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근본은 참여가 아니다.
노무현 시대의 정치를 가르켜 참여정치라고 했다. 그리고 참여야말로 시대정신이며 정치의 본질이라고들 말한다. 남들이 그랬고 무엇보다 나도 그렇게 말했엇다. 오늘날에도 반한나라당진영에서는 정치는 참여가 본질이라고 말을 많이 한다. 무관심하지 말고 참여해주세요라고 한다.
그런데 티브이를 보다가 정치의 근본은 참여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것이 과연 정답이라는 벨이 가슴에서 울리지 않는 것을 느꼈다. 물론 민주주주의에서 참여가 없으면 정치가 될리가 없다. 그러니 그말은 틀리지 않지만 그래도 뭔가 정답이 아니다. 이것은 약간 놀라운 것이었다. 나 스스로가 몇년전에 열심히 그렇게 말했었기 때문이다. 되도록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더 선진적인 더 좋은 시스템이라고 믿었다. 이게 정답이 아니라면 나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게 된걸까?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답을 물었다. 정치의 근본이 참여가 아니라면 뭔가? 내 가슴에서 나온 답은 이렇다. 정치의 근본은 자기성찰이다. 물론 올바른 자기성찰은 정치를 외면하지 않는다. 올바른 자기성찰은 사회적 참여로 나아가게 만든다. 그러나 물론 자기성찰은 정치참여와 같은 것은 아니다. 산속에 홀로 앉아 세상과 떨어져지낸다고 해도 그 사람이 자기성찰을 안하고 있다고 할수는 없다.
왜 자기성찰을 통한 사회참여라고 해야 할까.
어차피 대부분의 경우 사회참여로 나아가게 된다면야 왜 자기성찰을 통한 사회참여라고 해야 할까. 그냥 참여라고 해도 결론은 똑같은 거 아닐까. 그렇지가 않다. 그냥 참여라고 하면 거기에는 내가 없다. 그런 참여는 내 바깥쪽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성찰의 연장선에서 하는 사회참여는 내 내부의 연장에 불과하며 그것은 항상 내 내부의 것이다.
내가 노회한 정치인처럼 굴 생각은 없지만 이 세상에서 사회참여를 하는 사람들의 여러가지 모습을 보는데에는 그렇게 많은 경험이 필요없다. 자기성찰이 없는 참여는 어디로 가는가. 첫째로 오래가지 못한다. 그냥 유행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남들이 하는 소리에 쉽게 흔들려 쉽게 흥분하고 쉽게 불타오르지만 꺼질때도 쉽게 꺼진다. 계속하지도 못할거면서 어디 후원 잔뜩 시작했다가 한두달 후원하고 그만두는 식이요, 마치 평생갈것처럼 거창하게 동지니 뭐니 하면서 사람만나고 도원결의하듯 의기를 결의하지만 실상 행동에 옮기는 것은 거의 없는 식이다. 그냥 그렇게 술먹을 돈을 정치자금으로 기부하면 되지 않을까? 쉽게 불타오른 것은 친구하나 잃어버리고 한마디 서운한 말 하나에 확꺼져버린다. 악수한번 해준것에 악마와 천사가 뒤바뀌고 만다.
둘째로 남을 이용해 먹거나 남에게 이용을 당한다. 자기성찰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통찰력도 없다. 자기가 자기마음도 모르는데 남의 마음이 어떤지 생각이나 해볼 이유가 없다. 그러니 자기가 발을 밟히면 엉엉울면서도 남의 발을 밟을땐 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사람들이 떼로 몰려서 군중을 이루면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의 대의를 위해 남들의 힘따위 마구 이용해도 좋다는 파렴치함이 넘치게 된다. 왜냐면 자기의 대의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면서 항상 남의 등을 친다.
그러다가 정작 자기가 이용당했다는 생각에 이르면 어떻게 되는가. 이제는 자기가 참여했던 곳에 대해 강렬한 배신감과 원한을 가진다. 그 원한을 가지는 것이 어찌나 강렬한지 이젠 거꾸로 그 집단을 파괴하는 것이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대단한 일이 된다. 만원어치 참여하고 백만원어치 파괴공작에 몰두하는 인간이 될수도 있다. 맨날 싸움만 할게 아니라면 자기성찰없는 정치판이란 피해야 한다.
세째로 이런 집단이 설사 기적적으로 힘을 얻고 내부적으로 한동안 안정감을 가지게 되어 힘을 가지고 움직인다고 해도, 이 정치집단은 자기성찰이 없으니 깊이가 없고 자기성찰이 없으니 국민의 고민을 두루 성찰하지 못한다. 결국 좁쌀같은 기묘한 술수로 뭘 해보려고 하다가 점점 수렁에 빠지고 무너질수 밖에 없으며 적만 많이 만들 뿐이다.
자기성찰이 근본인 정치의 차이가 뭘까
자기성찰이 근본인 정치의 목표는 자기를 깨닫고 행복한 자기를 달성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오래하게 되면 이 나라는 것이 참으로 여러개의 일에 달려있으며 보통 생각하는 몸뚱아리가 나라는 생각은 너무도 단순한 것이라는 것을 쉽게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참여로 나간다. 사회참여가 대단한게 아니라, 길에 넘어진 아이를 보면 세워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고, 억울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한마디 거들어주고 싶기 때문이며, 어리석은 일로 자신을 속박하여 괴로워하는 이웃을 보면 마음을 정돈하는데 한팔 거들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서 세상을 구할수도 없고 그럴 의무도 없지만 이 세상에 나는 빚없이 혼자 자라났다고 할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니 가까운 사람을 걱정하고 그러다보면 결국 세상을 걱정하게 된다. 내딸이 잘살기를 내 친구가 안심하고 살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때문이다.
자기성찰이 근본인 정치에서의 참여란 이렇게 어떻게보면 피하고 싶은 비본질적인 것이기에 그러나 피할수 없는 것이기에 오히려 맑은데가 있다. 여기에는 어떤 악도 없고 적도 없고 야망이나 욕심도 없다. 이미 행복하다면 참여는 안해도 좋다. 다만 불완전한 세상에서는 참여가 행복에 필요하니까 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자기성찰이 근본이 아닌 그저 참여로서의 정치는 악이 있고 적이 있으며 목표가 있다. 그것은 야망과 욕심으로 뒤범벅이 되어서 결국 이긴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의 피를 흐르게 한다. 무엇보다 애초에 그 목표가 반쯤 의심스러운 것이다. 자기성찰이 근본이 아닌 정치가 과연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가?
사람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믿는 건 종종 서로 다르다. 그들이 스스로 생각해 냈건 누가 그들의 머리에 주입했건 그들은 어떤 몸밖의 뭔가가 생겨나면 행복해 질거라고 믿는다 -그게 집이건 인권이건 푸른 숲과 바다건 두툼한 봉급이건 말이다- 그리고는 서로서로를 손가락질하면서 서로 다른 것을 믿는 사람들을 종종 미쳤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서로가 믿는 것, 서로가 믿지 않는 것을 제대로 확인도 안해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말은 그들이 모두 자기눈에 보이는 것은 실체고 남의 눈에 보이는 것은 환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환상을 보는 사람은 미친 사람일수 밖에 없다. 이명박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노무현을 부패한 대통령으로 기억하고 이명박을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을 운영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미친 생각일수 밖에 없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종종 문제는 사실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확한 사실의 수집을 통한 진리의 추구라는 계몽주의적, 과학주의적 행복찾기에 나선다. 그러나 문제는 흔들리지 않는 사실에 있지 않고 항상 믿음에 있다. 우리가 쉽게 화를 내고, 쉽게 두려워 한다면 즉 우리의 내부가 이런 저런 것들로 뒤죽박죽이 되어서 우리 삶의 불확실성속에서 쉽게 겁에 질리고 만다면 거기에 어떤 사실을 들이댄다고 해도 그걸로 우리의 행동이 결정되지 않으며 심지어 행복하지도 않다. 몇몇 객관적인 사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이 아는 것을 토대로 만든 객관적이고 엄정한 사실로 만든 성이란 영원히 만들어지지도 않지만 만들어져도 사람들이 그안에서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자칭 진보주의자의 대부분은 인기가 없다. 그들은 들어가 살 사람은 생각지도 않고 집을 만들기 때문이다. 엄청난 피를 댓가로 지불하고 그집이 지어지기도 어렵지만 지어져도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들만 그 집에 대해 확신을 가질 뿐이다. 공산주의의 역사가 이미 그걸 보여준다. 그들은 레닌이나 마르크스가 바보라서 지상천국이 건설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을 집에 맞추는게 아니다. 사람이 스스로 행복할 준비가 된 상태가 아니면 어떤 집도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행복해지기 위해 그 집이 별로 그렇게 많은게 필요하지 않다.
맺는 말
정치의 근본은 자기성찰이다. 정치는 우리를 같은 이데올로기안에서 똑같은 기계인형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될수가 없다. 정치는 우리가 모두 서로 다르지만 공존할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정치는 논리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게 목표가 아니다. 그건 수단의 하나일 뿐이다. 정치는 통합에 대한 것이다.
통합 혹은 함께 살아가기가 어떻게 자기성찰의 테두리 바깥을 넘어설수 있겠는가. 기계적으로 전국민이 모두 똑같은 병역의 의무를 지고 똑같은 세금내면 그게 평등이고 행복일까. 나뭇잎하고 나무가지하고 나무뿌리하고 하는 일이 다 다른데 다 똑같아지라고 하는게 평등이고 정의일까. 서로 달라도 어떻게 공존할수 있는가. 너는 경상도 사람 너는 전라도 사람 혹은 너는 보수 너는 진보 혹은 너는 88만원세대 너는 386세대 너는 베이비붐세대하는 식으로 척척 이름붙이면 되는가. 그런 이름들은 다 남이 만든 것이다. 자기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면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 그게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무엇보다 우리들중의 승자가 행복해 지는 길이 아니라 모두가 나란히 같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자기성찰의 길이란 남의 성공이 나의 패배가 되는게 아니라 남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상이 살기 좋아지는 것이니까 그렇다.
그위에 참여는 저절로 자라나기 마련이다. 그렇게 자라난 참여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