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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역사에 대한 생각

한국 역사의 특수성과 보편성

by 격암(강국진) 2025. 9. 3.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는 방식은 무수히 많겠지만 그 중의 중요한 한가지는 세계적인 근대화가 한반도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진행되어 왔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 이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한가지 사건은 봉건주의와 자급자족식 농업경제에 기반한 조선이 상업이 발달하고 근대화를 먼저 받아들인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일이다. 이 일은 근대화가 한반도에 일으킨 큰 사건이었다. 그 이후 20세기 한반도에서는 좋건 싫건 근대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그래서 봉건 왕조는 사라지고 해방이후에도 한국에는 공화국이 세워지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근대화는 실로 많은 사람들의 삶을 크게 바꿨다.

 

근대화란 설혹 전반적으로 그것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있다고 해도 걷는 것이 건강에 좋은 것처럼 대량생산으로 만들어 진 물건을 쓰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해도 이런 변화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이런 소비패턴의 변화때문에 가족의 의미가 줄어든 것이 한 예다. 집에서 옷이며 음식을 직접 만들던 시대에는 가족의 의미가 좀 더 컷지만 모든 것을 돈과 시장으로 해결할 때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약해진다. 이런 근대화가 만든 보편성의 압력이 개개인이 가지는 특수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이미 일찍부터 지적되었던 것이고 서구에서는 근대화 혹은 계몽주의에 맞서는 낭만주의의 흐름으로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근대화는 그 자체가 새로운 실험이나 데이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실험은 무조건 좋기만 한 것이 아닌 근대화를 진행하면서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에 사회가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가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한국의 근대화는 세계사적으로 특히 중요한 실험이다. 세계에는 다양한 나라들이 있다. 근대화의 시작단계에 아직도 머물러 있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근대의 모순이 누적된 나머지 이제 근대 사회의 황혼을 보여주는 것같은 오래된 선진국들도 있다. 한국의 근대화가 가지는 특이함은 한국은 후발주자로서 근대화의 과정을 빠르게 거쳐서 선진국에 까지 도달한 몇 안되는 나라이며 특히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자본을 쌓아올린 적이 없는 나라라는 사실에 있다. 한국은 인구 5천만 이상의 국가중에서 20세기 이후 후진국에서 선진국에 도달했다고 말해지는 유일한 나라다. 이 말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민주국가로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산유국같은 나라가 부자가 된다고 해서 그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인구가 5천만을 겨우 넘기 때문에 인구에 대한 이같은 조건은 상당히 인위적이지만 인구는 중요한 기준이다. 작은 나라의 근대화는 쉽다. 백만명의 정치와 경제는 큰 나라와 굉장히 다를 수 밖에 없다. 근대화가 사회적 변화를 말하는 거라면 어느 정도 규모 이상의 사회에서 그것이 일어날 때 그것이 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질 것이다. 예를 들어 싱가폴 모델을 인도나 중국이 참고할 수는 없다. 싱가폴 모델이 세계 패권 국가가 만들어 지는 방식일 수는 없다.

 

규모있는 나라의 근대화는 쉽지 않다. 실제로 한국의 근대화도 쿠데타와 군사독재로 여러번 좌절 될 뻔 했다. 한국이 지금의 선진국이 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런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고 민주주의를 발달시켜 왔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근대화의 핵심이다. 민주주의는 보다 더 공유재산을 강조하게 된다. 더 좋은 교육, 더 좋은 복지가 나라의 힘을 증가시킨다. 반면에 민주주의가 실패하고 부패가 심해지면 독재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나라의 발전에는 한계가 생긴다. 소위 중진국의 함정이라는 것은 이걸 말하는 것이고 이 중진국의 함정을 돌파한 나라가 한국을 제외하면 거의 없는 것이다. 한때 잘살았는데 지금은 후진국이 되었다고 말해지는 필리핀 같은 나라가 중진국의 함정에 빠진 사례다.

 

그러니까 한국에서의 민주화 운동은 전근대적이고 군사독재적이며 부패한 질서가 나라 전체를 더 발전시키고자하는 대중의 힘과 충돌하는 사건이었다. 더이상 비인간적인 공장에서 저교육층의 노동력을 잔인하게 착취하는 것으로는 한국이 더 발달할 수가 없었고 교육열의 결과로 대학에서 쏟아져 나오던 당시의 대학생들이 바라는 삶도 한국에서 이뤄질 수 없었다. 이 민주화를 향한 힘이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쪽으로도 한국이 계속 발전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전두환이 집권하던 당시에는 지금은 엄청난 부자가 된 재벌들도 아무 힘이 없었다. 군사독재를 하는 정부가 회사를 빼앗아 가려고 하면 얼마든지 빼앗아 갈 수 있었다. 누구나 간첩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 군사독재가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끝이 나면서 재벌들은 크게 성장하고 한국의 경제도 크게 성장한 것이다.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군사독재시절을 그리워하는 보수정권은 1997년에 IMF 국가부도 사태를 일으키면서 정권을 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 경제는 민주당 정부를 지나면서 급격히 성장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시대가 없었다면 한국은 지금 훨씬 더 보잘것없는 나라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민주당이 계속 승리했다면 민주당도 타락해서 어찌될지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박근혜, 윤석렬의 탄핵이 실패했다면 한국은 정말 헤어날 수 없는 파국으로 굴러들어갔을 것이며 한때 선진국이 될 수도 있었던 필리핀 같은 나라로 남았을 것이다.

 

민주화 운동은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이제와 돌아보면 결국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란 보편성을 위한 싸움이었다. 그것은 인간 평등과 법치를 위한 운동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법앞에서 평등하다. 그리고 인간은 존엄한 것이니 우리는 비인간적인 자본주의를 만들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일찌기 전태일은 노동자도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지금 들어보면 정말 잔인하기 짝이 없었던 노동조건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옳은 건 옳다고 말할 권리를 위해 싸웠다.

 

그 싸움의 숭고함은 둘째치고 결국 그래서 그 싸움이 지향하는 것은 게임의 규칙이 명확하고 공평한 사회다. 다시 말하지만 보편성이다. 축구라고 해놓고 누구는 공을 손으로 들고 뛰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반칙을 당한 사람들에게도 안좋지만 전체 사회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반칙이 허용되면 누가 열심히 게임을 하겠는가. 윤석열 정부가 보여주듯이 민주주의를 무시하면 무능한 바보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게 만든다. 세계에는 한국의 자랑이라는 봉준호가 박근혜 때는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이었다는 것이 민주화, 근대화 그리고 경제적 성장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 지를 잘 보여준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나서도 보수 대통령은 다시 당선되었다. 한국이 앞으로도 또 그런 일을 겪어야 할까? 박근혜, 윤석열을 탄핵하고 나서도 또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할까? 나는 그러지 말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제 계속 민주당이 집권하기만 하면 한국은 아무 문제가 없을까?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이제 그만 보수의 내란 문제는 영원히 종식시키고 한국의 다음 문제로 넘어갔으면 한다. 그것은 근대화의 핵심적 문제로 바로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사는 법에 대한 문제다. 다르게 말하자면 특수성의 문제다.

 

한국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산다. 그래서 제 아무리 좋은 법을 많이 만들어도 그 법에는 구멍이 생기게 된다. 날마다 남편이 아내를 두들겨 패는 사건들을 들여다 보는 사람들은 남자를 항상 가해자로 여기고 여성은 피해자로 여길지 모른다. 그 말은 그런데 어떤 상황과 지역에서는 옳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틀릴 수 있다. 그래서 입법부가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라고 생각하면서 법을 집행하면 죄없는 남자가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해서 물론 법이란 공평해야 한다고 단언하고 그걸 그저 '하나의 어떤 적당한 수준'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현대 사회의 복잡함을 무시하는 오만한 사람이다.

 

보편성이 특수성을 무시함으로 인해서 생겨는 문제는 교육현장에서, 경제현장에서, 외교현장에서 수없이 벌어진다. 최근에는 노란봉투법이라는 것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데 사실 문제는 회사도 노조도 항상 천사는 아니라는 것에 있다. 회사가 사악한 노조원을 보면서 이러니 저러니 하면 노조도 사악한 회사를 보면서 할말이 많다. 그런데 어떤 단일한 법으로 적당한 타협의 수준을 결정하는 일이 가능할까?

 

말하자면 한국에서 보편적인 정의를 위해 싸워온 것이 민주화 운동이었다. 그렇지만 이젠 모든 사람이 모든 환경에서 쓸 수 있는 하나의 규칙이란 비현실적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대개 그래도 보편적 규칙을 만들자고 하는 사람은 점점 더 복잡한 규칙들을 만든다. 누구나 그렇지만 한정된 경험만 가진 그들은 혼자서 멋대로 사회 전체에 규칙을 뒤집어 씌우려고 한다.

 

이러면 불편함만 증가하는게 아니다. 심지어 불공평함도 증가한다. 모두가 같은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정보와 조직도 그렇기 때문이다. 규칙이 복잡해 지면 질 수록 규칙의 구멍을 잘 사용하는 부유층은 더 쉽게 살고 그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더 살기 힘들어 진다. 이 경우 민주화가 추구해온 보편적 규칙이나 평등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 된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문맥과 환경이 있는데 무식하게 하나의 규칙을 적용하는게 뭐가 공평하다는 말인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자치 밖에는 없다. 보편룰을 정할 수 없으니까 각각의 집단들이 자율적으로 자기 형편에 맞게 규칙을 정하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자치를 결정하면 예를 들어 알바비가 시간당 천원이든 오백원이든 자유라고 해야 하는가? 섬의 염전에서 노예처럼 사는 것도 나라가 간섭할 일이 아닐까? 그 답은 물론 아니다지만 이런 질문들은 자치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그리고 자치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근대화, 민주화의 과정을 뒤집는 성향도 있다.

 

우리는 이걸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자치가 효율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새로운 교육과 정보화나 AI의 적용따위가 이것에는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이걸 외국에서 배울 수 있을까? 선진국은 이제까지 한국의 교과서 같은 역할을 해주었지 않은가? 그럴 수 없다. 참고 할 사례가 외국에 없지는 않겠지만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선진국은 없어 보인다. 한국은 이제 남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도 아직 잘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수준에 올랐다.

 

이젠 우리가 봉건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 공화국을 만들어야 하는지같은 기초적인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지 않았으면 한다. 두번이나 탄핵당한 보수 대통령은 자신이 왕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왕과 대통령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는 안된다.

 

이 문제가 이제 과거의 문제로 지나갔다면 우리는 진짜 중요한 문제에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에서 우리가 좋은 성과를 보인다면 한국은 비로소 세계를 선도하는 선진국으로서 다른 나라에도 뭔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빛나는 나라가 될 것이다. 바로 자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가르쳐 줄 수 있는 나라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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