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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정의에 대하여

정의는 어떻게 선별적이 되는가.

by 격암(강국진) 2020. 7. 9.

2020.7.9

정치권에서 선별적 정의라는 말처럼 자주 쓰이는 말도 없다. 하지만 이 말은 전혀 다른 의미로 혼동되어 쓰이고 있다. 야당은 여당이 선별적 정의를 실천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조국 가족 수사같은 것에서 왜 더 엄격하게 수사하지 않냐고 말하는 것이다. 아니면 노무현 문재인 정권에서 모두 집값이 크게 오른 것을 경제실책으로 인정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당은 야당 특히 미통당이나 이전의 한나라당계열의 정치가들에게 그들은 살인자는 내버려두고 경범죄의 진실파기만 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조국 수사에서도 그 핵심에 있는 논쟁을 듣다보면 고등학생이 체험학습을 했냐 안했냐라던가 자원봉사 활동 상장이 있는가 없는가를 가지고 싸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전에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재판받고 비판받은 사람들이 있었던가? 

 

야당이 말하는 선별적 정의는 수평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온 세상의 죄를 유죄와 무죄로 나눠서 일단 동일시 한다. 그리고 나서 죄의 심각함을 따지지 않고 이것도 불법이지만 저것도 불법인데 왜 다 처벌하지 않냐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죄의 크기를 따지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수평적이지만 죄들이 가지는 상호관계를 무시한다는 점에서도 수평적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기꾼이 동네의 돈을 모두 훔쳤다고 하자. 그래서 가난해진 마을사람들은 자꾸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럴 때 폭력의 원인은 사기꾼의 사기다. 폭력을 잡는다고 사기문제가 해결되지 않지만 원인이 되었던 사기꾼을 처벌하면 폭력은 없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수평적 정의는 이런 것을 무시한다. 

 

경제에 대한 비판도 그렇다. 위에서 예로 든 부동산 가격 문제를 보자. 경제란 여러가지 얼굴을 가진다. 물가도 있고 경제성장률도 있고 실업률도 있으며 금리도 있다. 이런 여러가지 얼굴들을 가진 경제를 전체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부동산 하나만 떼어서 자료를 보면 부동산이 올랐으니 이것은 경제적 실패이며 실패는 실패라고 인정하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수평적 의미의 정의를 믿는 사람들의 행태다. 

 

반면에 여당이 말하는 선별적 정의란 수직적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는 죄를 일단 수직적으로 파악해서 아주 심각한 해를 끼치는 죄, 그리고 경범죄 마지막으로 심지어 죄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로 나눈다. 그렇게 했을 때 지극히 당연한 순서는 가장 큰 죄를 처벌하는 것이 된다. 살인범들이 사방에 돌아다니는데 교통신호 위반범을 잡겠다고 살인범을 방치하는 행위는 선별적 정의다. 교통신호 위반에 분노하고 그것을 처벌하겠다고 쫒아다닐 에너지와 정의감이 있다면 어떻게 살인범을 못본체 하냐는 것이다. 강간범들이 나돌아 다니는데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야동을 찾겠다고 일반국민들집을 다 압수수색하고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수직적 정의는 이데올로기적인 배경을 가진다. 즉 세상의 죄들에게 인과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인과관계의 틀에서 보면 어떤 죄를 처벌해야 할까가 보다 분명해 진다. 이런 의미에서 뿌리에 해당하는 죄를 처벌하지 않고 잔가지에 불과한 현실에 매달리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선별적 정의가 된다.  

 

다시 경제 비판으로 돌아가 보자.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것이 나쁘기만 할까? 나는 이것이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부동산 투기던 투자던 왜 활성화될까 하는 것이다. 요즘 보면 금리가 너무 낮아서 물가상승을 생각하면 마이너스 금리라고 한다. 그래서 여유 자금이 있는 사람들은 주식이건 부동산 투자건 하고 싶은 것이 당연한 환경이다. 이것이 무조건 나쁜 거라면 그 반대가 좋다는 것인데 금리가 아주 높아서 여유 자금이 있는 사람들이 은행에 돈을 넣어두면 저절로 이자가 척척 나오는 상황은 정말 좋은 것일까? 

 

금리가 높다는 말은 돈을 빌려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소식이다. 가난한 서민들은 확실하게 소득을 빼앗기게 되고 돈이 많은 부자들은 부동산이나 주식투자보다 더욱 확실하게 부자가 되는 세상이 높은 금리가 존재하는 세상이다. 투자는 위험도가 있지만 금리로 돈벌 때는 위험도가 거의 0다. 부자들이 가난한 시민들에게 고리대금업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부동산 투자가 늘어나는 것을 비판하다보면 우리는 이런 세상이 좋다고 하는 꼴이 되기 쉽다. 이게 옳을까?

 

수평적 정의건 수직적 정의건 모두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다. 수직적 의미의 정의에는 사상적 편향이 스며들기 쉽다. 그리고 어떤 사상도 그늘이 없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수평적 의미의 정의는 대개 정의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것은 사실상 위선인 경우가 많은데 수평적 정의는 사실상 모든 죄의 의미를 사라지게 해서 약육강식을 방치하는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유명한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을 생각해 보라. 빵한덩이를 훔친 죄로 감옥에 간 장발장에게 왜 세계인들은 동정을 표하는가. 그것은 바로 수평적 정의가 만들어 내는 위선 때문이다. 빵을 훔쳐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따로 있는데, 빵을 훔치는 사람들보다 더 나쁜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분명히 따로 있는데도 지독한 벌을 받는 것은 가난한 장발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를 유지하는 것은 수평적 정의에 빠져든 사법조직이다. 그들은 공평을 위해서라고 주장하면서 종종 모든 사상적 편향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은 가장 사상적인 편향에 빠져드는 것이 된다. 왜냐면 기득권을 위한 사법부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이죄와 저 죄가 아무 관련이 없다면서 장발장잡기에만 몰두하게 된다. 이 세상에 절대적 의미에서 중도는 없다. 중도를 외치는 사람들은 실은 가장 편협하게 수평적 정의의 광신자인 경우가 많다.  

 

재미있는 것은 수직적 정의가 사상적 편향에 빠지기 쉽지만 실제로 사상적 편향이 극단적이 되면 다시 정의는 수평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닐 것같으면서도 정의당같은 진보정당은 언제나 보수 정당과 환상적인 협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극단적인 사상적 편향이 정의를 다시 수평적으로 만드는 이유는 사상적 편향이 심해지면 그들은 세상을 바늘구멍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여성의 문제만 신경쓰면 되고, 노동자는 노동자의 문제만 신경쓰면 되며, 농부는 농부의 문제만 신경쓰고 학생은 학생의 문제만 신경쓰면 된다는 식이다. 

 

얼마전에는 안희정의 모친이 사망한 일이 있었다. 그 장례식에 대통령을 포함한 여당 정치인들이 꽃을 보낸 일을 가지고 정의당이 논평을 해서 비판하는 일이 있었다. 이는 페미니즘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지극히 편협한 행동이다. 한 인간에게는 남녀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의 문제도 있고 동료간의 문제도 있다. 그것뿐인가 지극히 많은 다른 관계들도 있다. 그런데 장례식에 꽃을 보내는 문제를 당의 공식입장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비판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유명배우가 일본차를 몰면, 노재팬으로 비판할 것이다. 한우가 아니라 미국 소고기를 먹으면 축산업자가 비판할 것이다. 한옥이 아니라 양옥에 살면 전통문화를 지키자는 사람들이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모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전체적인 시각과 일의 경중을 따지지 않는 시각으로 자기의 시각으로만 비판하게 된다. 이런 식이면 대중앞에 나선 사람은 모두 변화를 촉구받게 된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오직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완전한 복제인 끔찍한 상태에서만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상적 편향이 심해지면 정의가 다시 수평적이 된다고 말하는 이유다. 

 

사상적 편향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무서운 이야기다. 그래서 수직적 정의를 마음에 둔 사람들은 이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되도록 뭔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과 싸워야 한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얼핏보면 인과관계가 있는 일들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세상에 자꾸 간섭하려고 하지 말고 꼭 필요한 일만 해야 한다. 

 

하지만 수직적 정의가 아니면 애초에 공동체도 없고, 제대로 된 국가도 없다. 국민통합도 없다. 있을 수 있는 것은 독재와 극단적인 억압이 펼쳐지는 후진국뿐이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공동체의 가치도 모두 사상이기 때문이다. 사상적 편향을 없애는 일에만 골몰하는 사람은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조차 편협으로 파악하기 쉽다. 그래서 한국 전통은 편협하니 세계 표준이라고 여겨지는 서양 문화에만 골몰하자고 주장하게 된다. 한국어나 한글따위 안쓰면 어떤가. 영어를 쓰자고 하는 사람도 있다. 김치 안먹고 밥 안먹는대신 스테이크 먹으면 된다고 간단하게 우리 문화를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양비론으로 빠질 생각은 없다. 나는 수평적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의는 사상적 편협함에 빠지지 않는 균형감각을 발휘하려고 하면서 더 넓은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실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사상적 편협함을 판단할 어떤 확실한 선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모든 수직적 정의를 정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직적이지 않은 정의 즉 수평적 정의는 공동체가 없고 테두리가 없는 정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몽상일 뿐이다. 그건 정의가 아니라 정의의 부재다. 

 

우리는 천억짜리 비리를 저지른 재벌을 벌하기 위해서는 천원짜리 도둑부터 벌해야 한다는 논리를 들으면 조심해야 한다.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정의가 뭔지에 대해 고민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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