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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나쁜 놈과 무식한 놈 그리고 진짜로 무식한 놈

by 격암(강국진) 2018. 12. 16.

18.12.16

세상의 소식을 듣다보면 거듭 떠오르게 되는 생각이 있다. 이건 나쁜 놈인가 무식한 놈인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알고 이러는 거라면 나쁜 놈이고 모르고 이러는 거라면 바보네라는 바로 그 생각 말이다. 이런 생각은 아마도 나만 하는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일찌기 프로타고라스와의 대화에서 덕성이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사람이 고통과 쾌락의 총량을 안다면 언제나 덕성 있게 행동할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나쁜 놈은 없으며 다 무식한 놈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그게 남에게 해가 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도 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니까 사악하게 행동한다. 

 

그런데 사실 현실도 미래도 정확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다.  어떤 행동이 가져올 고통과 쾌락의 총량이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거짓 뉴스를 말하고 남에게 피해가 되는 행동을 해도 그것 때문에 얼마나 큰 이득과 손실이 생길 것인가를 우리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나는 줄을 서 있는데 남들이 새치기를 하면 나만 바보가 될 수 있다. 나는 도로에서 다른 차들에게 양보운전을 하는데 다들 양보를 전혀 안한다면 나만 바보가 된다. 우리는 타인을 믿고 착하게 살자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건 상식과 환경의 문제다. 상식과 환경에 어긋나면 민폐가 되는 것인데 그 상식과 환경이 그토록이나 자주 서로 다르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운전을 보자. 남을 위협하듯이 운전하는 것은 분명 위험하고 나쁜 일이지만 사람들이 거칠게 운전하는 곳에서는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끼어들기를 할 때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위험하고 거칠게 끼어 드는 곳에서는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구박을 받거나 민폐를 끼치는 것처럼 될 수 있다. 왜냐면 내 뒤에도 차가 있어서 그렇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끼어들어서 차선을 바꾸거나 좌회전 할 수 있을만한 시간차가 되는데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불평을 하고 소리를 내기 시작하거나 심하면 억지로 추월하려고 해서 위험해 진다. 그래서 초보운전자는 길에 나서면 대부분의 능숙한 운전자들에게 초보운전자가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안전한 운전과 위험한 운전과의 차이와 초보운전과 능숙한 운전과의 차이는 언제나 분명하지는 않다. 

 

정치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말하는 것은 현실이다. 우리가 그 현실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가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하는데 크게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무지하고 욕심만 많다면 다른 사람들의 약속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정치적 행위란 종종 여러가지 세력들이 각자의 민원들을 모여서 해결하자는 식이 되기 쉽다. 그런데 서울과 수원 사람들이 힘을 합치는 상황이라고 해보자. 이런 경우 서울 사람들이 훨씬 많아서 다수결투표식으로 하면 자꾸 서울의 민원들만 해결되고 수원사람들은 이용만 당하는 꼴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때로 억눌러야 한다. 이길 수 있는데도 이기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집단속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억누르지 못한다. 이것은 소수파 사람들에게 깊은 인간적 배신감을 느끼게 할 수 밖에 없다. 좋은 세상 만들자고 모여서는 남들을 이용해 먹는 꼴이다. 그럴 때도 인간이 그런 줄 몰랐냐면서 상식이 없다고, 현실감각이 없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은 반드시 있다. 

 

나쁜 놈과 무식한 놈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그런데 그 둘을 나누는 선은 절대로 객관적이지 않다. 게다가 무식한 놈이 나쁜 척할 때도 있지만 나쁜 놈이 몰라서 그랬다면서 무식한 놈인 척할 때도 아주 많다. 우리는 통상 몰라서 그런 것에 대해서는 크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경향이 있으니 나쁜 놈과 무식한 놈의 차이는 유죄와 무죄의 차이만큼이나 큰데도 현실은 이렇게 회색빛이다. 나쁜 놈은 상식을 아는데도 다르게 행동하는 놈이고 무식한 놈은 상식을 모르는 놈이다. 한국의 언론은 나쁜 놈일까 무식한 놈일까? 거대 노조는 어떻고 재벌들은 어떤가. 한유총이나 학부형들은 또 어떤가. 

 

나는  몇천원 횡령으로 해임된 버스 운전자의 생각을 종종 한다. 현실을 보면 몇조나 몇천억해 먹는 것들이 몇천원 횡령한 사람들에게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갑질을 하는 것같은 상황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일전에 화제가 되었던 한진그룹의 갑질 오너 가족들을 보면 그들이 남들에게 그렇게 욕을 하면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일을 똑바로 하라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그들의 눈에는 자신들보다 훨씬 푼돈 받아가면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은 도둑놈처럼 나쁘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분노에 차서 어쩔 줄 모르도록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은 도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은 것만 따져도 회사공금을 자기 개인돈처럼 쓰면서 집안 인테리어나 하는데 쓰는 그런 사람들이 말이다. 이들은 나쁜 놈일까 무식한 놈일까?

 

나쁜 놈과 무식한 놈을 따지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니 우리 그런 것 따지지 말자고 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런 것 따지지 말자는 것 자체가 나쁜 놈과 무식한 놈을 매우 주관적이고 종종 불공정하게 구분하자는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대개 몇천원 횡령한 버스 운전자들을 살인범처럼 다루고 몇천억 횡령한 사람들에게는 손도 못댄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걸로 자기를 보호하지만 힘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니 눈먼 법의 칼을 휘두르면 죽어 나가는 것은 다 힘없는 사람들 뿐이다. 

 

나쁜 놈과 무식한 놈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상식을 맞추는 것이다. 문제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인식이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에 있다. 현실인식과 상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현실인식을 같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남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할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인식이 같아도 스스로의 행동과 선택이 남과 다르게 된다는 것에는 모순이 없다. 사자는 사자의 선택을 고래는 고래의 선택을 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선수지만 우리가 모두 축구를 하고 있다는 게임의 규칙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나는 축구하는데 너는 농구하고 있으면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내가 가족 모임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우리가 전쟁중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대화가 통하지않는다. 

 

현실인식이 같아지려면 신뢰가 중요하다. 우리는 각자의 일상에 바쁘고 그 능력이 지극히 제약되어져 있다. 그러니 서로를 믿지 않으면 하나의 현실인식이란 가능하지 않다. 결국 신뢰의 망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 일만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 우리는 때로 사람을 믿고 우리는 때로 사법제도같은 시스템을 믿는다. 우리는 때로 기계를 믿는다. 통계를 믿고 블랙박스 동영상을 믿는다. 

 

이래서 사회의 기본적 신뢰망을 망가뜨리는 것은 지독한 일이다. 예를 들어 학자는 정파에 흔들리지 않게 객관적 사실을 말한다는 믿음이 우리에게는 있다. 그런데 정치 파벌에 동원된 어용학자들이 이걸 무너뜨리면 대중은 이제 전문가의 말도 믿을 수가 없다. 4대강에 찬성한 학자들이 좋은 예다. 나는 대중이 믿는 것이 반드시 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신뢰고 대중이 아직 신뢰할 수 없어 할 때 그것을 전문가 의견 운운하면서 절차를 무시하고 진행하면 없어지는 것은 단순히 돈만이 아니다. 신뢰망이 훼손된다. 그리고 일단 그것이 훼손되면 그건 강이나 다리를 고치는 것보다 더 재건하기 힘들 수도 있다.

 

나는 요즘 머스크의 행보를 자주 따라 읽는다. 누가 말하는 대로 그는 희대의 사기꾼일 수도 있지만 핵심은 그가 성공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다. 그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려고한다. 전기차나 화성계획같은 것을 설득하고 같이 꿈꾸려고 한다. 현대차가 수소차를 진행하는 모습을 이것과 비교하면 극단적으로 다르다. 현대차는 정부와 이야기하려고 하고 대중은 세뇌시키려고 하는 모습이다. 대중의 지적 수준을 무시하는 느낌이다. 현대가 10조짜리 땅을 사는 것에 대중이 분노해도 이건 내 돈이라고 하는 태도다. 그러면서 왜 현대안티가 생기냐고?

 

다시 말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의 성패가 아니다. 신뢰다. 4대강 공사가 희대의 바보짓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결과론일 수 있다. 전기차 보급이 매우 희망적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결과론이거나 아직 달성되지 않은 계획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는 곰과 싸우기로 결심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나 우리가 곰과 싸워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는 100% 확실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곰과 싸워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싸웠는데 곰과의 싸움에 져서 문제가 발생하면 객관적 상황은 나쁘지만 신뢰의 망은 그대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곰과 싸우는 것에 반대하는데 억지로 곰과 싸워서는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신뢰망이 망가진다. 신뢰망이 망가지면 이미 그건 승리가 아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다른 현실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게 어떤 성취보다 더 중요하다. 

 

오늘날 처럼 정보통신이 발달된 사회는 봉건사회의 왕과 공화국의 대통령이 다르듯이 전처럼 강력한 독재적 리더쉽이 존재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합의다. 소위 숙의 민주주의나 소통이 강조되는것은 이래서다. 원희룡이 영리병원을 허용한 것의 문제는 그 영리병원이 제주도에 이득을 줄까 말까 이전의 문제다.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을 질 수 있나? 원희룡같은 사람이 사임하면 그게 책임을 지는 것인가? 전국의 지자체에는 무리하게 사업을 벌여서 빚이 생긴 곳이나 환경을 파괴한 곳이 많다. 그런 현실에 대해 시장이나 군수가 사임하면 그게 책임을 지는 것인가? 결국 책임은 공동체 전체가 지게 된다. 책임을 지고 싶어도 지자체 장이 책임을 질 수 없다. 

 

시장의 규칙을 깨는 삼성 바이오를 다시 거래하게 하는 놈, 사법제도의 근간을 흔든 전직대법원장, 시민이 반대한다고 결과까지 나온 영리병원을 뒤집어 허용하는 놈, 전문가도 못믿게 하는 불신 사회를 만든 이명박 박근혜 같은 놈들. 이런 놈들이 만드는 문제는 그 천문학적인 경제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돈이 그 핵심이 아니다. 

 

그들은 현대 사회의 근간을 무너뜨린다. 이들이야 말로 진짜로 무식한 놈들이다. 마치 주유소에서 캠프파이어하는 놈들같다. 신용사회라는 말은 이미 나온지 오래된 말이지만 21세기에 있어서 모든 것의 핵심은 이 믿음과 신용이 되어가고 있다. 요즘 세상에서는 신뢰가 시작이고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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