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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대학에 대하여

대학 개혁 시급하다.

by 격암(강국진) 2017. 9. 30.

17.9.30

7월의 한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2017년 2사분기 현재 한국 실업자의 수는 108만 2천명이며 그중의 50.5%가 대졸이상의 학력을 가졌다고 한다. 통계가 만들어진 이래 최초로 대졸이상의 학력을 가진 실업자의 비중이 고졸미만의 실업자의 수보다 많아진 것이다. 기사는 이런 현상을 만들어 낸 주요원인으로 5-60대의 취업을 꼽고 있었다. 대졸자가 많은 20대 청년의 실업율이 역대최고수준인 가운데 상대적으로 대졸자가 적은 50-60대의 취업율이 올라가면서 실업자중 대졸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의 비중이 올라갔다는 것이다.  

 

비싼 등록금을 냈지만 취업이 안되는 것이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대학도 졸업생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실업자이거나 대학졸업장이 필요없는 직종에서 일하고 있다. 이때문에 과연 대학교육을 위해 쓰는 돈이 경제적인 계산으로 평가할 때 가치있는 것인가에 대해 회의론이 등장한 것도 이미 꽤 되었다. 소위 교육버블론이다. 모든 사람들이 대학졸업장을 위해 뛰어가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 그것에 대해 보람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편견만 없다면 그런 시스템에 돈과 시간을 쓴 것보다 일찍 사회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경험을 쌓아올린 쪽이 경쟁력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런 현실이 한가지 원인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대학 자체가 이미 시대에 뒤쳐진 기관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학에 들어가려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어느때보다 노력하고 있는 이때가 이미 대학이 기울고 있는 시대일 수 있다. 본래 버블은 꺼지기 직전에 가장 화려하게 부푸는 법이다. 대학같은 교육기관은 시대를 선도할 수 밖에 없으며 영원히 그 자리를 유지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모든 곳이 그렇듯이 대학도 하나의 철학과 윤리적 기반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선의 유학교육기관이었던 서원이나 향교가 그랬듯이 말이다. 

 

왜 조선의 학교는 새로운 시대의 학교로 발전할 수 없었을까? 조선의 선비들이 수학이나 기술적인 문제를 공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그 초기부터 한글같은 과학적인 문자를 만들었다. 실용적인 지식들을 부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에서도 축성이나 농업등 여러가지 분야에 기술적인 필요가 있었고 그런 분야에서도 저술활동을 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선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학적 철학에 기반하여 세워지고 운영되었던 서원이나 향교는 발전적으로 변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원이 유학이라는 철학적 바탕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당연시 하는 사람도 오늘날의 대학이 어떤 특정한 철학에 기반하여 세워지고 운영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같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 철학이 변화하는 사회적 현실과 맞지 않을 때 대학과 사회간의 괴리는 증가한다. 이러한 대학의 현실은 지식인층과 대중과의 괴리를 소설로 쓴 헤르만헤세의 유리알유희를 떠오르게 만든다. 1943년에 완성되어 헤세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만든 이 미래 소설에서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기성체계를 떠나서 직접 대중속으로 들어가기를 결심한다. 너무나 아름답지만 복잡해진 지적인 체계인 유리알 유희가 대중과 괴리된지 오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걸 알아도 유리알 유희의 체계는 변할 수 없었다. 

 

대학은 현재 매우 강고하다. 하지만 몰락의 느낌은 여기저기에 있다. . 문제는 아마도 사회적 변화의 속력이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학문과 기술의 발전이 대학에 의해서 주도되고 그것이 기업에 의해서 사용되어지게 되는 사회적 분업은 점점 더 비현실적인 것이 되고 있다. 빌게이츠나 스티브잡스, 마크 주커버그에서 일론 머스크까지 우리는 이미 여러명의 스타 기업인들에 익숙하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에서 인공지능연구나 로봇연구에 돈을 투자했다는 이야기도 곧잘 듣는다. 이런 것을 보면 추세적으로 보아 대학이 사회에 뒤쳐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사회가 변화를 선도하면 대학이 따라가기 바쁘다는 느낌이고 점점 더 대학은 기업의 하청업체처럼 변해가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대학이 어떤 선구적인 아이디어를 내면 사회가 그것을 따라가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기업이 비전을 발표하면 대학이 그것을 쫒아가려고 뛰어가는 느낌이다. 자금에 있어서 대학이 기업보다 못한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창의적인 면에 있어서도 대학은 점점 사회에 뒤쳐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학이 진보적 문화와 기술의 중심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전문화에 있다. 대학 시스템의 핵심은 저술활동이다. 대학교수들은 여러가지 일을 하지만 오늘날 학자의 능력을 평가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논문의 숫자를 세는 것이다. 가장 단순하게 말할 때 오늘날 대학교수란 논문을 출판하는 사람이다. 그래야 임용되고 자리를 지키기 때문이다. 그런 현실에서는 두가지가 중요하다. 하나는 전문화하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 매우 전문화되면 될 수록 전에는 없었던 분석이나 발견을 하기 쉽다. 따라서 논문을 쓰기 쉬워진다. 또하나는 학계 내부의 정치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더 많은 연구비는 더 많은 연구자를 의미하고 따라서 그것이 더 많은 논문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활동이 대학의 울타리 안쪽의 문제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산처럼 거대해지기만 하는 논문의 산은 누굴 위한 것인가? 지나치게 전문화한 지식인은 사회적으로는 쓸모가 적다. 또한 학계 내부의 정치싸움에서 이기는 것에 집중하다보면 학계 전체의 효율성은 오히려 떨어지게 된다. 학계 내부의 정치싸움이란 이러저러한 접근방법이나 연구장비가 중요하니 다른 쪽에 투자하는 것보다 우리 쪽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마치 시장논리를 적용하는 것처럼 투쟁과 싸움속에서 최선의 답이 나오기를 기대하지만 미래 예측이란게 그렇게 간단할 수가 없다. 결국 싸움이 심해지면 학계 전체의 효율은 오히려 떨어진다.

 

그래서 어떤 분야가 생산적이 되는 단계는 그 분야가 인기가 좋아지는 초기단계다. 예를 들어 한 때 비선형동역학이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때가 있었다. 새로운 주제라서 논문쓸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기가 너무 좋아지면 논문이 너무 많이 나오고 그렇게 되면 분야 전체의 합리성은 오히려 떨어지게 된다. 실은 별로 가치가 있을 것같지도 않은 논문들이 양산되고 평가받는다. 그저 논문을 양산하려고 분야에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서 생산적 논의가 방해받는다. 부동산 투기가 심해지면 주거 문화의 발전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직접 기업과 대중과 마주해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대학교수는 드물다. 예를 들어 설민석같은 인기 강사가 티비에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그가 역사학계의 권위자쯤으로 착각하는 일도 있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그의 시각이 학문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학계쪽에서 보면 그냥 입시학원강사다. 박사학위도 없으니 많은 교수들은 자기보다 한참 아래로 생각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욕하던 국정교과서에 참여한 대학교수나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가 학계안의 영향력으로 말하자면 훨씬 더 크다. 학계는 이미 대중과 유리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힘들다고 말하지만 대학교수도 예외는 아니다. 대학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낡아가면서 생기는 모순은 젊은 신임교수들이나 대학시간강사 그리고 대학생들같은 사람들에게 퍼부어진다. 물이 말라서 깊이 파야 물이 나오는데 누군가가 와서 넓게도 파라고 하는 식이다. 누적된 지식체계와 시스템의 관행은 지키면서도 첨단 지식을 생산하고 학생들을 잘 교육시키며 취업도 잘되게 만들라고 대학은 대학교수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대학교수들의 노력은 눈물겹지만 그런다고 시대의 모순이 다 해결될까?

 

대학바깥은 10년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바뀌고 있다. 그런데 석박사를 하면서 어느 분야에 특화된 학자가 10년만에 자신의 연구방법을 일신하여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는 것은 많은 분야에서 쉽지 않다. 앞에서 말한 전문성의 문제때문에 분야와 연구방식을 약간만 바꿔도 논문을 쓰기가 어렵다. 그러면 엄청나게 열심히 공부하는 학자가 실적상으로는 매일 노는 학자가 된다. 반면에 무의미한 논문이라도 하던 방식을 고수하면서 내고 있으면 열심히 연구하는 학자가 된다. 김연아에게 피겨는 그만하면 되었으니 이번에는 스피드 스케이팅을 해보라고 한다면 김연아가 금방 또 메달을 딸까?

 

대학과 사회와의 괴리는 학생들도 느끼고 있다. 요즘 대학생들은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 안주하고 있으면 취업하기 곤란하다는 것을 안다. 그토록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라는 것은 심하게 말하면 그저 이력서에 한줄 쓰는 의미만 가지게 되어가고 있다. 대학생들은 토익이나 토플공부에 몰입하고 자격증이나 해외 연수같은 스펙쌓기에 몰두한다. 그것을 위해서 대학을 중간 중간 자주 휴학하는 일이 보편화되어가고 있다. 대학에 들어가서 그저 대학교육을 받으면 4년뒤 졸업하면서 미래가 열린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소수의 학과를 제외하면 시대착오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었다. 대학바깥도 그렇지만 대학 안쪽도 그렇다. 학계라는 세상안에서 길을 잃은 학자들은 많다. 한국교육이라는 시스템에서 길을 잃은 청춘도 많다. 즐겁게 산것도 아니고 열심히 일만 했는데 그렇다고 의미있는 것을 한 것은 아닌 것같고 이미 해놓은 것을 포기는 할 수 없으니 그것에 집착하게 되는데 그 결과 함정은 더 깊어지는 느낌이다. 

 

청년들의 수난은 적어도 한동안 계속 될 것이다. 기성시스템이 오류를 인정하고 크게 개혁될 때까지는 말이다. 그 개혁의 핵심적 부분이 되어야 할 것은 대학교육 별거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줄세우고 고등학생 밤새워가며 공부해서 들어갈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냥 중학생 고등학교 입학하듯 대학평준화하고 기본학력만 되면 가까운 캠퍼스에 가서 싸게 수업들을 수 있으면 된다. 

 

그것만으로 취업률이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필요없는 고생을 안하고 남는 돈과 시간으로 자기 인생을 살 수 있고 다른 걸 준비할 수 있다. 알바건 인턴이건 더 부담없이 사회참여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인문학을 강조하지만 지금의 고교입시생들에게 편안하게 인문학 소양을 쌓으라고 하는게 말이 되는가? 그리고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 쉬운 것이 대학이라면 갈 필요없는 사람은 안갈 것이다. 대학교육버블 때문에 쓸데없이 밀려서 대학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다. 

 

대학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느슨해 지면 대학교수들도 편해질 것이다. 연구는 교수가 하고 대학강의는 학원강사가 하면 된다. 대학끼리 싸우고 경쟁해서 정말 좋은 결과 나오는 거 맞나? 대학교수도 대학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될 필요가 있다. 대학이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는 것은 교수도 마찬가지다. 지금 은퇴하는 교수세대는 행복했던 시절을 살았던 것이다. 점증하는 모순을 끌어앉은 대학의 신입교수들은 점점 더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서 살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살고 그러면서도 40 중반이면 길을 잃은 것처럼 될 수 있다. 과로사하거나 말이다. 인재를 대학이 끌어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문화를 일신하고 기업이 끌어안아야 한다. 개혁이 시급하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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