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마크 릴라의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를 읽고

격암(강국진) 2018. 6. 30. 00:45

18.6.30

여기 백만불짜리 질문이 있다. 그것은 세상은 도대체 왜 이렇게 엉망일까 하는 것이다. 세상이 엉망인 것은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부시나 트럼프가 당선된 것이다. 한국에서 말하자면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당선된 것도 그렇다. 대통령 자리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선거결과는 참으로 실망스럽다. 오바마도 트럼프를 탄생시켰고 노무현도 이명박을 탄생시켰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따르기에 민망한 사람을 국가 지도자로 계속 뽑게 될 까? 그리고 세상은 더욱 엉망이 되어가는 건가? 도대체 세상은 왜 이 모양일까?

 

물론 이에 대해서 답은 여러가지로 나올 수 있을 테지만 가능한 답중의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진보가 엉망이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뭐가 엉망일까?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라는 책속에서 컬럼비아 대학교의 인문학 교수인 마크 릴라는 그 답을 간결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때문에 진보는 정권을 잡을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지만 단순히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으로는 매우 부족하다고 말한다. 바로 진보가 자신의 문제를 알아차려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진보가 어떻게 변명을 하건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진보를 이렇게 본다. 

 

잘난체 하며 남들을 가르치려고 드는 사람들.

도덕적으로 완벽한 체 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뭉치게 하기보다는 흩어지고 싸우게 만드는 사람들.

세상을 구하기 보다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 과장하여 불평하고 보상만 요구하는 피해의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

 

오늘날의 진보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1960년 연설에서 말한 조언을 정확히 반대로 따르고 있다. 케네디의 조언은 국가가 나를 위해서 뭘 해줄까를 묻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라라는 것이었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국가나 사회가 의무를 말하는 것을 부인한다. 그리고 그들은 국가는 입닥치고 피해 보상금이나 내놓으라는 식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마크 릴라는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진보주의자이며 극명한 트럼프 대통령의 반대자이자 미국 민주당의 지지자다. 그런데 그의 진보 비판을 보면 그는 진보를 정말 가차없이 거의 쓰레기처럼 보이도록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 아픈 부분은 그의 비판은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을지언정 완벽히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하고 간결한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게 진보가 아니라고 말하거나 모든 진보주의자가 이런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의 글을 읽고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가 말하는 것을 거의 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요즘의 진보는 이렇다. 

 

그럼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일까? 마크 릴라에 따르면 미국의 진보는 1960년이래 점차로 해야할 일들을 반대로 한다. 진보가 해야할 일이란 바로 미국 사람들을 시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하나로 뭉치게 하는 일이고 그런 교육을 해서 새로운 세대가 그것에 준비되게 하는 일이다. 왜냐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연합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보들은 정체성 정치운동에 몰두했다. 정체성 정치운동의 문법은 단순하다. 그것은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주고 그 정체성이 당신이 지금 처한 상황의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당신은 노동자이고 당신은 여성이며 당신은 동성애자이고 당신은 농민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당신의 처지를 결정해 왔다. 

 

정체성 이론은 사람들을 나눈다. 여자와 남자로, 농민과 비농민으로, 노동자와 자본가로,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로, 도시민과 비도시민으로, 교육받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흑인과 백인으로 그렇게 한다. 그 다음도 중요한 문제다. 일단 이렇게 어떤 정체성을 말하고 나면 우리는 그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게 되기 쉽다.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내가 과도한 이득을 얻었다고 말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 나면 우리의 행동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 가는 뻔하다. 우리는 그 문제의 개혁을 요구하고 피해보상을 요구하게 된다. 

 

이런 진보적 관점을 대학에서 흠뻑 교육받은 신세대들은 자신들이 국가에게 뭔가를 빚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국가가 그들에게 뭔가를 빚졌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결국 진보교육은 사회에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 학생들을 양산하게 된다. 내 성적이 나쁜 것도 나쁜 시스템때문이다. 내 노력때문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시스템에는 말도 안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 이르고 나면 스스로를 어떤 진보적 운동의 추종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중에는 화가 난 사람이 나올 법도 하다. 예를 들어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만들어 낸 정체성 정치운동은 페미니즘인데 그걸 위의 문법에 집어넣으면 여성에 대한 차별을 부인하고 그들에 대한 불공정을 계속 유지하라고 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화를 내기 전에 일단 앞에서도 소개한 케네디의 조언을 다시 한번 읽으면서 마음을 진정시켜 보자.

 

국가가 나를 위해서 뭘 해줄까를 묻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라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정체성 운동 자체가 악이라던가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는 바퀴로만 만들 수 없듯이 사회 운동만으로는 세상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 어떻게 다르며 누가 어떻게 사회로 부터 소외되어져 왔는가를 생각해야 하지만 그것 말고도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 다르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가 서로 똑같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 그래야 정권을 잡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 정체성 이론이 말하는 소외와 피해의 문제도 해결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 부분에 있어서 언급할 수 있는 미국의 보수 대통령이 레이건이다. 우선 이 대통령은 골치 아픈 과학자처럼 굴지 않았다. 돌아보면 부시도 트럼프도 이런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오히려 멍청이로 통했다. 그리고 레이건은 미국안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다르며 어떻게 그 사람들을 돌봐주어야 하는가를 말하는 대신에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같이 꿈꿀 수 있는 비전에 대해 주로 말했다. 그것은 가장은 자가용을 몰면서 많은 봉급을 주는 직장에 다니고 가족들은 타인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교외에 있는 단독주택에서 살면서 풍요로운 생활과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는 꿈이다. 레이건은 사회에 대한 의무보다 개인의 욕망에 방점을 찍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공유하는 욕망이었고 참여하고 싶은 욕망이었으며 당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이었지 모두를 분열시키고 불편하게 만드는 지적질이 아니었다. 마크 릴라는 트럼프의 승리의 비결도 이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진보주의자들처럼 그의 지지자들을 잘게 나누어 분열시키지 않는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권리가 있다고 말할 뿐이다. 타인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원한다면 단결하여 트럼프를 찍으라는 것이다. 

 

진보는 어떤가? 진보는 이런 식이다. 비록 노동운동에 있어서 영웅적인 기여를 하는 사람이 있어도 여성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비판받아야 한다면 그 사람은 같이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주제가 비록 환경문제라도 낙태반대론자와는 말을 섞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낙태찬성론자인 진보주의자들이다. 제 아무리 훌룡한 일을 많이 하는 배우라도 그 배우가 한우를 먹지 않고 수입 소고기를 먹거나 수입소고기 선전을 하는 일을 한다면 그 배우는 불매 운동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진보는 위선자처럼 도덕적 원리주의자인것 처럼 군다. 그들은 세상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고 그것을 조금 더 좋게 만들기 보다는 그것의 어떤 한 측면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지적을 모두 합치면 어떤 인간도 그 요구들을 다 만족시킬 수 없을 것같다. 언제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너무나 불편하다. 그런데 어떤 하나만 어겨도 갑자기 나는 가장 부패하고 어리석은 인간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 이러니까 집단적으로 보면 진보는 잘난체 하는 잔소리 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람은 그냥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저런 흠이 있고 이런 저런 욕심이 있다. 과거도 살고 있는 환경도 다르다며 같은 나라 사람이라도 직종에 따라 소득에 따라 사는 문화가 다르다. 성추행은 나쁜 것이다. 하지만 성추행이 정말로 100% 있을 수 없는 세상을 만든다면 어떨까? 그런 세상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꿈을 꾸면 오히려 진짜로 나쁜 성추행범들이 처벌을 받지 않는다. 살인을 자잘한 경범죄와 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식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언제나 타협을 요구한다. 진정으로 이 세상을 개혁하고 진보주의자들이 말하는 여러가지 문제를 개선할 의지가 있는 사람은 타협을 한다. 그런데 진보주의자들은 그런 타협을 극렬히 비판하면서 세상을 개혁할 사람을 낙마시키려고 한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예는 아니지만 한국의 예를 들자면 노무현 정권때 진보정당이 얼마나 보수당과 연합하여 정부를 비난했는지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노무현 정권이 무너지고 이명박 보수 정권이 서서 진보의 가치가 현실화되었는가? 

 

진보는 얄팍한 이론을 가지고 자신이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는 교만에 빠져 있다. 모든 여자는 그저 여자가 아니고 모든 노동자는 그저 노동자가 아니다. 변수가 2개건 10개건 몇개의 단어들로 사람들을 이리저리 분류해서 이렇고 저렇고 하는 말하는 일은 쉽다. 사회과학적 예측이나 영향분석도 너무 믿지 말아야 한다. 사회과학이 세상일을 예측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에 포퍼에 의해 역사주의라는 이름의 가짜 과학으로 비판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진보주의자의 논법은 당신은 무슨 무슨 이론을 아는가, 당신은 사회주의나 생태주의나 페미니즘이 뭔지 아는가라는 식이다. 나는 공부한 사람이고 당신은 모른다는 식이다. 

 

진보는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져있다. 그것은 좋은 부분들을 모으면 좋은 사회가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좋은 규칙이라면 규칙이 10개인 것보다는 100개인 것이 10배 좋다. 그래서 있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정체성을 고려하고 그 모든 사람들의 편에서서 그들을 보호하는 논리를 만들면 모든 사람이 다같이 잘 살 수 있는 사회의 조립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그것은 마치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제일 비싼 부품들을 사모아서 제일 좋은 차를 조립하려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부품들은 서로 맞지 않고, 모든 부품을 살 돈이 없어서 자동차는 앞으로 가지도 않는다. 

 

핵심은 전체를 보고 느끼는 것이고 사람들의 힘을 모으는 것이다. 가장은 어떻게 해서건 집안을 꾸려가려고 하는데 불평많은 철부지처럼 우리집은 식사가 문제네, 옷이 문제네, 방이 너무 좁네, 너무 시끄럽네 하는 식이어서는 안된다. 전체를 보면 분명해지는 것은 세상은 언제나 아쉬운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타협이 필요하다. 뭔가가 절대로 안된다같은 식으로 사고해서는 답이 나오질 않는다. 금기가 많으면 많을 수록 선택의 폭은 더 좁아지고 결국 우리의 삶은 오히려 더 나빠진다.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의 비전을 모두가 공유해서 같은 꿈을 꾸는 것이다. 마크 릴라는 사람들을 묶어주는 개념으로서 우리는 시민이라는 단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는 시민이 뭔가를 생각하고 정의하고 그 시민의 영역이 더 많은 사람들을 묶어주는 시민이 사는 미래를 꿈꿔야 한다. 그 미래에도 페미니스트가 있고 환경주의자가 있고 동성애자가 있고 장애인이 있으며 실업자도 있을 것이다. 그 미래에는 매우 똑똑한 사람도 매우 근면한 사람도 있겠지만 욕망에 쉽게 지고 게으르며 오타쿠처럼 약간 기이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들은 그들이 모두 시민이라는 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고 서로를 버리지 않는다. 자식과 부모와 형제가 어리석은 점이 있다고 해도 그들을 버리지 않는 것과 같다. 진보는 무엇보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그들은 너무 쉽게 서로를 버리는 것을 진보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을 하나 지적하고 이 소개를 끝내자. 이 책에 불만이 있다면 마크 릴라도 사실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비전에 대해서는 비교적 단순하고 간결하게 말을 끝낸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은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거나 저자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X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X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간단하게 끝낸다면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고양이 목에 방울걸기식의결론이 되지 않으려면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모으는 방식에 대해 보다 많은 예들을 시도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저 시민이라는 구호 하나로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나는 시민이라는 말보다 인간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자니 여자니 하는 것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인간을 재정의하고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구체적으로 꿈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21세기는 공장시대에 나타나고 정의되어진 노동자와 자본가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세상이다. 세계는 하나로 융합되고 있고 인공지능의 발달같은 것이 인간이 살아갈 환경을 크게 다르게 만들고 있다. 그런 미래는 어떤 소수자들이 살아갈 미래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살아갈 미래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인간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인간이 어떻게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고전적 상황에서처럼 직장이 인간에게 존재의 의미를 주는 중요한 원인이라면 자동화의 엄청난 진전은 많은 인간으로부터 존재의미를 빼앗아 갈 것이다.  우리가 꿈꿔야 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자기의 존재에 대해 확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미래가 아닐까? 그런 미래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 자체가 우리를 단합하게 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우리가 우리의 존재의미를 확신하게 만들어 주지않을까?

 

더 나은 진보는 현실에 대한 이해, 큰 상상력 그리고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마크 릴라는 1960년대의 진보가 가졌던 어떤 타성에 빠진 진보는 이제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진보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진보는 오히려 진보적 가치가 현실화되는 것을 막을 것이고 우리는 트럼프같은 정치가의 당선을 계속해서 목격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