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심한 선택의 모순
2018.2.22
심리학 실험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여러 포스터 중의 하나를 고르게 한다. 그리고 또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는 여러 포스터 중의 하나를 그냥 준다. 이렇게 하고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은 포스터를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물어 보았다. 누가 더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있을까? 언뜻 생각하면 시간을 들여서 자기가 좋아하는 포스터를 고른 사람들이 자기 포스터에 더 만족할 것같지만 실험 결과는 반대로 나왔다. 오랜 시간동안 고민해서 포스터를 고른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 포스터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실험결과는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선택의 관습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든다. 선택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을 상상해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러분. 뭔가를 선택할 때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꼼꼼히 모든 조건을 잘 살펴야 합니다. 되도록 종이를 옆에 두고서 원하는 것을 모두 적어보세요. 그리고 그 조건들에 따라서 하나하나 선택하지 않을 것을 지워나가는 겁니다."
이런 조언은 익숙하고 당연하게 들린다. 우리가 교육과정을 거치는 동안 엄청나게 많이 듣는 말이다. 그 이유는 사실 이런 사고방식이야 말로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과학적 논리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의 교육기관은 기본적으로 이런 사고방식을 훈련 시키기 위해 존재하는데 사회가 그런 원리에 따라서 구성되어 있으므로 그런 논리에 수긍해야 현실 사회에 수긍하게 된다. 예를 들어 회사는 사원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여러가지 항목을 정하고 그 항목에 점수를 매기고 그리고 그에 따라 평가를 내리고 월급을 결정한다. 직원들은 그것을 알고 있고 그 과정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믿기에 자신의 월급에 납득하는 것이다. 국가가 운영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기계적이고 객관적인 분류 시스템의 합리성을 믿는 것은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힘중의 하나다. 그래야 공평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의 선택에 대한 만족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극대화 되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위에서 말한 심리학 실험이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당신이 세심하게 선택의 조건을 살피면 살필 수록 당신의 좌절은 깊어지고 행복감은 줄어든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혹시 사회나 회사가 세심하게 조건의 목록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평가하고 고르면 고를 수록 바보같은 사람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그럴 수록 엉터리 사원을 뽑게 되는 것은 아닐까? 대학입시를 세심하게 개혁할 수록 교육정책은 엉터리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그렇듯이 그 답은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여러조건을 세심하게 살펴서 선택을 한다라는 정책이 실패하는 경우는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일을 한다. 왜냐면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오랜 시간동안 학교와 사회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이건 세뇌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모순과 실패를 날마다 느끼면서도 다른 대안은 없다면서 실패하는 방법에 매달린다.
먼저 이 여러가지 조건을 세심하게 살펴서 답을 찾는 방법이 성공하는 예를 하나 고려해 보자. 그것은 다음과 같은 수학문제다.
문제: 2이상 10이하의 자연수 중에서 2와 3으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숫자를 말해 보시요.
답 : 5와 7
이 문제를 풀 때 우리는 두 개의 조건 즉 2로 나누어 떨어지는가 혹은 3으로 나누어 떨어지는가를 2 이상 10 이하의 숫자들에 적용해 본다. 그리고 그에 따라 숫자를 지워나가면 답은 5와 7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소거와 분류의 방식이 잘 작동하는 문제와 현실은 다르다. 우선 현실에서는 답의 경계가 없다. 다시 말해서 2 이상 10 이하라는 식으로 답은 이 안에 있다는 후보군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설사 있다고 해도 현실적으로는 없는데 내가 어느 지역의 숙박업소중 내 맘에 드는 곳을 찾겠다고 한다고 해보자. 숙박업소의 수는 물론 유한하지만 우리가 현실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생각하면 숙박업소를 고르는 방식이 매우 단순한 것이 아닐 경우 무한히 많은 숙박업소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때로는 이 안에서 답을 고르라는 질문 자체가 함정이다. 당신 앞에는 두 쌍의 신발이 있고 질문은 둘 중 어느 것이 좋은가라는 것일 수 있다. 이러면 분명 후보군이 제한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왜 애초에 이 가게에서만 신발을 사야 한다는 조건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질문이 어떤 가정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후보군이 제한되어 보일 뿐이다. 남편과 함께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여성들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고 또 다른 가게로 간다.
또 하나는 현실에서는 조건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2로 나누어 떨어지면 안된다' 같이 깔끔하게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집을 고른다고 해보자. 당신은 거실의 크기가 특정 크기 이상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가진 식탁이 들어가려면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비싸고 좋은 식탁을 가진 사람은 그 식탁때문에 아주 큰 집으로 이사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집을 볼 때 거실 크기는 이러저러한 크기 이상이라고 못박아 버리고 그것을 절대적 조건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 집은 돈을 좀 들여서 리모델링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 조건으로는 거실이 너무 작아도 해결이 가능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식탁을 포기하고 팔아버린다는 선택이 있을 수도 있다. 해결책이 언제나 당연한 것은 아니다. 고민하면 답이 찾아지기도 하지만 안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해결책을 찾고는 한다. 그래서 어떤 조건을 절대적인 것으로 하고 많은 후보를 빠르게 심사할 경우 우리는 대개 바보같은 답에 이르게 된다. 아주 작은 아이디어 하나면 모든 선택과정이 다 달라지기 때문이다. 키가 175cm이하의 남자와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는 식의 결심은 그래서 바보같은 것이다. 키작은 남자는 싫다는 것이 개인의 취향이라고 해도 사실 그 여자는 2cm 키높이 깔창의 차이때문에 인생을 망치고 있을 수 있다.
게다가 현실에서는 주어진 조건이 절대적이 아닐 뿐더러 객관적도 아니다. 이것은 훨씬 더 고약한 것이다. 내 선택을 다른 사람들은 바보같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그 사람들은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조건을 별로 안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참을만한 단점이다. 이 객관성의 문제는 두가지 이유때문에 훨씬 엄청나게 골치 아픈 것으로 변한다.
첫째로 이 객관성의 부재는 심지어 같은 사람에게서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우리 스스로가 지금 생각하는 조건도 내일이 되면 바뀐다. 샤워하기 너무 귀찮았는데 일단 샤워를 하기 시작하면 너무 기분이 좋았던 체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타인과 생각이 달라도 최소한 내 생각이라도 고정되어 있으면 좋겠지만 내 생각도 달라질 수 있다. 어떤 때는 너무 간단하게 변해서 스스로도 허탈해 진다.
둘째로 현실적으로 어떤 것을 선택할 때는 2나 3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처럼 조건이 두개만 있는게 아니다. 사실은 거의 무한대로 있고 무한대까지는 아니더라고 해도 조건이 5개나 10개가 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예를 들어 '우리 점심때 나가서 중국집에라도 갈까?'라는 제안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런 외식에 대해서도 어딜 가야 하는가 (집바로 앞이 좋은가 아니면 차타고 좀 나가서 먹을까), 어디로 가야하는가 (중국집인가 일식인가), 언제 가야하는가 (점심이 아니라 저녁이면 어떤가), 누구와 함께 가야하는가 (그러지 말고 우리 친구도 하나 더 부를까?), 날씨는 어떤가(비가 오면 나가지 말아야 할까? 추우면 어떤가.) 등등 많은 조건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현실적인 선택의 순간들에서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해 보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고려 가능한 모든 경우들을 다 나열하기 시작한다면 선택이란 점점 더 불가능해 진다. 그런데 그런 극단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몇가지 정도의 조건은 고려하는게 상식적으로 보일 때는 많다. 그리고 조건의 수가 늘어날 수록 이공계에서는 차원의 저주라고 불리는 현상이 일어난다. 즉 상상가능한 경우의 수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나는 것이다. 조건이 두개였는데 5개로 늘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두세배 느는 것이 아니라 백배로 늘 수 있다. 일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꾸 어떤 가능성들을 억누르면서 주어진 문제를 통제가능한 수준으로 단순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끝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때문에 두세사람만 어떤 선택과정에 공동으로 참여해도 선택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되거나 아주 비참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사람이 늘면 선택조건이 대개 늘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이런 건 어떻게 해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게다가 각자의 선택기준은 변화가능하고 주관적이니 밤새고서 선택을 했는데 그것이 1시간뒤에 보면 전혀 의미없는 선택이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도 그 선택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실은 엄청난 자제력으로 문제를 꼼꼼히 다루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야 한다. 왜냐면 바보가 아니라면 여기서 사람들이 꼼꼼히 의견을 내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한없이 옆으로 새서 아무 결론도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때로 결론없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내에 결론을 내려고 한다면 좋은 생각이 아니다.
이 문제는 결국 우리가 주어진 대상물을 분해하는 것에서 나온다. 이런 태도는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고 아 이 조각상 좋은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상은 키가 어느정도 되어야 하며, 재질은 이래야 하고 색깔과 감촉은 이래야 하고 하는 식으로 조각을 바라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무 생각없이 좋다고 느낄 때는 쉬웠는데 이렇게 접근하다보면 좋은게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진다. 상점에서 세일즈맨이 이런 저런 정보를 손님에게 말해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런 혼돈을 통해서 손님이 필요도 없는 상품을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사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인간은 물론 쉽게 바보같은 짓을 한다. 그래서 인간은 조건을 나열하고 분류하는 논리적 과정을 개발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집앞의 우체통이 멋져보인다는 이유로 그 집을 사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는 것이 인간이다. 문제는 우체통이 멋져보인다는 이유로 집을 사는 것이 사실은 그렇게 바보같은 짓이 아니라는 데 있다. 주어진 상황을 분류하고 조건을 매기는 과정을 이성적 과정이라고 보는 것은 절대적 참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가정이다. 그리고 이같은 환원주의적 논리는 사실 20세기이래로 점점 더 실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주제는 여기서 다루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요점은 우리가 학교에서 환원주의적 논리에 따라 배운 선택의 방법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방식의 어리석음이 극대화될 때 '대안은 없어. 이 것이 유일한 합리적인 방법이야.'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함정에 빠져들면 합리적이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수렁에 빠져서 답은 엉망이 된다.
현실적 논리는 단순해야 한다. 그런 논리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정밀한 논리들은 사실 더 훌룡한 논리가 아니라 더 바보같고 위험할 수 있는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논리는 진리가 아니라 망치같은 임시적 도구다. 가진 도구가 잘 작동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도구에 집착하지 말고 문제를 직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