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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학교, AI 환경

AI와 문화적 헤게모니

by 격암(강국진) 2025. 9. 22.

니덤 퍼즐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중국이 고대에는 화약과 나침반 그리고 인쇄술등 많은 발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근대 과학혁명을 먼저 일으키지 못했는가라는 의문을 말한다. 이 의문에 대해 조셉 니덤이 내놓은 답은 여러가지를 포함한다. 그것은 권위를 강조하는 유교때문이고, 많은 인구로 인해 기계의 힘이 상대적으로 덜 필요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며 국가간의 식민지 확장 경쟁같은 것이 중국에는 없었다거나 중국의 공부는 암기 위주의 였다던가 중국우월주의로 인해서 주변에 관심이 부족했던 점때문일 수 있다. 그리고 망원경이나 현미경의 제조를 어렵게 한 유리기술의 부족함들 때문일 수도 있다.

 

지금 보면 이런 답들은 어느 정도 서구 중심의 편향도 있는 것같지만 이런 답들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건 간에 우리는 이같은 질문과 답을 통해서 같은 도구나 발명도 문화나 지리를 포함하는 환경적 요소에 따라 같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도구의 의미는 그것을 쓰는 사람에 의해서 정해진다. 최근의 코로나 위기때에도 한국에서는 인터넷과 SNS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서로 돕는 일이 많이 전개되었지만 미국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미국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 때문에 방역이 크게 실패한다. 그들도 인터넷과 SNS는 똑같이 있었지만 그것은 서로 돕는 용도보다는 백신무용론을 퍼뜨리는데 더 많이 쓰였다.

 

이렇게 도구를 발명하는 것 이상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가 중요하다. 그래서 근대화때 있었던 산업혁명이란 하나의 새로운 문화가 세계적 헤게모니를 획득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방식인 문화가 바뀌는 일이 없이는 어떤 혁명도 가능하지 않기 대문이다. 이때문에 세계적으로 진행된 근대화 과정이란 서구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퍼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새로운 산업혁명을 일으킨다는 AI라는 발명은 그럼 어떨까? AI의 진정한 가능성이 실현되는데에는 문화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AI에 기반한 혁명은 또다른 문화 헤게모니의 이동을 가져올까? AI라는 도구의 진정한 힘을 해방시키는데 문화가 핵심적 역할을 한다면 지금 AI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는 미국이나 중국은 진정한 AI 혁명에 적합한 문화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이 같은 질문들의 의미를 AI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 함께 생각해 봄으로써 더 깊게 할 수 있다. 개인주의적인 서구는 AI를 한 개인의 소유물로 보고 인간의 대체제나 생산도구로만 본다. 그러니까 AI란 공장주나 사장이 가지는 로봇같은 것으로 그 소유주의 능력을 무한대로 늘려서 신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AI는 프랑켄슈타인이고 터미네이터다. 그런데 이 비전은 자명한 문제가 있다.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기계라면 인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지금도 과잉생산 문제가 큰데 AI가 생산성을 무한대로 늘리면 정말 좋은 세상이 올까? 예를 들어 먹을 만큼의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의 방식도 충분한데 빵을 만배쯤 빨리 만드는 기계가 나오면 제빵소 하는 사람들이 잘살게 될까?

 

AI에 대한 다른 비전은 AI를 언어나 미디어로 보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AI는 전화기와 같은 연결의 매체로 인간, 시스템, 기계, 서비스등을 서로 연결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연결의 매체란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데 의미가 있다. 이 언어 비전의 AI에서는 인간은 할일이 없어지는게 아니라 더 많아진다. 왜냐면 전에는 연결에서 소외되어 무력했던 개인들이 AI를 통해 망에 연결되어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언어가 소외를 극복하게 하고 사회적 협력을 증폭시키듯이 AI도 그렇게 할 수 있다. AI는 누군가를 대체하기 위한게 아니라 오히려 소외된 사람들이나 지식이나 자원의 쓸모를 찾아주기 위한 것이다.

 

AI에 대한 서구적 관점은 서구 문화의 결과물이다. 니덤이 그렇게 했듯이 동양 (극동아시아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과 서양을 비교하면 서양에서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존재하는데 동양에서는 노장사상이나 유교사상이 주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유교나 노장 사상에서는 신비주의적인 도나 덕같은 개념이 나오는데 그 뜻은 언어 이전의 것이다. 그러니까 동양에서는 절대적 진리란 별 의미가 없고 도달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미 장자에서도 글이란 죽은 성인이 남긴 찌꺼기라는 말을 한다. 반면에 서양에서는 신에 의해서 써졌다는 절대적 진리를 가진 성서가 있었다. 그러므로 절대적 진리가 도달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고 이는 과학과 수학이 발달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을 것이다. 뉴턴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신의 절대적 뜻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과 개인이 직접 소통하는 서양 종교에서는 신을 통해 개인은 전능해질 수 있다. 유한한 인간은 신을 통해 완벽해 질 수 있다. 신의 축복이 있다면 개인은 모든 것을 가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이 있다면 개인은 사회가 필요없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공자의 축복따위는 없다. 유교에서 말하는 교화란 모든 사람들이 지혜와 윤리를 얻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한한 인간은 영원히 유한할 것이다. 그래서 동양적 관점, 전체론적 관점에서는 인간은 다른 인간이 필요하다. 조화가 좋은 세상을 만들고 사람들은 서로 의지함으로써 자신들의 한계를 극복하게 된다.

 

이런 서구의 관점에서 개인주의와 환원주의는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제와 돌아보면 그랬기 때문에 서구에서는 근대 과학 혁명, 산업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그래서 동양은 많은 것을 가지고도 그런 혁명들을 먼저 일으키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그 개인주의에 기반한 서구는 AI 혁명을 통해서 하나의 개인이 전지전능해지는 미래를 꿈꾼다. AGI든 뭐든 전지전능한 AI를 만들어 내면 그 AI를 소유하고 사용하는 개인도 전지전능해 질 것이다. 이것은 언어로서 AI를 이해하는 비전과는 미래에 대한 전망이 크게 다르다. 그 비전에서는 AI는 인간의 유한성을 완전히 끝내지 않으며 단지 연결을 통해서 그 유한성을 어느 정도 극복해 주는 도구일 뿐이다. AI는 인간없이 존재하는 우주적 절대진리를 찾아내는 도구가 아니라 주로 인간이 만들어 내는 데이터를 가지고 만들어 지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둘 중 어느 비전이 옳은가라는 질문은 좋은 질문이 아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질문은 어떤 쪽이 바람직한가, 어느 쪽이 우리가 원하는 비전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기 믿듯이 연결의 미디어로서의 AI를 강조하는 비전이 더 바람직한 비전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어떤 문화와 잘 맞아떨어질까를 고민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연결의 AI는 서양 문화와 맞지 않다. AI는 인간의 유한성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소중히 여기는 동양 문화권에서 진정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마치 인터넷이나 SNS가 미국과 한국에서 다르게 쓰였듯이 말이다.

 

우선 먼저 지적할 것은 어떤 의미에서 AI는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AI는 신비주의적 존재에 가깝다. 왜냐면 대량의 데이터를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데 그걸 쓸 수 있게 만든게 AI이기 때문이다. 알파고를 만든 사람도 알파고가 어떻게 바둑을 잘 두는지를 모르듯이 우리는 이제 우리의 이해범위를 넘어선 것들과 공존하고 협동하는데 익숙해져야 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여기며 개인주의적인 서양 사람들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AI를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겠다면서 연구를 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은 통계를 통해서 도달한 결과에는 순순히 순응할 거면서 AI로부터의 결론을 따르는 것은 AI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라면서 난리를 피울 것이다. 그 둘이 서로 다른게 아닌데 말이다.

 

로봇 배달 서비스나 로봇 택시 서비스를 시작해도 서양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AI 판사는 서양의 문화상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서양은 로봇이나 AI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마자 그들을 인간의 경쟁자로 파악했고 윤리적 질문속에 빠져들었다. 나는 미래에는 이 질문들이 마치 언젠가 서양사람들이 바늘끝에는 천사가 몇명이 앉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했던 것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날이 올거라고 생각한다. 윤리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건 아니지만 서양인의 관점에서 제기된 문제에 우리가 너무 빠져들 필요는 없다.

 

우리는 모두 언어를 쓰고 문자를 쓴다. 그래도 누구도 우리가 문자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경고하고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다. AI가 충분히 발전된 미래에 AI는 마치 문자처럼 깊숙히 인간의 내부에 들어올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문자가 그러하듯이 AI가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런 시대는 조화의 추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동양인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주의적인 서양인들에게 이건 이단적인 사상일 수 있고 이때문에 머뭇거리다가 서양인들은 동양인들보다 AI 혁명이 늦을 수도 있다.

 

미래의 AI는 마치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같이 타는 자전거와 같다. 거기에 탄 사람들이 협조를 잘 하면 그 자전거는 작동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공동체 정신을 버리고 불확실성을 증가시키면 자전거는 넘어진다. 마치 코로나 위기때 방역시스템 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창발적으로 모여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그 질서를 지킬 때 AI의 힘은 극대화된다. 그렇지 않으면 독일어를 가르치고 한국어 질문을 하는 것처럼 되어서 AI는 잘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챗GPT같은 LLM을 만들 때는 데이터를 선택하는 데이터 큐레이션이 아주 중요하다. 현실에는 인종차별, 남녀차별이 있지만 우리는 LLM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데이터가 아니라 데이터를 선별해서 LLM을 가르치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가상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현실 세계는 인종차별, 남녀차별이 있는데 그게 없는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에 대한 AI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AI는 실제로 인종차별과 남녀차별을 안하는 사람들이 써야 잘 작동한다. 인종차별과 남녀차별 이외의 무수히 많은 이슈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한국과 미국은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한국인의 데이터로 만든 AI는 서양에서는 차별적이며 비합리적이라고 느낄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같은 것은 AI의 대중화가 깊어짐에 따라 점점 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AI가 수많은 곳에서 관리자나 웨이터같은 일을 하게 될 때 우리는 그들의 편향성을 더 쉽게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개인주의를 단순히 나쁜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서양은 개인주의적 문화로 과학혁명에서 앞장 섰다. 하지만 환경이 바뀌면 장점이었던 문화가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머지 않은 미래에 새로운 니덤 퍼즐을 가지게될지 모른다. 모든 것이 앞장섰던 미국에서 왜 AI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는가 하고 말이다. 그럴리가 없다고? 사실 기적같은 일은 이미 있었다. 한국은 20세기 말엽에는 국민소득이 지금의 3분의 1수준이었는데도 인터넷 혁명에서 세계 첨단을 달렸다. 세계 최초의 mp3를 우리가 만들었고, pmp를 만들던 한국은 스마트폰을 먼저 만들기 직전까지 갔었다. 세이클럽, 싸이월드, 아이러브스쿨같은 SNS의 선조격인 서비스도 있었고, 미국이상으로 먼저 메신저를 활성화시켰으며, 미국의 이베이보다 먼저 인터파크나 G마켓이 인터넷 상거래를 시작했다. PC 방 문화와 프로게이머문화를 만든 것도 한국이고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은 노무현이다. 당시의 한국은 인터넷 혁명을 세계화시킬 역량이 부족했던 것일 뿐 그럴 역량만 있었다면 지금 전세계 최고의 부자 회사들인 많은 회사들은 모두 한국 회사들일 수 있었다.

 

되돌아보면 정말 가난하고 작은 나라였던 한국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기적같은 일이며 이것이 문화의 힘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컴퓨터 한대의 의미가 미국과 한국에서 얼마나 차이가 났겠는가만 생각해도 한국이 인터넷 혁명에서 선두였다는 것은 믿기 힘든 기적이었다. 기술이 전부가 아니다. 물론 지금은 미국이 AI 기술에서 크게 앞서고 있지만 우리는 3년전에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만들었던 AI를 지금은 훨씬 싸고 빠르게 만들 수 있다. 기술은 빠르게 변하고 빠르게 전파된다. 반면에 문화적 사회적 변화는 느리다. 그래서 승부는 뜻밖에 문화적 사회적 차원에서 날 수 있다. AI의 진정한 대중화를 이뤄내는 쪽이 진정한 AI 혁명에서 앞설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도 상당히 국제화되고 경제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미래산업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제2의 SNS, 제2의 메신저, 제2의 인터넷 상거래, 제2의 스마트폰 산업을 한국이 먼저 점거 할 수도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러한 전망은 문화적 헤게모니의 이동을 의미한다. 진정한 한류의 시대가 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근대적이고 과학적이며 개인주의적 사고는 AI 시대에 어울리는 전체론적이고 인간의 한계를 강조하는 사고로 대체될 것이다. 지금도 서양 사람들은 동양사람들을 보면서 전체주의적이라던가 순종적이라고 말한다. 개인주의적인 그들의 눈에는 동양사람들이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약점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AI의 혁명의 본질을 보는데 계속 실패할 수 있다. 근대화가 진행된지 한참인데도 아직도 동양은 서양과 다르다. 이걸 보면 미래에도 서양사람들은 계속 개인주의적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비전가가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도 그걸 부정할 수 있고 한국에서는 잘 작동하는 시스템이 미국에서는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가난해질 수 있다. 한때 부유했던 동양사람들이 몇백년간 서양사람들보다 가난하게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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