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읽고
18.7.23
지그문트 바우만은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 사회학자로 영국에서 활동해 왔다. 액체근대는 후기 근대 혹은 포스트모던의 세계에 대해서 그가 쓴 책이다. 이 책은 2000년에 출간된 책으로 한 해가 다르게 바뀌어 가는 오늘날의 흐름을 생각하면 시간이 좀 지난 책이지만 현대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할 기회를 준다. 특히 그가 제기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고 따라서 아직 다 해결나고 지나간 문제로 말할 수 없다.
포스트 모던을 말하는 것은 근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그래서 자연스레 이 책은 모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상당 부분이 투자된다. 그래서 그것과 비교되는 포스트 모던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일정부분 모던시대에 대한 비판으로 읽힌다. 다시 말해서 모던시대를 만들었던 이상이 결국 오늘날의 세상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이제 더이상 근대라고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근대의 자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세상은 문제가 있었다. 그것도 1925년에 태어난 바우만이 보기에는 아주 엉망진창이다. 그는 비록 직설적으로 그렇게 쓰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우리가 통상 근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고체근대로 부르고 포스트 모던에 해당하는 것을 액체 근대로 불렀다. 고체 근대의 이상은 두가지다. 하나는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낡은 지역적이고 미신적인 믿음들과 질서들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두번째는 그렇게 해서 깨끗해진 바탕위에 시공을 초월하는 영원의 질서를 세워올리는 것이다. 그가 근대를 고체근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근대에서 추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예를 들어 개인의 욕망같은 것은 시간에 따라 빠르게 변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훨씬 초월하거나 영원히 갈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진리와 질서를 세우는 것을 추구했다. 따라서 개인의 삶이란 그런 것을 위해 희생되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가치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죽고 나면 썩어없어질 육신을 위하는 것보다는 영원히 계속될 국가를 세우는데 헌신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근대의 좋았던 시절이라고 할 이 시절에는 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낡은 질서와 싸우는 투사가 되는 것이 시대의 과제였다.
그런데 근대에서 낡은 질서를 붕괴시키기 위해 개발되었던 비판이론들은 지나치게 성공적이었다. 그것은 지역적이고 일관성없는 질서를 무너뜨릴 뿐 아니라 사실상 모든 질서를 붕괴시켰다. 그렇게 해서 인간들이 처한 현실은 새롭게 새워진 영원의 제국이 아니라 아무 것도 세울 수 없는 물렁물렁한 바탕을 가진 폐허였다. 이제 인간은 아무 패러다임도 정당화 혹은 합리화 할 수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남은 것은 오직 개인의 취향이라는 설명 뿐이다. 즉 모든 것은 그저 개인이 선택한 결과이며 그 것 이상의 어떤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순간 그런 시도는 비판이론의 맹폭격을 받아 침몰해 버리고 만다. 무지하고 비이성적인 행위라고 비웃음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간은 폐허 앞에 선 것 뿐만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책임앞에 서게 되었고 지극히 안전하지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병원이 아주 좋아졌는데 의사가 치료방법은 환자가 직접 선택하고 책임도 자신이 알아서 지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리 정보를 많이 준다고 해도 그런 선택을 개인이 하라고 하는 것은 불안하다. 마찬가지로 현대인들은 자신없는 선택들을 너무나도 많은 선택지들 가운데에서 내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스스로를 안전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상황은 전과는 반대가 되었다. 이전의 인간은 영원한 국가나 진리에 비하면 하루살이같았는데 이제는 인간의 삶이 영원한 것같고 여러가지 믿음이니 시스템이니 조직이니 공동체니 하는 것이 하루살이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물렁거리고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는 액체근대에 살게 되었다. 그것은 개인들이 여러가지 이미지들을 마구 뒤집어 썼다 벗었다 하는 시대이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일관성있게 발견하지 못하고 마치 게임에 참여하는 것처럼 그때 그때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시대다.
고체근대가 액체근대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근대의 이상은 실패한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말하자면 모든 인류가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안락한 집을 짓는 것을 상상했으며 그걸 위해 돌을 치우고 낡은 집을 허물었는데 액체근대시대에는 그냥 집이 없다. 공적인 가치가 사적인 가치를 희생시키는 것과 싸우는 것은 좋았는데 모든 것을 개인에게 미룬 결과 이제는 공적인 공간이 사라진 것같다. 거대한 사회앞에서 분열되고 왜소해진 현대인은 자유를 얻는 대신 전체 시스템에 관여할 힘을 잃었다.
우리는 오랜동안 엉뚱한 적과 싸워왔다. 우리가 싸워 온 적은 주로 조지 오월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같은 소설들이 예언한 전체주의 사회였다. 우리는 모든 것이 너무 통일될까봐 걱정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오히려 너무 분열된 것이 문제다. 다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다시 공적으로 가치가 있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가능할까 의아심이 들정도로 인간들은 산산히 흩어졌다.
거대해지고 복잡해진 세상앞에서 홀로된 인간은 얄팍한 이미지만으로 사고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그저 몇몇 주변 동료와 힘을 합쳐 작은 집을 짓는, 생산하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수없이 많이 흘러가는 상품들중에 어느 것을 고를까를 고민하는 소비하는 인간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내면적 요구를 잘 만족시키겠다는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 필요할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보다는 수없이 존재하는 수단들중의 하나를 선택해서는 이걸로 뭘할까, 이걸로 어떤 목적을 이룰까를 고민한다. 말하자면 어떤 요리가 만들고 싶어서 후라이팬을 사는게 아니라 여러가지 부엌용품 광고를 보다가 그 중에 괜찮아 보이는 것을 골라서 사는 식이다. 후라이팬이 있으니 요리를 해볼까 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물건을 사고 그 다음에는 그걸로 뭘할까를 고민한다. 여행가고 싶어서 차를 사는게 아니라 차를 샀으니까 여행을 가는 식이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물건을 쇼핑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생활방식과 세계관도 쇼핑한다. 그리고 물건을 바꾸듯 생활방식과 세계관도 쉽사리 바꾸거나 심지어 몇개의 다른 방식을 동시에 사용해 보기도 한다. 물론 이런 생활방식에는 깊이가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사상을 믿는다고 깃발을 들어도 우리는 그것에 그리 철저하지 않다. 믿음에 있어서건 이해에 있어서건 그렇다. 그저 유행따라 부츠를 사듯 그렇게 그 깃발을 들어 볼 뿐이다. 들어봐서 좋으면 된 것이고 나쁘면 다른 깃발을 들면된다.
선거에서 공인을 선택하는 방식도 매우 사적으로 변했다. 말하자면 어떤 정치인에게 표를 던질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여러가지 공적인 설명들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성추문 문제가 있다던가 그가 야구를 잘한다던가 하는 개인적인 측면이 부각되면 거기에는 쉽게 집중하고 그것이 정치인의 당락에 큰 영향을 준다.
현대인이 이렇게 변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현대가 너무 크고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50년이나 100년전에는 누군가가 하버드를 나왔다거나 서울대를 나왔다고 하면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뭔가 중요한 것을 말해 준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 요즘에는 추상적인 것들은 훨씬 더 추상적이어서 개인으로서는 그 의미를 살피기 어렵다. 그러나 개인들은 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체험을 한다. 그들은 어딘가의 사장이었다거나 하버드 같은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을 만났을 때보다 코카콜라를 좋아하고 주말에 축구를 한다거나 술을 잘마시고 여자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는사람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좀 더 확신하게 된다. 다시 말해 공적인 설명은 마치 방송에서 광고를 무시하듯 무시당하는 것이다. 광고에 주목하면 오히려 판단이 더 엉망이 되니까 그렇다.
현대 사회에서의 경쟁도 문제가 된다.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예측 가능한 사람은 예측 불가능한 사람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의식적으로 그걸 이해하건 아니면 그저 본능적으로 그걸 알건간에 오늘날의 사람들은 남들에게 예측 불가능해 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변화의 속도와 다양성이 무척 중요하며 현대사회에서 너는 예측가능하다는 것만큼 무서운 말도 없다. 상사와 회사는 예측가능한 개인을 착취할 것이다. 당신의 약점은 금방 발각나고 협박의 도구가 될 것이다. 전통적 공동체가 무너진 현대에서 개인을 보호해 줄 방어막이 없는데 그럼 개인들을 뭘해야 할까? 바로 권투의 풋워크 처럼 날렵하게 뛰는 것이다. 펀치를 먹지 않게 말이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이것저것 따지면서 느릿하게 굴면 손해 본다는 것을 믿는다. 일관성같은 것에 연연하다가는 기회들을 놓치고 고생만 하게 된다. 학회에서는 숨도 크게 안쉴 것처럼 조신하게 굴다가 클럽에 가면 미친 여자처럼 굴어야 매력적인 사람이 된다. 스위치를 팍팍 바꿔야 현대를 살 수 있다. 그리고 일단 이런 태도가 유행하면 그것은 세상을 더욱 더 그런 곳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온갖 게임들을 동시에 하며 살고 있는데 그래서 같은 도시에 살아도 서로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마치 서로를 유령처럼 지나친다. 나는 나와 온라인게임을 하는 친구 A는 안다. 하지만 그것은 회사에서 일하는 A와는 다른 사람이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 이것이 액체 근대다. 그것은 사람들이 아주 북적이면서 살아도 서로로 부터 무한히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시대다. 이것은 우리는 서로를 영원히 알 수 없고 자아라는 게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것같은 시대다.
그러나 이것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참 문제야 하는 말을 세련되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히 액체 근대의 세상은 문제가 있다.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을 잃고 이리저리 뛰다가 사고를 친다.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덕분에 글로벌화된 자본과는 경쟁이 안된다. 불안한 사람들은 불안을 해소하고자 가끔씩 패거리를 만들어 폭력을 행사한다. 패거리가 나를 보호해 줄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적인 가치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에 도둑떼나 폭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우하고 일어났다가 폐허를 뒤에 남기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사라질 뿐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설득력이 있으며 2018년 현재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그리고 이것은 영국이나 서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2000년에 쓴 이 책을 오늘날에 읽으면 좀 중언부언하는 느낌인데 그것은 그만큼 오늘날 이 책에서 지적하는 문제들이 심화되어 긴 설명이 필요없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액체 근대라고 하면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스마트 폰을 쓰는 시대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스마트 폰 보편화 이전에 쓰여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이런 문제의식에 대한 자연스런 질문은 그런 문제들을 그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자는 답이 없다. 자기 자신이 비판한 바로 그 방식 그러니까 개인들이 각자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할 뿐이다. 우리는 그런데 이 책을 쓴 저자보다 유리한 상황에 있다. 거의 20년 뒤의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액체 근대는 저자의 생각처럼 나쁘기만 할까?
이에 대해서 몇마디 쓰는 것으로 이 책의 소감을 마무리 하겠다. 나는 앞에서 스마트폰을 언급했는데 그 이유는 저자의 절망이 어느 정도 저자가 인터넷 환경에 대해서 무지한 노인이라서가 아닐까 싶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둘이 같은 자리에 있는데도 각자 전화기만 들여다보면서 서로 대화도 하지 않는 젊은 커플은 70대의 노인에게는 기괴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문제가 전화기이듯이 해결책도 전화기가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나역시 확신은 없다. 하지만 망으로 연결된 대중들이 개개인들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직관적인 사고를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집단지성을 이뤄서 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아 보인다. 다만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지 그걸 하기 위해서 어떤 기술적 발전이 있어야 하는지가 모두 확실하지는 않을 뿐이다.
100년전의 사람들은 도로위를 150킬로나 200킬로로 달리는 자동차나 하늘을 나르는 비행기를 보면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빠른 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가 멈출때나 커브를 돌때 운전자가 의도한 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어떻게 믿냐고 할지 모른다. 실제로 소달구지에 강력한 엔진을 달면 그런 속력이 나오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분명 사고가 날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거의 컴퓨터가 된 자동차가 알아서 잘 반응해 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망이 더 발전되고 정보처리 기술이 더 발전하면 인간이 지금은 불안해 보일 정도로 빠르게 올바른 판단들을 내리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바우만의 문제 의식은 과도기의 불안감을 표출한 것이 아닐까? 나도 확신은 없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긍정의 믿음은 충분히 있다. 그때가 온다면 바우만의 책은 사람이 바람보다 빨리 달리는 것은 자살이라고 말하는 호들갑처럼 들리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바우만의 책은 그렇게 읽기 어렵지 않았고 그렇다고 쉽지도 않다. 그저 참을 성있게 읽었던 만큼의 보람을 주는 정도인 것같다. 여기서 소개하지는 않겠지만 마지막에 부록으로 첨부된 글도 좋았다. 나와는 달리 사회학자인 바우만은 사회학에 매우 긍정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