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전에 윤석렬의 파면을 통해 한국의 근본적인 문제가 들어났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그 글에서 보수의 핵심은 전근대 혹은 왕당파라고 파악하고 있거니와 이같은 생각은 최근에 본 유튜브 방송에 나온 인터뷰들이 극명히 보여준다. 이 유튜브의 진행자인 최강욱도 인터뷰한 대구사람들을 왕당파라고 부르고 있다. 오늘은 이 사람들이 왜 이러나에 대해서 그리고 한국에 희망은 있는가에 대해서 좀 말해 보고 싶다.
위 동영상의 인터뷰를 본 사람은 윤석렬이 파면되었다고 하더라도 전체 인구의 상당수가 여전히 보수라는 현실은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21세기 한국에 사는 19세나 18세기 인간들처럼 보인다. 이들을 보수라고 불러야 할지 왕당파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보수라고 부르기로 하자. 우리나라의 보수의 가장 큰 특징은 법치국가정신이 없고 그것을 웃기는 사기쯤으로 안다는 것이다. 그걸 아주 잘 보여준 것이 이번 윤석렬 내란이었다. 윤석렬의 주장이 뭐건간에 윤석렬은 군사 내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보수층에서는 여전히 윤석렬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다못해 조갑제나 정규제같은 보수의 유명한 논객도 헌법파괴에 대해서는 옹호해 주지 않는데도 보수는 여전히 윤석렬을 지지한다. 위의 동영상을 보면 윤석렬이 불쌍하다고까지 한다. 공화국을 지탱하는 것이 법질서이며 그래서 헌법파괴가 극악한 일이라는 것을 무시한다. 지지자들이 이러니 보수가 헌법을 위반한 일로 탄핵당한 대통령을 21세기에 둘이나 배출한 것이다. 그들이 옹호하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모두 헌정질서를 유린한 사람들이다.
보수는 걸핏하면 국가를 말하지만 법질서라던가 국가 시스템같은 것의 소중함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국가란 그런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자유시민의 공화국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국가란 고려시대나 그 이전처럼 군사력이 센 지배자가 봉건적 질서로 지역을 지역을 지배하는 나라를 말한다. 그들에게 대통령이란 조폭의 큰 형님이고 동네의 국회의원이나 시장은 동네 조폭 대장이다. 그리고 세상을 지키는 것은 법치주의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권력이고 무력이다. 결국 보수가 믿는 것은 그들이 직접 얼굴보고 악수하고 막걸리라도 나눠마신 깡패다.
그들이 믿는 사람을 굳이 깡패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은 개인의 이익추구만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동체가 다같이 성장한다는 사회주의적인 메세지나 공유정신은 전혀 믿지 않는다. 집단지능이나 대중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는 믿지 않는다. 그건 빨갱이의 헛소리다. 보수는 정치를 기본적으로 삼국지 같은 곳에 나오는 패싸움으로 파악한다. 이 세상의 무법의 정글이며 정의는 어차피 없다. 다 이기적이다. 그런데 어떤 깡패는 주먹으로 협박하고 이익으로 보상한다. 보수는 그런 깡패는 믿는다. 어떤 인물은 와서 말만 하고, 법이 어떠니 하는 이야기만 한다. 이런 인물을 보통 보수는 가장 큰 바보가 아니면 사기꾼으로 본다. 댓가도 안주고 가장 크게 사기치는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나는 실제로 보수가 아닌 정치인 예를 들어 민주당 정치인들중에 사기꾼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뭐든지 해줄 것처럼 좋은 말을 해서는 결국 자기만 이득보는 정치인들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나 있다. 자칭 진보주의자도 알고 보면 결국 권력지향형인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남들에게 일을 하게 하고 위험을 무릅쓰게 하면서 자신은 일을 시키는 쪽에만 서려고 한다. 그러니까 보수의 불안과 비난은 반드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어느 편이건 천국이고 순백은 아니다. 공화국의 법질서 안에서도 사기꾼이 없을 리가 없다.
게다가 내가 말해온 것이 반드시 보수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우리나라에 실질적인 왕당파가 존재하고 법치국가라는 질서를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은 꼭 보수의 테두리 안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이는 이상한 일은 아니다. 본래 법치국가란 헌법을 제정한다고 바로 튼튼하게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도 짧게봐도 17세기의 로크의 사상에서부터 시작하고 프랑스혁명이나 미국혁명을 거치면서 그리고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천천히 발달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해방이후 미국이 만들어 준 헌법을 가지고 시작해서 계속 군사구데타를 겪었다. 헌법은 계속 유린당했다. 그리고 20세기의 끝무렵이 되어서야 군사정권이 끝났다. 철학적이든 현실 관행에서든 한국에서 법치가 튼튼히 세워졌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이걸 생각하면 평화로운 촛불집회나 응원봉집회란 정말 한강의 기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21세기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라는 한국에서 군사구데타를 하는 미친 대통령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안의 전근대성 이외에 한국의 보수를 완성시킨 또 다른 요소는 지역감정으로 이건 일종의 선민의식이다. 세상을 공화국의 법질서라는 개념으로 보는게 아니라 집단끼리의 권력싸움으로 보는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세력과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차이를 무시한다. 그런 가운데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세력은 경상도 지역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세력의 일원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제 정치란 예를 들어 경상도와 전라도가 나눠 먹을 것을 다투는 일로 전라도에게 뭘 주지 않아야 경상도가 배불리 먹는 제로섬 싸움이 된다. 그리고 중앙정치에서 어떤 나쁜 일을 해도 그건 다 우리 편이 한 일이니까 옹호해 줘야 한다. 그러면 중앙에서 경상도지역으로 혜택이 내려올 것이다. 우리가 남이 아니니까. 보수는 이렇게 독재정권과의 자기를 동일 시 하는 기대속에서 완성되었다.
실제로는 수도권 사람들은 어느 지역 할 것없이 지방을 모두 식민지처럼 수탈했다. 지금 우리나라를 보면 경제 교육 정치 모든 것의 중심은 전부 다 서울이다. 그걸 유지하기 위해 지방으로부터 인재와 일자리와 돈을 수탈해서 지방은 말라간다. 전라도만 그런게 아니다. 예를 들어 부산대도 옛날보다 그 명성이 약하다. 부산에도 청년 일자리는 없다. 그런데도 경상도의 보수는 지방균형발전을 외치는 세력보다 중앙독재세력을 지지한다. 중앙이 전국에서 이익을 빨아들여서 경상도에게 나눠주면 경상도가 번영할 것처럼 생각한다. 보수는 관습헌법운운하는 희대의 엽기적 재판을 통해 노무현의 세종시를 통한 지방 균형 발전을 막기도 했다.
이렇게 지역감정과 한국안에 존재하는 전근대성이 합쳐진 결과가 보수다. 보수는 민주당의 대통령을 특히 노무현을 대통령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럴까? 정치적 이념때문에? 아니다. 그들은 사실 이념이 없다. 그저 지배구조와 이익 분배만 볼 뿐이다. 그들이 시장주의자라던가 자유주의자라는 건 착각이다. 그들은 자기가 득보는 것을 정의라고 말하는 것이지 시장의 지배에 의해서 자기가 손해 보면 시장을 왜곡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이 시장주의자 운운하는 것은 그냥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에 있을 때 약육강식으로 최대한 이익을 짜내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념과 상관없다면 대통령이 누구든 그 사람에게 복종하고 줄을 서야 하지 않을까? 노무현이 대통령이면 노무현이 권력자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보면 끔찍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노무현이 보수에게 대접받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박정희나 전두환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송을 장악하고, 자신을 해치는 사람들을 전부 끌고 가서 고문하거나 거지 만들고, 거리에서 군인보고 총을 쏘라고 하면 아마 대구 사람들도 노무현을 욕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노무현 찬양 방송하는 방송국에 동의하면서 노무현이 인물은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상상속의 악질 노무현은 바로 깡패이기 때문이다. 윤석렬 옹호를 보면 알듯이 그들은 군사독재를 하려는 사람을 옹호하고 나아가 존경까지 한다. 결단력을 가진 진정한 깡패이기 때문이다.
보수는 한편으로 보면 불쌍한 사람들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그들은 깡패처럼 자생력이 없다. 그들은 21세기에 떨어진 15세기 인간처럼 이 세상이 낯설다. 누군가에게 들러붙어야 삶을 살아갈 생기를 얻을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 삶에 대한 의미와 기쁨을 찾을 수 없다. 왜냐면 그들의 세계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이란 즐거움이나 재미나 의미를 추구하는게 아니다. 그런 걸 추구하려면 자기를 확장해야 한다. 관심사를 늘리고 헌신할 것을 찾아야 한다. 근대화된 세상에서 단조로운 전근대의 삶을 사는 그들은 그냥 투덜거리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런 문제가 없으면 문제를 만들어서라도 고민한다. 체면이니 위신같은 문제에 골몰하고 그걸 위해 불가능한 목표를 세운다. 불쌍하게 살면서 말도 안되는 사교육비를 쓰거나 아무리 투자해도 안되는 큰 아들이 잘되야 집안이 산다면서 온 집안의 재산을 큰 아들에게 퍼붓는 식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보수는 대개 서로 서로 발목잡으면서 최대한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을 한다. 그들은 가문의 질서가 어떻고 동문의 의리가 어떻고 조직의 이익같은 이야기를 하기 좋아한다. 지위를 얻는 걸 아주 중요시 한다. 우리가 남이 아니다라는 말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보수가 변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 여기까지 글을 써왔다. 보수는 변해야 한다. 내란을 옹호하고 군사독재를 그리워하는 그들은 지금으로서는 애초에 공화국이라는 개념 안에서 활동하는 정치집단이 아니다. 반공좋아하고 북한 욕하지만 사실 보수 지지자들은 가장 북한 사람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탈북민들이 보수가 되는 일이 많다. 설사 앞으로는 정권을 창출할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 수가 상당하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위협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무시할 수 없다.
보수가 변하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걸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는 한가지만 말하고 싶다. 역사를 보면 결국 사람들을 바꾼 것은 근본적으로 소통이었다. 소통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했다. 인쇄술이 발달해서 책이 흔해지고, 라디오와 티비가 새로운 정보를 실시간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철도가 들어서고 고속도로를 따라 자동차가 달리게 되자 사람과 물자가 더 빠르게 움직이게 되었다. 이런 과거에 비하면 인터넷이 세상을 더 합리적으로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안서지만 나는 인터넷도 결국에는 세상을 더 합리적으로 만든 미디어로 남을 거라고 생각한다. 소통이 망상이라는 병에 대한 치료제다.
나는 요즘에는 매번 글을 AI로 끝마친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정도의 힘을 가진 기술이 아니면 변화가 가능할 것같지 않다. AI는 결국 모습을 바꾼 데이터이고 연결의 미디어이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토론을 할 때 AI가 옆에서 계속 둘이 하는 말이 진짜인지, 가능한 이야기인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해 준다면 토론은 얼마나 더 생산적일까? AI는 인간을 엄청난 지식 데이터에 더 긴밀하게 연결한다. AI는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연결할 것이다. 이런 연결의 미디어인 AI가 사회속에 자리잡아감에 따라 사이비 종교나 마찬가지인 과거의 망상은 결국 줄어들 것이다.
AI가 틀린 말도 한다는 지적이 있지만 지금의 언론들이 이미 AI보다 더 자주 틀린 말을 하는 거 같다. 신문을 읽는 거보다 AI와 대화하는게 더 객관적일 수 있다. 인터넷 연결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보수들은 인터넷을 통해 서로 서로 소통하면서 자신들의 잘못된 믿음을 강화한다. 윤석렬도 유튜버의 말을 믿고 탄핵을 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음모론을 믿었다. 보수를 바꾸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임무다. 그래서 나는 AI의 발전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발전이 있어야 세상이 보다 확실하게 바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가능한 다른 방법은 이미 다 써보고 있다. 그래도 보수는 너무 느리게 바뀐다. 내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AI 기술만이 진정한 희망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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