훨씬 느렸다. 그런데 도서관에 가보니 엄청난 크기의 책장들에 두꺼운 물리학책들이 가득 가득 들어 있는 것이다. 그때는 왠지 그 책들의 양에 완전히 압도되어 우울해졌다. 한권읽는 것도 이렇게 느린데 도대체 나는 언제나 물리학을 배웠다고 할 정도가 되는 것인지 눈이 캄캄했다. 

 

하지만 많이 읽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사실은 별로 없다. 왜냐면 아주 많은 책들은 우리가 일단 한권을 이해하고 나면 다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한권을 잘 이해한 사람은 다른 책들을 아주 빨리 읽는다. 대개는 정독할 필요가 없고 이따금 참조할 필요가 있으면 부분적으로만 봐도 된다.  

 

이것은 물리학책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문학책의 경우에도 무조건 닥치는대로 읽는다고 뭔가를 빨리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그렇게 읽으면 잡스런 지식만 남는데 그런 잡지식은 유지도 잘 안되고 대개 제대로 쓰지도 못한다. 게다가 책을 억지로 읽으면 책은 계속 따분하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자기의 생각과 주장이 있는 사람, 자기 나름의 관점이 있는 사람은 그것에 기반해서 인문학책들을 해석하면서 읽는다. 물론 그런 개인적인 해석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보면 비판의 여지가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 관점이 있을 때 책은 재미있어지고 이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도 그렇게 얻은 지식을 자기 나름의 문맥을 가지고 활용도 할 수 있다. 책이 진짜로 내 일부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책은, 특히 어리고 젊었을 때 어설프게 읽었던 책은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그 뜻이 크게 다르기 쉽다. 몰랐던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되는 일이 있다. 지금은 다른 책과 달라보이지 않아도 나중에 보면 굉장히 깊은 뜻이 있는 작품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단 어떤 관점을 가지고 책들을 바라보면 사실 지금 현재의 수준에서는 많은 책들이 거기서 거기이며 흥미롭고 도움이 되는 책과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을 구분하는 능력도 훨씬 좋아진다. 자아를 가지지 못하고, 나의 관점을 가지지 못하고 그저 객관적인 위대한 진실을 가진 책을 찾아서 그 안의 진리를 내 머릿속에 집어넣으려는 식으로 책을 해석하고 보려고 하면 내가 서두에서 말한 문제가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종종 책을 안 읽게 된다. 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천천히 읽었던 사람이 훨씬 더 많이 읽게 된다. 

 

자아를 키우는 것은 당연히 장거리를 뛰는 것과 같다. 닥치는 대로 전력질주 한다고 많이 가게 되는 것이 아니다. 20년 30년을 바라보고 느긋하게 독서를 하는 사람이 느려도 결국 많이 읽는다. 게다가 그걸 이해하고 자기를 키우기 까지한다. 내 기준으로는 진짜 독서를 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들 뿐이다. 

 

한국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키우는 일에 열중한다면, 그것을 독서의 핵심으로 여긴다면 독서문화는 지금과는 좀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도서 시장의 크기를 키우는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는 내가 진리를 알고 있고 정답을 알고 있다면서 나를 빨리 읽고 외우라고 외치는 사람이나 책이 워낙 많다. 그들은 독서가 뭔지를 착각하게 만든다. 무조건 더 빨리 더 많이 읽으라고만 한다.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 독서에 좌절한 사람들은 이런 현실의 문화적 피해자들이다. 천천히 쉬운 책을 고민하면서 산책하듯이 앞으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천천히 걷다보면 평생 어디까지 가는가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지금 눈앞에 있는 책이나 보면 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몇몇 사람들이 선생님은 참 책을 많이 읽었군요라던가 선생님은 참 생각이 깊다고 당신에게 말하는 때가 올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빨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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