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암(강국진) 2012. 7. 30. 08:00

2012.7.30

한국도 일본도 요즘 연일되는 더위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그래서 인지 간밤에는 악몽을 꾸었더랬다. 꿈속의 나는 한국에서 형제들과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학생이었는데 어느샌가 팔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는 병에 걸린 것이다. 내가 가진 병을 부인하면서, 나는 잘 걸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슬퍼하고 실망하고 하다가 깨어보니 어느새 팔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던 한국에 살던 그 학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일본의 한도시에 살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새벽녁에 잠이 깨어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아직 5시반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몸을 일으켜 보니 정말 팔다리가 잘 움직이질 않는다. 생각해보면 새로운 일도 놀랄 일도 아니다. 자다가 일어났는데 비틀비틀거리는 일이야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꾸고 난 직후라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한 순간 겁이 덜컥 났다. 이러다가 어느날 아침에는 영영 안 움직이는거 아닐까 하고. 짧은 세수를 마치고 신을 신고 집 앞 공원에 나가서 , 나는 걸었다. 마치 몸이 잘 움직이는가 확인해 보듯이.

 

흔한 교훈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그것을 잃기 전에는 모른다던가,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던가 하는 교훈들에서 장자의 호접몽까지. 나는 한동안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지금 이것이 팔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는 한 불우한 학생의 꿈인지 일본에 사는 한 중년의 과학도가 어린 학생의 꿈을 꾸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잘 모른다. 오직 그것이 없어지고나서야 깨달아서 마치 엄청난 홍수가 나서 물위에 떠다니면서 물을 찾아헤매는 꼴을 종종 보인다. 자신이 엄청난 물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게 된다면 많은 것을 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팔다리가 멀쩡하지만 나는 이게 없어 저게 없어라고 불만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팔다리가 잘 움직이고 있는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살겠는가. 그들은 그것을 당연시 할 뿐이다. 자신이 축복받은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승려나 신부님, 신비주의자들중에는 들에 난 한송이 꽃이나 풀에 감사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은 그런 것을 볼 수 있는 문맥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해 훨씬 더 많이 감사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팔다리가 안 움직인다던가 암에 걸린다던가 하는 식의 일은 드물지는 않지만 아주 흔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훨씬 더 흔한 상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우리는 모두 시간을 상실하며 살고 있다. 지나간 학창시절은 돌아오지 않는다. 지나간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다. 비록 첫사랑에 성공해서 그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해도 첫사랑을 만나고 그 사람과 가슴 두근거리는 시간을 가졌던 그 때는 지나가고 다시 경험할 수는 없다.  아름다운 추억이 남는다고는 하고, 다시 한번 살아도 더 잘 살 수는 없을거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후회는 없다고 말해보아도 시간이란 기본적으로 상실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시간을 모두 잃게 되면 죽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더미같은 추억이 있다고 한들 그 속에서 당장 죽는 것보다는 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좀 더 사는 것을 원한다. 

 

이런 생각의 끄트머리에는 알쏭달쏭한 질문이 존재한다. 우리는 가진 것에 만족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만약 이 질문의 답이 가진 것에도 만족하면서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좀 말장난처럼 들리지 않는가라고 말하고 싶다. 다르게 말한다면 그 답안에는 뭔가 핵심적인 부분이 빠져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대부분을 움직이는 것은 욕망이나 상실감이다. 즉 우리가 뭔가를 원하기 때문에, 뭔가를 가지고 싶고 뭔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움직인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가진 것에 만족하면서 살라는 메세지는 왠지 죽을 날을 얼마남겨두지 않은 노인들이나 되새겨야 할 이야기처럼 들리며, 변화를 상실하고 거부하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미 가진 것에 완벽히 만족하고 더이상 아무것도 더 필요없다면 돌멩이 같은 존재가 아닌가? 희망이란 것은 뭔가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이 있기에 가지는 것이 아닌가. 가진 것에 만족한다라는 것은 희망도 없이 그저 가진 것을 부둥켜안고서 변화를 거부하는 그런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고립된 삶이 정말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산속에 들어가서 홀로 도를 닦다가 죽는 삶을 권장하는 것이 좋은 일일까? 아니면 엄청난 부와 명예를 쌓아올리고 이젠 이걸로 됐어라고 하면서 그걸 움켜쥐고 변화를 막는 삶이 옳은 길일까. 변화없는 삶은 언제나 지옥이 아닌가?

 

이와는 달리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꿈을 쫒는 사람은 변화를 추구한다. 이 단계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앞으로 나가자, 나를 바꾸자라는 각오가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좀  다른 이야기가 주어질 수 있다. 당신은 행복을 쫒아서 열심히 뛰고 있지만 사실 당신은 당신이 행복하기 위해 더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당신은 행복해 지지 않는다고. 즉 나는 뭔가를 얻어서 행복해지겠다는 생각은 틀린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뭔가를 얻게 되면 당신은 한동안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뭔가가 나를 완벽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생각은 끝이 없다. 상실감이나 허전함은 다시 돌아오고 결국 다시 뭔가를 위해 뛰게 되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게 되기 쉽다. 

 

그런 사람은 종종 그저 평생 뛰어다니기만 하다가 생을 마친다. 그냥 더더더를 외치다가 끝나는 것이다. 그 사람도 이것만 하면 나도 쉬어야지, 나도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효도도 해야지, 한가롭게 휴가도 보내고 민속주점같은데서 분위기도 즐기고 해야지, 보고 싶은 책도 보고 영화도 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지만 결국 먼 훗날 돌아보면 마치 도박판같은데에 빠져서 모든 시간을 잃고 빈털터리가 된 사람처럼 되기 쉽상이다. 정신차려보면 건강도 돈도 가족도 친구도 모두 잃어버리고 무엇보다 모든 시간을 다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게 된다. 

 

우리는 대개 이런 문제에서 그냥 적당히 중용을 찾으면 되는거 아니냐면서 얼머무리고 만다. 적당히 만족하고 적당히 꿈도 꾸고 욕망도 가지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어정쩡한 것으로 뭐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다보니 어느날은 산속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사는 사람을 존경하다가 어느날은 대단한 사회적 성공을 이룬 기업가나 유명한 학자들을 보고, 대단한 야심가를 보고, 더 위로 더 많이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고 존경심을 가진다. 어느날은 도인을 존경하고 사업가를 비판하다가 다른날은 사업가를 찬양하고 도인을 비하한다. 왼쪽으로 뛰다가 오른쪽으로 뛰다가 하는 판이다. 뒤돌아보면 제자리를 맴돌고 있으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닌 상황에 대한 돌파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변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자세에 그 답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고 만족하는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그것들을 상실해 가는 것에 대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태도로 임해야 한다. 어제는 가지만 새롭게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될 오늘에 대해 새로운 선물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거 아닐까. 

 

이것은 수동적으로 변화를 수용하자는 말은 아니다. 변화는 내적으로건 외적으로건 자연스럽게 생긴다. 외부적 변화도 있지만 내부적으로도 뭔가에 호기심이 생기고, 인연이 닿게되고 책임을 지게 되면 우리는 뭔가를 열심히 하게 된다. 그 뭔가를 하다보면 결국 우리는 뭔가를 얻고 뭔가를 잃는다. 변화는  끝이 없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행복이라고 불리는 언덕에 도달하여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변해가는 삶을 계속할 것이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말이다. 그러다보면 우리는 산속에서 홀로 조용히 사는 삶에 이르게 될지 모른다. 혹은 정치가가 되고 장사꾼이 되어 시끌벅적하게 살게 될지도 모른다. 어느 쪽에 되었건 우리는 그런 외부적 결과보다는 매순간 자기의 마음이 이끄는 자연스런 변화에 따라야 한다.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은 하고 하지 않고 싶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았고 살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갈림길에서 마음이 원하는 반대편 길을 택한사람은 설사 객관적 기준에서 성공했더라도 후회가 남을 것이다. 저쪽으로 갔었더라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었을까 하고. 후회가 있으면 행복할 수 없고 가진 것을 즐길 수 없다. 

 

어떤 욕망에 따라 뭔가를 얻겠다면서, 어딘가 목적지에 도달하겠다면서 변화를 추구하면 그 목적지에 잘 도달도 안되지만 도달한다고 해도 얼마지나지 않아 실망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거기에도 머물 수 없으며 억지로 머물고자하면 빚만 쌓여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억지로 어딘가에 도달하겠다고 손해를 보고 거기에 도달해서는 그걸 포기할 수 없다고 버둥대다가 손해를 본다. 손해만 보는 인생이니 남이보기에는 화려해도 내실이 없고 행복이 있기 힘들다.

 

어느 날에는 그 악몽속에서 처럼 정말 내 팔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는 날이 올것이다. 운이 좋다고 해도 결국 나는 늙을테니까 말이다. 자리에 앉았다가 일어나면 가슴이 뛰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날이 올것이다. 그런 날이 와도 그것을 악몽으로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내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팔다리가 움직이지않아도 때가 된 것이로구나 하고 담담하게 생각하며 늙어갈수 있는 내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게 이 세상에 와서 한 때를 잘 보낸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