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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 희망과 장래 욕망

격암(강국진) 2018. 12. 17. 10:00

2018.12.17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곧잘 묻는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특별한 악의가 없으며 그저 관심의 표현이라고 믿는 이 질문은 그러나 사실 아이들에게 부당한 압력을 가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장래 희망을 욕망이라는 단어로 바꿔서 생각해 보면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당신의 꿈이 뭐냐고 물을 때는 대개 그렇지 않은 것같지만 질문을 받는 사람의 꿈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는 즉 공익적이며 윤리적으로 바람직해야 한다는 암시를 품고 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는 장래에 꿈이 뭐냐고 말했다고 해보자. 아들은 그 말을 듣고 저는 그저 방에서 빈둥거리며 게임이나 하면서 사는게 꿈입니다라던가 여자친구를 많이 구해서 섹스가 많이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아버지가 아 그렇구나라고 대답할까? 어쩌면 아버지는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는 어떨 때 제일 좋냐고 묻는다면 아들이 똑같이 대답해도 아버지는 어쩌면 피식 웃고 말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버지는 사람들이 그런 걸 좋아하기는 하지 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장래 희망과 장래 욕망이 왜 꼭 달라야 할까?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이게 꼭 같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같은 게 꼭 바람직하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그게 달라야만 한다는 것이 앞에서 말한 사회적 압력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사회적 압력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먼저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의 삶의 지혜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사회적 압력이 언제나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첫째로 그것은 종종 당신을 위한게 아니다. 착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사회적 압력의 상당부분은 당신을 이용해 먹기 위한 것이다. 좋은 학생, 좋은 아빠, 좋은 남편, 좋은 이웃, 좋은 직원, 좋은 시민이라는 말의 상당 부분은 착취를 위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의 행복에 관심이 조금도 없다. 자신의 행복만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입에서 나오는 말이 왜 당신에게 도움이 되겠는가?

 

둘째로 다른 사람들은 당신에 대해 거의 모른다. 사랑과 관심이 없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사랑과 관심이 있는 경우에도 그렇다. 그들은 대개 평균적이고 상식적인 일반론에 대해서 무신경하게 이야기할 뿐이다. 예를 들어 실연한 남자 A에게 그의 친구 B가 여자는 세상에 또 많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자. 이것이 옳은 말일까 해서는 안되는 나쁜 말일까? 그것은 그 자체로는 옳은 말도 나쁜 말도 아니다. 문제는 A가 어떻게 느끼냐하는 것이다. A가 B는 자신의 감정과 행복에 정말 조금도 관심이 없구나하고 느꼈다면 그것은 해서 안되는 말이다. 그런데 A가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은 실연했을 때 그 한문장의 말을 들었다라는 사실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평상시 B의 말이나 B와의 관계도 중요하고 그 순간의 미묘한 감정표현도 중요하다. 뜬금없이 음식에 고추가루를 넣으면 맛있냐 맛없냐고 묻거나 그림을 그릴 때 노란색이 들어가면 좋냐 나쁘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이 질문들의 답이 그렇다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요리나 그림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는 것이 핵심이다. 현실은 모두 세부사항에 있다. 

 

그런데 타인들이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일반론이란게 이런 것이다. 그것은 평균의 과정에서 온갖 중요한 것을 다 지워버린 무의미한 말들이다. 그래도 우리는 타인과의 대화에서 일반론을 쓰는 것을 피할 수 없고 또 일반론을 통해서도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 일반론자체의 힘도 있지만 그 사람들이 적당한 순간에 적당한 사람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건 일반론만 외워서 앵무새처럼 반복한다고 따라 할 수 있는게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타인들은 당신에 대해 모르고 일반론을 외칠 뿐이다. 그러니 그런 말이 가지는 압력에 무슨 깊은 고민이 있을 것인가? 그 여자를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대학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직장을 그만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른 사람들은 그 답을 모른다.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아마도 당신에게 도움되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재능과 당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부모도 그렇다. 설사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도 대화는 그저 틀에 박힌 것이 되기 쉽고 자식에게 많은 것을 준 부모는 그게 뭐든 자식에 뭔가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무슨 돈을 바래고 효도를 바란다기 보다 사랑하는 자식이 미래에도 가끔은 부모와 만나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아니겠는가? 그런데 자식의 꿈이 부모를 영영 만나지 않는 행동이 된다면 부모가 그걸 좋아할까?

 

장래 희망과 장래 욕망이라는 말을 통해서 사회적 압력이 별로 의미가 없으니 그런 걸 행사하는 것도 조심하고 그런 압력에 굴복하지 말자고 말하는 것은 내가 말하고 싶은 말의 절반 정도일 뿐이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도 자신이 장래 희망이 없다는 것에 괴로워 한다. 다시 말해 아무도 너는 장래에 꿈이 뭐냐고 묻지 않는 경우에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장래 희망을 묻는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이 희망과 욕망이라는 단어의 영향이다. 꿈이나 희망이 사회적인 압력을 내재하는 경우가 많다면 욕망은 지나치게 반사회적인 단어다. 그것은 사회가 권하는 것이면 저항하자는 이미지가 있다. 이 두 단어는 모두 바람직하지 못한 어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도 등돌리지 말아야 하지만 사회하고도 등돌리지 말아야 한다. 사회란 결국 어느 정도 나자신이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과 관련이 있다.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옆에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행복을 만들어 주는 일이 많다. 따라서 화려하지만 외로운 싱글여성보다 아이를 키우느라 고된 집안일에 시달리는 엄마가 실제로 더 행복할 수도 있다. 결혼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면 이데올로기적으로 받아들여서 저항하지만 그들도 애완동물 때문에 고생이 심할 수는 있어도 애완동물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하면 금방 수긍한다. 동물을 사랑하는 배우자로 바꾸면 이데올로기 세뇌라고 하고 동물이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당연한 말인가? 

 

장래 희망은 자기에게 귀를 기울여야 나타나고 자기가 자신을 잘 관찰해야 나타난다. 그것은 지극히 미약한 목소리를 듣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우리가 어떤 이데올로기나 선입견에 빠져 있으면 들리지 않는다. 사회에 반항해야 한다거나 순응해야 한다거나 사람은 응당 이런 저런 것을 좋아하기 마련이라거나 아니라거나 나는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같은 생각들 말이다. 

 

내 장래 희망이 뭐지라고 물을 때 우리는 우리가 비어있다고 착각하지만 종종 그렇지 않다. 우리는 사실 이미 너무 차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언뜻 보아 무색무취해 보이는 언어의 사용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잘못된 단어를 가지고 질문을 던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단어를 바꿔보면 그런게 느껴진다. 내가 장래 희망과 장래 욕망이라는 단어의 비교를 통해서 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