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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나쁜 꿈

나쁜 꿈 : 3-4

by 격암(강국진) 2018. 8. 20.

나쁜 꿈

 

 

 

 

3. 책 속에 답이 있다.

 

당신은 이제 곧 죽습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나에게 와야 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빨리 오세요. 

추신 : 아이에게 공평한 아빠란 건 어떤 아빠일까요?

송병철. 

 

나는 이 길지 않은 메모를 한동안 읽었다. 내용이 길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부적절한 내용을 가지고 부적절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왜 여기에 있을까.  

 

그건 출장차 가있던 보스톤의 한 호텔방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다음날 세미나 발표를 하기로 초청되어 호텔방에서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근사하고 아늑한 호텔에 묵게 해 주었다. 나는 이제 하루 종일 내 발표의 마지막 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왠지 그 발표 준비에는 그다지 관심이 가질 않았다. 어차피 기본준비는 되어 있으니 대충 현장에서 되는대로 할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가슴속에서 솟아오른다. 그러나 중요한 발표를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분명히 옳은 일이 아니다. 

 

나는 한동안 발표자료가 들어간 노트북 컴퓨터와 집에서 가지고 간 책 한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책은 내가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어려운 소설책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읽지 못했거나 끝까지 읽었어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철학적 소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나는 그 책을 이미 10번은 열어 본 것 같다. 그러나 한 번도 끝까지 읽지 못했다. 계속 읽다 보면 왠지 나는 이해를 하지 않고 읽는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렇게 되면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냥 끝까지 읽어버리고 치워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다시 그 책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똑같은 일이 반복되어 왔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계속 읽게 되는 것은 한가지 이유였다. 이해하지 못하니까. 거기에 어떤 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 바로 이 불합리하고 시시한 세상이 왜 불합리하고 시시한지에 대한 답 말이다. 

 

일에 집중해야 할 시간에 나는 왜 이런 책을 집어들려고 하는가. 답은 분명했다. 내 안에는 질문이 있다. 삶에 대한 질문이.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발표할 발표자료 안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이 알기 어려운 책도 어떤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이 책은 뭔가 냄새를 풍긴다. 이 안에는 답이 있지 않을까.

 

세상을 구할 답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나는 일단 나부터 구하고 싶다. 어디론가로 내 손을 빠져나간 내 삶을 다시 붙잡고 싶다. 나는 딸아이 하나를 아내와 함께 키우는 비교적 행복한 남자였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아이와 아내가 변했다. 그들은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이 나에게 거리를 두려고 하는 느낌이다. 그것은 내가 짜증을 내게 만들었고 다시 그 짜증은 나와 내 가족과의 거리를 더더욱 더 멀게 만드는 악순환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지난 1년간은 굉장히 이상한 한 해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가족과 함께 재미난 것을 많이 해서 많은 추억을 남겼다. 그런데 지난 1년간은 뭐를 해도 잘 되는 게 없던 것 같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싸움, 이런저런 핑계. 사실 지난 몇 년간은 심지어 세계적으로도 괴상한 때이기는 했다. 엄청난 경제난이 세상이 닥쳤다. 거기에 역사상 가장 큰 지진이며 화산 폭발이 일어나기도 해서 세상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역사학자는 역사의 종말을 말하고 경제학자는 경제의 종말을 말한다. 종말론이 설득력을 얻는 시대다. 

 

위기의 상황이 되면 우리는 더 강해 지거나 혹은 죽어간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그런 괴상한 일들 앞에서 한동안은 더더욱 결속해서 하나가 되어가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마치 벽이 무너지듯이 무력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순간 타인이 돼버린 것 같다. 하나하나를 보면 그저 작고 일상적인 변화였지만 1년 정도의 뒤를 돌아보면 놀랍도록 그 전과는 다르다. 나는 지난 1년 속에서 완전한 공허를 본다. 그냥 아무 일도 안 생겼다. 내가 소리를 질러댔던 불쾌한 추억 말고는. 

 

그러고 보면 마지막으로 어떤 것이든 아내나 딸아이에게 들었던 것이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의 얼굴도 희미하다.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나를 정면으로 보지 않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젠 나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내 눈을 똑바로 보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나를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직장동료들과도 이야기를 하는 일이 드물다. 지난 1년간 점점 더 혼자 식사를 하는 일이 많아졌고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일도 적어졌다. 문제는 나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인가? 제기랄 이게 뭘까. 난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왜 이런 것일까. 뭐가 잘못된 것일까. 왜 일이 이렇게 흘러갈까. 

 

결국 나는 컴퓨터 대신 그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책을 다시 한 장 한장 읽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발표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갔다. 책을 3분의 1쯤 읽었을까. 어느새 바깥이 어둡고 배가 고파왔다. 크래커와 맥주를 사뒀었는데 어디에 뒀더라?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온몸이 찌릿찌릿해왔다. 꼬리뼈에서 머리끝까지 뭔가가 불타오르는 것 같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잠깐 그러고 나자 이번엔 왠지 이미 이 책의 뒤에 무슨 내용이 나오는지를 나는 다 알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읽지 않은 다음 페이지에 무슨 내용이 있던가. 바다에서 만나자? 책을 넘겨보니 정말로 그런 내용이 나온다. 어떻게 읽지 않은 부분에 대한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을까? 갑자기 책을 읽는 속력이 엄청나게 빨라졌다. 그리고 나는 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포스트잇 메모지가 책 안에 꼽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당신은 이제 곧 죽습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나에게 와야 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빨리 오세요. 

추신 : 아이에게 공평한 아빠란 건 어떤 아빠일까요?

송병철. 

 

이게 뭔가. 이 책은 나말고는 읽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왜 이런 메모가 있을까. 언제 누가 이런 메모를 여기에 꼽았을까. 가족이 아니라면 이 책에 손을 댈 사람이 없고 가족들이 한 장난이라기엔 재미도 없고 너무 섬뜩하다. 글씨체도 딸아이의 것도 아내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오라니 어디로 오란 말인가. 

 

나는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고약한 장난이다. 뭔가 기분이 복잡하다. 한편으로는 뭔가 갑자기 세상이 이해하기 쉽게 변한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그게 뭔지 말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머리칼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던 그 순간 이후 나는 좀 색다른 기분을 느낀다. 지금 기분이라면 뭐든지 쉽게 이해할 천재가 된 느낌이다. 갑자기 자유로워진 느낌. 나를 묶어두던 족쇄가 사라진 느낌이다. 왜 이런 기분변화가 있는지 모른다. 내 머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것뿐이라면 기쁘기만 해야 할 테지만 그런 기분이 들자마자 나는 이 엉뚱한 메모를 보게 되었다. 메모는 그저 종이 한장일뿐이지만 나는 왠지 이 메모가 장난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죽음은 무거운 주제다. 그러나 사실 요즘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기도 하다.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가로 갔다. 바깥 거리가 보였다. 거리는 깨끗하지만 분명 저 거리도 죽은 사람들이 얼마 전까지 있었을 것이다. 괴질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세계에는 괴질이 돌았다. 아직도 아무도 이유를 알지 못하는 괴질이다. 어떤 대단한 과학자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이런저런 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아무도 괴질을 퇴치하지는 못했다. 

 

널리 알려진 것은 이것이다. 실질적으로 전 인류가 이 병에 이미 걸려 있다. 다만 이 병은 활성화가 되지 않으면 평상시의 삶을 유지할 수가 있다. 이 병이 일단 활성화되면 인간은 마치 자살 프로그램이라도 켜진 것처럼 얼마 살지 못하고 죽고 만다. 사람 차이가 좀 있기는 하지만 몸에서 이상을 느낄 정도면 하루도 살지 못하며 병원에서 진단할 수 있는 정도 수준이 된 이후로는 길어야 한 달 정도다.  사람들은 그냥 심장이 아픈 걸 느낀다. 그러다가 하루가 지나지 않아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고 만다. 어느 날 동료의 사무실이 비어있는 걸 발견하면 우리는 알게 된다. 그는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저 사람도 나도 그렇게 금세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튼 경고가 없이 오는 죽음이다. 

 

요즘은 그래서 거리에서 죽은 사람을 보는 일이 많다. 출퇴근하다 보면 2-3일에 한 번은 거리에서 쓰러져 죽은 사람을 본다. 사람이 죽으면 되도록 빨리 시체를 치워간다지만 워낙 많이 죽어가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언젠간 시체를 치울 사람이 부족할 때가 올 것이다. 

 

이 병이 널리 퍼지고 사람이 죽어 나가기 시작하자, 세상에는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은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이 죽음에서 도망치고 외면해 왔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을 한다. 장례식은 죽은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산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슬픔은 표면적인 것이며 그 표면의 저 아래 바닥에는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허무가 주는 공포가 있다. 죽으면 방금 전까지 살아있던 한 생명이 그저 돌멩이나 수돗물처럼 그저 물체가 된다. 우리가 살아서 행하는 모든 일들의 의미는 뭘까. 죽음 앞에서 우리는 엄청난 단절을 만난다. 우리가 믿고 있던 모든 가치적 계산은 거기서 파산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기억할 것이며 우리가 죽은 이후에도 세상은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내가 죽어도 내가 남기고 간 가족은 삶을 유지할 것이며 그들이 나를 기억할 것이며 이 세상의 일부로 나의 삶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을 망각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우리는 어떤 예식을 치러서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진짜로는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죽은 그들이 진짜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덤은 어디 외진 곳에 만든다. 죽음은 다시 잊힌다. 하긴 나는 일본에서는 주택가와 무덤이 그리 멀지 않은 것을 종종 본다. 지금 내가 사는 일본의 작은 도시에서는 여기저기 작은 무덤가가 있고 자전거를 타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주택가 옆으로 거대한 공립 묘지가 있기도 하다.  그런 환경에서는 죽음을 항상 기억하고 살게 될 것 같다. 일본 사람들은 집안에 죽은 사람들을 위한 불단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도 우리는 또 금방 그런 풍경에 익숙해지고 죽음을 망각한다. 익숙해진 것, 그것을 보는 것이 즐거움이 아닌 것은 결국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되도록 죽음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고 잊혀 가도록 내버려 둔다. 그 망각은 너무나 깊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인간이 영원히 사는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망각한다. 어딘가에 잊고 싶은 것을 넣어두는 어두운 방을 만들고 그 안에다가 뭐든지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을 던져 넣어 버린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 망각된 무언가는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우리는 그것을 잊은 것 같지만 마음 저 밑바닥의 어딘가에서는 그걸 기억하고 있으며 그걸 기억해 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죽음이 주는 공포와 허무를 직면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한다. 돈이나 쾌락이나 명성이나 권력 등에 빠지는 것은 그렇게 하는 흔한 방법들이다. 우리는 어두운 기억의 방문 위에 더 큰 못질을 한다. 정신없이 세상의 쾌락에 빠지면 우리는 죽음을 잊게 된다.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들이 우리 자신이라고 느끼게 된다. 내가 국가다. 내가 이 회사 자체다. 나는 죽지 않는다. 이런 식이다. 결국 우리의 모든 욕망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의 대부분의 욕망은 숨겨진 기억, 숨겨진 공포에서 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게 만들려는 노력이 세상을 뒤틀어지게 하고 모든 것을 바꿔 버린다. 존재를 지워버린 어떤 기억이 그 어두운 방에서 기어 나오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기겁을 하고 새로운 못질을 한다. 우리는 허약하게 만들어진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막느라 안간힘을 쓴다. 거짓말을 하고 위선적인 일을 한다. 질문하지 말아야 하는 질문을 피하고 막느라 바쁘다. 우리는 이에 대한 대가도 치른다. 때로는 그것이 우리의 삶 전체일 수도 있다. 

 

이 죽음의 괴질병이 퍼지자 사람들은 이제 죽음을 늘 인식하면서 살게 되었다. 모두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 옆에서 쓰러져 죽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우리의 현실을 계속 환기시켜준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다. 

 

죽음을 항상 직면하고 살게 되자 사람들은 전과는 달라졌다. 사람들은 뭐가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 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에게 관대해졌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물질과 지위에 대한 느낌이 희미해졌다. 어차피 죽는다고 생각하면 사장이든 평사원이든 그게 무슨 차이일까. 대학을 나왔건 나오지 않았건 무슨 차이일까. 무슨 성공을 거뒀다고 자랑할 일이 뭐가 있을까. 내일이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전쟁이 나면 이번 달 실적이나 중간고사 성적 따위는 걱정하지 않게 되기 마련이다. 괴질의 발병 이후 사람들은 세상이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고들 한다. 계속되는 죽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죽는 사람은 점점 더 늘고 있었다. 이렇게 죽음이 계속되는 속도를 생각했을 때 만약 10년 안에 치료제가 개발되지 못한다면 인류는 멸종될 것이라는 계산도 나왔다. 그 이후에도 살아남는 인간들이 있고 심지어 백 살까지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인간의 숫자가 너무 줄어서 문명을 유지하고 치료제 개발을 계속할 힘은 없을 거라는 것이다. 황당한 농담 같지만 종말론적 상황이 진짜로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이건 다 상상일 수 있다. 잠재적으로 인류를 멸망시킬 위험이라는 건 실제로는 어쩔지 모른다. 당장 내년이라도 치료약이 나오고 지나가고 나면 이 괴질도 또한 그저 지나간 위기 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다. 그 위협은 과장이었고 말이다. 지난 몇 년만 생각해도, 엄청난 경제난에 엄청난 지진이나 화산 폭발도 있었고 세계 대전에 대해 떠들던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물론 아직은 지구는 끝장나지 않았다. 

 

종말론이 자꾸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은 어쩌면 세상의 상상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작가들을 고용하면서도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 배우들을 써서 옛날 영화의 속편을 만들거나 옛날 만화의 영화판을 만드는 일이 대부분이다. 상상력이 고갈된다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말과 같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다면 그것에 대해 상상하기 마련이고 이야기를 쉽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의 고갈이란 설사 소원을 들어준다는 램프의 요정이 우리의 눈앞에 서 있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거라고 확신하고 부탁할 소원이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진정한 변화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달려 나갈 곳이 없다. 미디어는 계속해서 신기술의 약속을 보도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은 설사 그것이 현실이 된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에는 의문을 표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믿지 않는 낡고 허름한 옛 꿈을 다시 재활용한다. 희망과 야망에 찬 얼굴을 가장하지만 가슴속 저 밑바닥에는 이래 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이 가득 고여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지겨워졌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인간 따위 얼마 못 가서 멸종해 버리지 않겠냐는 종말론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거 아닐까.

 

다음날 나는 세미나를 하러 대학으로 가는 대신에 가까운 병원을 찾았다. 예약은 없었지만 대학 측에서 소개를 해준 덕분인지 진단이 가능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고 나는 그렇게 행동하는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나는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변했다.  

 

그 결과도 예측한 바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괴질에 대해서 양성반응을 얻었다. 게다가 나는 뜻하지 않은 다른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들은 내 머리에서 종양을 발견했다. 그것도 상당한 크기의 종양이고 너무 위험해서 수술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공식적으로 사망선고를 이중으로 받은 셈이다. 의사는 괴질에 대한 내 진단 결과를 듣고는 이런 경우에는 치료를 권할 수는 없겠군요라고 말했다. 결국 종양이 아니면 괴질이 나를 죽일 테니까. 치료가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일에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인생을 정리하는 쪽이 현명할 거라는 이야기다.

 

의사는 또한 내가 가진 종양이 묘한 곳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사실 뇌에는 묘하지 않은 곳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곳이라고요?

 

그게 후상부두정엽이란 곳에서 가깝습니다. 이 부분의 신경세포 다발들이 하는 일은 물리적 공간에서 개인의 위치와 방향을 정해 주는 것이지요.  

 

물리적 공간에서의 개인의 위치와 방향?

 

우린 우리가 이 세계의 어디에 있는가를 아주 자연스레 인식하기 때문에 그게 당연한 것으로 알지만 그렇게 되는 것도 다 뇌에서 열심히 그런 신호를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오토바이를 왼편에서 보고 약간 움직여서 오른편에서 보면 물론 우리 눈에 들어오는 그림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는 그게 같은 오토바이라는 것을 알고 있죠. 말하자면 우리가 마음속에 세계에 대한 공간적 지도를 가지고 있고 그걸 계속 수정해 나간달까요. 후상부 두정엽이 그런 것을 하는 부분인데요. 이 부분이 손상된 환자들은 뭔가를 향해 예를 들어 의자를 향해 걸어간다던가 하는 식으로 움직일 때 문제를 겪습니다. 의자의 거리가 변하고 의자가 보이는 각도가 변해가는 것에 적응하지 못해서 의자에 앉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만.

 

생물학은, 특히 뇌과학은 정밀과학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언어영역이 있는 곳에 종양이 생겨도 반드시 똑같은 정도로 언어장애가 오는 것은 당연히 아니죠. 뇌가 놀라울 정도로 망가진 사람도 아무 문제가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고 그다지 큰 상처가 아닌 것 같은데도 아주 다양한 곳에서 장애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즉각 사망하기도 합니다. 뇌는 한 부분에 손상을 입어도 각 부분이 독립적으로 알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는가 하면 분명히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는 그런 때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문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영원히 장애는 안 생길 수도 있죠. 다만 그 부위가 그런 부위라는 것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의사는 괴질이 아니라도 내가 몇 개월 정도밖에는 더 살지 못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병원을 나오면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까 했지만 관뒀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혹시 그녀가 냉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을까 봐 겁났다. 슬픔을 가장하지만 왠지 내가 없어지는 것에 별로 아쉬워하는 것이 없다면 나는 깊게 상처받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슬프지만 요즘 집안 분위기로 보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니다. 그녀는 확실히 변했다. 또 그녀가 그렇지 않고 진심으로 슬퍼한다한들 나는 기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니까. 

 

나는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책을 다시 펴봤다. 

 

당신은 이제 곧 죽습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나에게 와야 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빨리 오세요. 

추신 : 아이에게 공평한 아빠란 건 어떤 아빠일까요?

송병철. 

 

나는 이제 이중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남자다. 이 말도 안 되는 메모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된 걸까. 

 

 

4. 공평한 아빠.

 

일본에 돌아와 보니 아파트에는 딸도 아내도 없다. 무슨 실종 같은 건 아니다. 그들의 짐이 없기 때문이다. 아파트는 훨씬 더 썰렁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옷장을 열어보니 내 옷만 남아 있다. 결국 그들은 나를 떠난 것이다. 당연히 지극히 당황스러운 일이고 나는 당황하고 있지만 뜻밖에 내 심장은 그다지 빨리 뛰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이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않게 된 지 오래되어 나는 이 일을 예측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국으로 출장을 갈 때 그녀가 뭐라고 했던가? 뭐라고 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요즘은 기억나지 않는 것이 많다. 아무튼 나는 뇌에 문제가 있는 인간이니까 무슨 일이 생기든 이상하지 않다.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들을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통상의 경우라면 그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건 왠지 부질없는 상처 내기 같았다. 그들의 마음을 다시 돌릴 수도 없을 테지만 돌려놓은 다음에 나 사실은 다음 주에 죽어라고 말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나는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무척 외롭다고 느꼈다. 마치 도시 안에 아무도 없는데 혼자 그 속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악하고 비명을 지르면 메아리가 울려 퍼질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어떻게 할까를 고민한 끝에 이대로 살다가 어느 순간 숨이 멈추면 그대로 삶을 끝내기로 했다. 주변 사람에게 시끄럽게 굴고 싶지 않아서 떠들어 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사실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냥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일이 흘러가는 대로 놔두기로 했다. 그러기에는 매사가 너무 엄청나게 나를 눌러왔다. 지금은 그저 숨을 고르고 싶었다.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 평균적이긴 하지만 나에게 한 달 정도의 수명밖에는 남지 않았다. 아니 이미 며칠이나 지났으며 거기에 치료도 포기한 종양이라는 시한폭탄이 어떻게 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내일 당장이라도 쓰러져 죽을지 모른다. 나는 그 시간을 뭐에 써야 할까.

 

문제의 포스트잇을 책 속에서 다시 찾아서 읽었다. 

 

당신은 이제 곧 죽습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나에게 와야 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빨리 오세요. 

추신 : 아이에게 공평한 아빠란 건 어떤 아빠일까요?

송병철. 

 

이게 뭔가. 다시 읽어도 어처구니가 없다. 이 메모가 진짜라고 해도 여기에 뭔가 단서가 있다면 추신에 붙어 있는 질문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아이에게 공평한 아빠라니. 뭔가 죽음이나 괴질 같은 것과는 너무 동떨어진 문제가 아닌가. 아이에게 공평한 아빠가 되면 천사가 내려와서 너 잘했다고 살려준다는 이야기인가? 질문이 너무 황당하다. 더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 그 답을 어디에 보낸다는 말인가. 메모지를 앞뒤로 돌려봐도 아무것도 더 없다. 

 

모든 것이 말이 안 된다. 나는 수상한 메모지에 쓰여 있는 질문 따위를 푸느라 내 생에 남은 며칠을 써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내 마음에 걸리는 질문이고 간단히 마음에서 떨쳐버리기가 어렵다. 어떤 고상한 일반론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내가 한 아이의 아빠이기 때문이고 지금 그 아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내가 정말 원하는 게 있다면 다시 내 가족을 돌려받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내와 딸로부터의 사랑과 존경을 돌려받는 것이다. 

 

사실 난 아빠가 되는 것이 좀 두려웠다. 아이를 사랑할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 아이를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은 그 아이에게 최소한의 지침을 줄 준비 정도는 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말하자면 가능하다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에게 ‘삶에 대한 매뉴얼’ 같은 것을 턱하니 줄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메뉴얼을 펴면 1장 1절 중요한 일은 어떻게 결정하는가라고 씌여 있는 그런 메뉴얼 말이다. 나에게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는 사실 세상의 많은 일에 대해 엉터리 같다고 불만을 가진 상태였다. 세상의 부조리와 불합리 같은 것도 물론 불만의 대상이었지만 무엇보다 뭘 선택하고 살 것인가에 대해 내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교육기관이라는 것에 대해 대단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는 이러저러한 대단한 학식과 인품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들이 모여서 만들고 발전시킨 것이 학교들일 텐데 과연 그 학교들은 뭘 하고 있는가. 내가 보기엔 학교가 하는 일은 대부분 뭐뭐를 하면 안 된다, 뭐는 해야 한다고 하는 규칙을 지키도록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나쁜 학교일수록 설명 없는 규칙은 더 많다. 그런데 그것이 뭔가를 좀 생각하면 아주 어이가 없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케이크를 만드는 법을 배우러 갔다고 하자. 그런데 학교라는 곳에서 청결이 중요하니 옷이나 몸을 청결하게 하는 방법을 실컷 가르쳐 준다. 또 케이크는 좋은 접시에 담아 낸다던가 케익에 꼽을 초는 이렇게 준비한다던가 하는 것을 또 가르쳐 준다. 그러더니 학교가 끝나버린다면 우리는 이렇게 묻게 될것이다. 도대체 정작 케익은 어떻게 만드는 건가요. 그럼 학교가 말한다. 네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만들렴. 네 자유다. 

 

정작 학교가 말하는 그 규칙들의 대부분은 아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나 어른들을 위한 것에 더 가깝다. 즉 어른들은 학생들에게 서로 싸우지 마, 질서를 지켜라, 어른들 말은 잘 들어야지, 이걸 외워두렴 하고 말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래야 아이들을 돌보기가 쉽고 기성세대의 권리가 아이들에게 침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며 아이들이 장차 고용인이 될 어른들에게 쓸모 있는 노동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 규칙이나 지식이란 아이들을 위한 것이기 이전에 사회나 기성세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어른들은 그건 동시에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도 말하지만 그건 아마 네 번째나 열 번째쯤 되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뭔가를 배워야 한다면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뭔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뭐는 중요하고 뭐는 중요하지 않은가 무엇이 무엇보다 더 중요한가 하는 가치의 질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보편성만 따지는 공공교육에서 가르치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게 된다. 배우면 배울수록 그렇다. 

 

내가 대구에 가야 하는가 부산에 가야 하는가를 결정하지 않은 채 부산역 앞에서는 택시를 탄다던가 버스를 탄다던가 하는 것을 배우고 있으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가 나는 부산에 가는 것이라고 결정해 버린 셈이 된다. 그리고 나중에 나는 결국 대구에 가고 싶었어라고 깨닫게 되면 그간에 들인 시간과 에너지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수학 수업을 들으려고 수업에 들어온 학생이 수업을 들어보니 이게 수학이 아닌 것 같고 국어나 과학인 것 같다. 손을 들어 선생님 수학은 안 가르치나요라고 물으면 입 닥치고 들어라고 하고 계속 선생님은 중얼중얼거리는 것이다. 학생은 물론 계속 들으면서도 이게 수학인지 과학인지 알 수가 없다. 이제 좀 더 지나면 수학이 나올 거라는 기대를 가지지만 물론 그런 건 영원히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배우고 생각할 시간도 없이 우리는 어디론가 맹렬히 달려간다. 그런 걸 생각하기엔 일상이 너무 바쁘고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

 

학교는 정말 중요한 걸 가르쳐주는가? 그렇지 않다. 현대의 학교는 거의가 아니라면 완전히 공장이나 마찬가지다. 정해진 지식을 아이에게 전달한다. 그 이상은 내 책임이 아니라는 식이며 현대의 학교는 배움이 훨씬 드물던 시절에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전체적 인격의 차원에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인데 오늘날의 학교는 그런 걸 할 환경도 아닌 곳에서 그런 걸 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선생이 마찬가지로 준비가 되지 않은 학생과 만나는 곳이다. 옛날의 스승이 나무를 키우는 정원사였다면 오늘의 선생님은 급식을 나눠주는 배급담당 직원일 뿐이다. 되도록 똑같은 것을 똑같은 양만큼 기계적으로 준다. 받는 사람이 뭐가 필요한가 하는 것은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사실 애초에 현대의 학교란 대량생산을 하는 공장의 구조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똑같은 통조림을 만드는 곳 말이다. 오늘날의 교육기관들이, 특히 많은 학교가 가르치는 것은 답을 하는 방법이다. 학교와 선생님은 뭔가를 가르치고 질문을 해서 학생들이 정답을 맞히기를 기대한다. 여러 명이서 수업을 듣는 게 기본이며 정답은 하나인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대학입시가 그렇다. 전국의 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질문을 받고 답을 적는다. 정답은 하나고 모든 사람에게 답은 같다. 똑똑한 학생들은 어떤 질문이 나올까를 미리 알아서 공부를 쉽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학생들이 해야 할 일은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답을 맞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머릿속에 쑤셔박혀 지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이 시스템이다. 이 세상은 본래 이렇게 되어 있으니 너는 이러저러한 규칙을 지키고 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배우는 것은 교통법규 같은 것이다. 질문이 아니라 답이다. 

 

정보나 지식이 안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은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것은 답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것이다. 특히 정보나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어차피 누구도 그것의 극히 일부만 배울 수 있는 시대에는 더 그렇다. 올바른 질문에 대한 엉터리 답이 엉터리 질문에 대한 최고의 답변보다 훨씬 더 훌륭한 것이다. 

 

우리는 오랜 학교생활을 통해 경쟁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종종 모든 경쟁에서 이기려고 한다. 뭔가 남들이 너도 나도 뛰어들어 경쟁하는 분야가 있다면 나도 뛰어들어서 거기서 이기려고 한다. 남들이 그게 다 대단하다고 하고 좋다고 하면 그건 좋은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답은 하나라고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남에게 좋으면 나에게도 좋다. 우리는 어느새 그것이 내가 해야 할 경쟁인가는 잘 질문하지 않게 된다. 질문은 모두에게 다 똑같고 답도 하나니까. 모두가 똑같이 사니까 경쟁은 엄청나게 치열해지고 오랜 경쟁의 결과 대다수는 패배자가 된다. 심지어 경쟁에 이긴 소수의 사람들도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다. 이기고 성공했는데도 이 성공의 열매는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이건 내가 했어야 했던 싸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모두가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망하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히 선의를 베푼다는 것과는 다르다. 교수나 선생이 과연 자기 자식과 학생들에게 정확히 똑같은 말을 하면서 생활한다고 생각하는가? 느끼는 책임감이 다르면 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을 가르친 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지식을 여기서 저기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유대로 서로 간에 책임지는 인간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적 관계, 서로에 대한 깊은 관심 속에 있다. 무한한 일반성이 아니라 한 개인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에 있고 끊어지지 않는 관계 속에서 같이 살아가는 것 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는 스승과 부모는 같은 존재라고 했던 것이다. 

 

공장처럼 수십수백 명을 한꺼번에 가르쳐서 돈을 많이 버는 것에 최적화된 현대의 교육기관은 그런 책임을 질 의사가 당연히 없고 그렇게 하기도 불가능하다. 선생님들에게 모두의 진정한 스승이 되라고 하는 것은 해마다 수십 명씩 아이들을 입양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시스템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스승이 없는 시대라면 남은 것은 부모뿐이다. 하지만 요즘은 부모들도 무한한 가능성과 일반성 뒤로 숨는다. 대가족 공동체며 지역 공동체 같은 여러 사회적 공동체들이 무너진 시대에 부모도 책임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많은 부모들은 그들의 아이를 학교며 학원으로 이리저리 돌리는 것으로 그들의 교육적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즉 사회는 부모에게 모든 일을 떠밀고 부모는 사회에게 일을 떠미는 식이다. 책임지지 않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경우를 그냥 나열한다. 선택은 언제나 너의 몫이다. 그러면 아이는 선택의 자유 속에서 익사하기 십상이다. 무책임한 의사를 만나서 계속 선택은 환자의 몫이라는 말을 들어 본 사람은 어른이라도 이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결국 의사는 치료 결과에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고 무지한 환자가 맘대로 선택한 결과는 엉망일 테니까 말이다. 

 

뭐가 공평한 것인지, 뭐가 좋은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부모는 아이에게 가르쳐줘야 한다. 나는 이러한 것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혼란으로 가득 찬 세상에 내 아이를 던져놓고 미안 나도 뭐가 뭔지는 전혀 몰라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불공평하다. 공평한 아빠가 되는 것. 그것보다 어려운 문제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른은 인생을 복습하게 된다. 누구나 어렸을 적에 만나는 질문들이 있다. 이건 왜 이럴까. 저건 왜 저럴까. 왜 세상은 이렇게 앞뒤가 안 맞을까. 그러나 질문들은 결코 정답을 찾았기 때문에 끝나는 법이 없다. 그보다는 다음 질문이 생겨나서 앞의 질문이 지나가 버릴 뿐이다. 유년기의 질문은 청소년기의 질문으로 덮인다. 청소년기의 질문은 청년기의 질문으로 덮여진다. 그러다 보면 어른들은 마치 옛날의 질문들을 자신들이 다 대답하고 넘어간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소수의 양심적이고 감수성이 살아있는 어른들은 이렇게 지나간 중요한 질문들을 해내지 못한 숙제처럼 가슴에 가지고 산다. 비양심적이고 무감각한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들의 질문을 쓸데없는 질문이라면서 무시하고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공부나 해, 애들은 그런 거 몰라도 돼.’라던가 혹은 ‘넌 아직도 그런 것도 모르냐’ 면서 비웃기나 한다. 마치 자신들은 그것에 대해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 아빠들은 공평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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