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이선옥의 우먼스플레인을 읽고

격암(강국진) 2019. 6. 10. 09:00

19.6.10

이선옥, 김용민 그리고 황현희가 진행하는 젠더 이슈 방송 우먼스플레인이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그들이 한 방송 내용의 녹취를 가지고 만들어진 책으로 근래의 젠더 문제로 이야기되었던 여러 사건들을 소개하고 이에 관련된 대중적, 제도적 투쟁의 목격담을 들려준다. 이에는 이수역 폭행사건과 안희정 재판 그리고 여성가족부에 대한 이야기에서 2-30대 남성의 고민 그리고 현정부의 법제정과정에 있었던 문제등이 포함되어 있다. 남자가 여자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뭔가를 설명하려는 태도를 맨스플레인이라고 한다고 한다. 우먼스플레인은 이 말의 여성형을 말한다.   

이 책은 젠더 문제 이렇게 풀자는 식으로 하나의 논문으로 이뤄져 답을 제시한다기 보다는 여러가지 사건들속에서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의 행동들을 말하고 그에 대한 진행자들의 느낌을 진술하는 일이 많은 책이다. 그래서 그 내용이 치고 받는 격투기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그 점이 오히려 책에 생동감과 재미를 줬다. 나는 진행자들 특히 이선옥씨가 이 방향에서 힘써 온 여러가지 일에 많은 공감을 했으며 그 노고에 대해 고마움을 느낀다. 읽어 볼 만한 좋은 책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저자의 의견에 공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선옥씨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이 워마드나 메갈리아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했듯이 이선옥씨도 가짜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두들겨 팬다고 하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책을 읽고 검색해 보니 당장 프레시안의 한 기사에서 '다른게 아니라 틀린 것'이라는 책을 쓴 위선우씨는 우먼스플레인을 지칭하여 논의를 초기화하고 있다고 폄하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남성권력에 의한 여성 성착취에 여성들이 실존적 생존적 위협을 겪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단언하면서 우먼스플레인을 비판하는데 나는 이것 또한 요점을 피해가는 공격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이 책의 본질에 가까이 있으므로 그 이야기는 아래에 좀 더 해 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내 마음에 있었던 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적어도 그 답은 우리는 정의로운 상태가 뭔지 아니까 그 상태를 이룩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정의로운 사회가 그렇게 간단히 이룩된다면 우리 사회는 왕권통치를 하거나 엘리트 정치를 해야 한다. 정의가 뭔지 그렇게 알기 쉬운데 잘 교육시킨 엘리트는 확실히 정의가 뭔지 알 것이다. 그런데 뭐하러 왕조시대를 끝마치고 우리는 공화정을 하고 있는가? 

 

오늘날 정의는 2차적인 가치다. 정의는 그게 뭔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자유와 평등으로 이룩하려고 한다. 즉 우리는 모두 자유롭게 자신이 살고 싶은대로 살 수 있으며 기본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기본적으로 왕을 정점으로하고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가졌던 봉건사회를 끝내고 모두가 같은 기본권을 가진다는 공화국을 만든 것이다. 

 

영화 변호인에 나오기도 했던 대한민국 헌법의 1조 1항과 2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나온다'이다. 이 말들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바로 자유와 평등인 것이다. 주권이 왕이나 엘리트에게 있지 않고 모든 개개의 국민에게 있는 나라에서 국민은 자유롭고 평등하다. 부자건 지식인이건 가난뱅이건 무식한 사람이건 평등하다. 이 책은 지극히 익숙한 나머지 별 의미가 없어보이기까지하는 이 말들이 실은 깊은 의미가 있는 철학이고 원칙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것은 이선옥씨가 내내 말하는 인간의 기본권과도 관련이 있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Politically Correct, PC) 입장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공화국의 이상에서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지만 인간은 사실 사회를 이루며 서로 의존하면서 살기 때문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무엇보다 남을 억압할 자유가 없고 모두가 한국도로교통법을 지키는데 나만 그걸 안 지키겠다고 하면서 도로역주행을 하면 처벌받아야 한다. 그래서 적어도 최소한의 시스템, 최소한의 법적 규제가 필요한데 여기서 권력투쟁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최소한에서 멈추지 않거나, 사람마다 생각하는 최소한의 수준이 다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편하고 좋은 정의, 스스로가 원하는 정의를 제도화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남에게 강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가 믿는 정치적 태도를 선전하고 주장하는 것을 넘어 제도화하고 강제하려고 한다. 그 결과 법과 제도는 자꾸 바뀔 뿐만 아니라 대개 점점 더 복잡해 진다. 우리 입시제도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쁜 사람이고 권력욕에 빠져 있거나 유명세를 얻고 싶어서 다른 사람의 조폭노릇을 하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기업가 집단은 기업가에게 유리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서 자신들의 손발이 되어줄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런 법과 관행을 만든다. 노동자나 여성도 혹은 각 지역자치단체나 종교단체도 마찬가지다. 모든 이익집단들은 자신들을 위한 투사를 고용하거나 환영하고 지지한다. 잘못된 관행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목격하고 그들을 위해서 싸워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반드시 자기 욕심에 그렇게 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오해내지 망각이 발생하기 쉽다. 민주주의가 단순한 다수결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다수에 의한 소수의 착취를 민주주의로 착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여러 단체들의 로비와 영향력 싸움이 어떤 균형을 만들어 내고 그 결과가 최선의 결과이며 사회적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시장의 논리에 지나치게 빠져서 민주공화국의 본질이 개인의 평등과 자유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배중론적이기 때문에 내가 맞으면 나와 다른 사람은 틀리다. 세상에 두 개의 다른 과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적 정의는 그런게 아니다. 모두가 싸워서 기어코 하나의 답을 만드는 것은 꼭 피할 수 없는 경우에만 해야 하는 필요악이다. 기본적으로는 내가 임신중절을 하건 말건 내가 매춘을 하건 말건 내가 마약을 하건 말건 내가 탈코르셋을 하건 말건 그건 내 자유지만 남도 못하게 하는 것은 권력투쟁이다. 물론 이것은 이상론이며 현실적 고려가 있어야 한다. 사람은 적건 많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런 자유가 당연하지않고 그래서 논란의 소지는 있지만 이런 부분들에 있어서 법적인 금지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다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만큼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중심적이고 기본적이며 우선적인 가치라는 것이다. 어떤 다른 이념보다 그게 더 앞서 있다. 그걸 훼손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봉건시대와 독재시대로의 퇴보다. 기본적으로 말해서 누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내가 그걸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토론에 진다고 해서 내가 남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남에게 해명해야 할 의무도 없다. 우리는 정의가 뭔지 말할 수 없는 다원화 사회, 복잡한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정확히 그 이유때문에 엘리트와 왕이 권력을 독점하는 봉건제를 버린 것이다. 정의가 뭔지 몰라서. 아무리 내 눈에 정의가 뭔지 명확해 보여도 그런 정의를 남에게 강제하고는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이걸 잊고 평등과 자유를 무너뜨리면 바로 독재시대의 검렬과 억압이 돌아올 빌미를 주게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신경써야 하는 것은 평등이다. 성폭력을 포함한 많은 사회악은 기본적으로 권력이 불균등하게 있기 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주인과 노비 사이에도 지켜야 할 법이 있다면서 주인과 노비가 올바른 질서속에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해야 할 올바른 질서를 찾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주인과 노비의 구분이 없는 세상,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는 세상을 살려고 한다. 모두가 자유고 평등하다. 그것만으로 문제없는 세상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야 그나마 누군가가 누군가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권력의 불균형으로 갑질을 당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참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우리 시대 대한민국 최대의 화두는 재벌과 가문개념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권력불균형을 만들기 때문이다. 여성불평등도 재벌문제도 상당부분 가문개념에서 나왔다. 장자는 대를 잇고 여성은 시집가면 출가외인이라는 것이며 죽어도 다 쓰지 못할 돈을 쌓아두고도 더 많이 쌓아서 가문에 물려주겠다는 것이다. 정신병자같은 사람이라도 재벌가문의 사람이면 이사가 되고 대표가 되어 경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평등의 길이 멀다. 우리는 그래서 곧장 정의로 뛰어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내 눈에 보이는 정의를 위해서 평등을 포기하고 싶다. 그 정의는 너무 당연하니까. 그러나 그건 금방 정의로운 독재자를 갈망하는 것과 차이가 없어진다. 그 독재자는 대통령일 수도 있고 법일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정의를 달성하는게 아니라 다시 봉건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결국 법이든 시스템이든 그것을 장악한 사람들은 소수가 되는데 그들이 전체 국민 대신에 정의가 뭔지를 결정해 주기 때문이다. 일전에 양심적 병역거부문제가 화제가 되었을 때 그게 진짜 양심적 병역거부인지 아닌지를 판사는 판단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것만 봐도 평등을 깨뜨리고 법에 무조건 의지하는게 왜 봉건제로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있다. 그게 정의로울 수 없어서 우리가 공화국을 하고 평등을 강조하는것이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역사적 증거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때 진보정당들은 그 정부를 무너뜨리는데 열심이었다. 바로 보수 정당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탄생하는데 적어도 크게 기여한 것이다. 마크 릴라는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며라는 책에서 미국에서 트럼프같은 대통령이 출현한 것은 진보가 무능하게 정체성정치에 몰두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보게 만들어 공동체안의 평등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는 정체성 정치의 대표사례가 바로 젠더 이슈에 과몰입하는 것이다. 이런데도 우리는 평등의 가치를 사소하게 평가해야 할까? 젊은 남성들이 진보주의자들에게 절망한다고 할 때 그게 누구에게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일까.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수동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이 많다. 여성은 남자와는 달리 무조건 보호해줘야 하고 이해해 줘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진보도 아니고 좋은 사람도 아니다. 그것이야 말로 양성평등을 해치고 여성비하로 가는 것이다. 장애의 정도에 따라 어쩔 수 없을 때도 있지만 장애인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강조하면 결국 장애인은 그 장애때문에 정상적인 이웃, 정상적인 동료가 될 수 없다는 사고를 퍼뜨리는 것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다. 21세기 지금의 한국에서 우리가 무려 인구의 절반이나 되는 여성을 싸잡아 모두 중증장애인으로 취급하는 사고를 여성에게 도움이 되는 사고라고 할 수 있을까?

 

성폭력 재판에 대한 지침같은 것을 생각해 보자. 위에서 언급한 위선우같은 사람의 눈에는 여성이 남성에게 당하는 것이 사실이므로 무조건 여성편을 들어주는 것이 정의로 보일 것이다. 재판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남성은 유죄추정을 당하고 여성가족부가 오직 여성에게만 법률지원을  해줘서 심지어 남성이 무죄판결을 받고 여성을 무고죄로 고소한 상황에서도 무조건 여성편을 드는 일이 정의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 그렇게 하면 억울한 남성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래도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억울한 여성보다는 숫자가 적다고 하면서 말이다. 

 

이런 사고에는 적어도 두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이 사고의 기본적 발상이 여자나 남자같은 조잡한 관념을 기반으로한 일반화라는 것이다. 이것은 평등과 자유라는 기본적 가치를 훼손하고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을 더 확고하게 만든다. 누군가가 여자라는 이유로 암컷인 개와 같은 존재로 취급받는다면 엄청난 모욕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복잡한 시대에 모든 남성을 하나의 관념으로 묶어서 남성은 이렇고 여성은 이렇다라고 묶는 것은 왜 모욕적이 아닐까? 모든 여성은 꽃뱀이나 창녀가 아니지만 여성중에는 꽃뱀이나 창녀가 있듯이 남자중에 강간범이 있다고 해서 모든 남성은 잠재적 강간범 취급을 받아야 하나? 그러다가 가끔 억울하게 당해서 인생이 망가져도 어쩔 수 없고 말이다. 

 

왜 개개의 사건을 자꾸 남자나 여자같은 넓은 범위로 일반화하는가. 왜 자꾸 나쁜 사람이 있는게 아니라 나쁜 남자가 있다고 믿는가. 그런 건 혈액형이 성격과 관련있다던가 왼손잡이는 이런 저런 특성이 있다거나하는 식의 편견과 다르지 않다. 그러다 보니 소라넷같은 음란사이트 운영자가 여자라고 하면 움찔한다. 만약 남자였으면 역시 남자가 그랬다고 할 것이 아닌가. 나쁜 짓은 그 나쁜 사람이 한것이지 오늘날 처럼 복잡한 세상에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를 싸잡아 비교하는 것은 조잡한 관념놀음이다. 젊은 남자들은 남녀불평등문화로 남자가 이득을 봤다고 해도 그건 나이든 남자세대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싸잡아 남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젊은 남성들이 취업에서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가. 남자나 여자의 피해나 가해를 남자나 여자가 보상하고 보상받아야 한다는 관념은 얼마나 바보같은가. 관념에 속으면 안된다. 그들은 운명공동체같은 게 아니다. 그런 무식한 구분으로는 피해는 이쪽이 받고 보상은 저쪽이 받는, 범죄는 이쪽이 저지르고 처벌은 저쪽이 받는 그런 일이 벌어질 뿐이다. 

 

이 사고의 두번째 문제는 윤리학의 기본적 질문이다. 무고한 백명을 구하고 싶어서 죄없는 한 명을 피해입히는 것이 정의인가? 요즘에 정말 여성이 백명 무고할 때 남성이 한 명 무고한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평등개념을 무너뜨리고 불평등한 법을 만들어서 남자를 무조건 유죄로 놓고 접근해서 피해자를 만드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오늘날 누구도 자유와 평등개념을 무너뜨리고 그것을 책임질 능력도 권리도 없다. 내 눈에 아무리 그 정의가 명확하게 보여도 법과 제도차원에서 자유와 평등을 무너뜨리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게임산업에 대한 규제에서도 그런 문제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별근거도 없이 게임이 폭력을 조장한다고 단언해 버리고 규제를 주장한다. 그게 다 전체주의로 가는 길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것과 그런 주장을 법제화, 제도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군사독재시절에 빨갱이 잡기하던 것도 다 자기 눈에 자명해 보이는 정의를 실천한 것이었고 그러다 생기는 피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사고에 따른 것이었다. 

 

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자신은 잘못된 언어들을 바로 잡고 싶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실제로 많은 사례에서 개념들을 정리하고 그것들이 오남용되는 것을 지적한다. 분량상으로 보면 이 책의 상당부분이 이런 논의에 바쳐진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일은 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원칙을 잊지 않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지나치게 일반화와 제도화에 의존하려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종종 좋은 언어건 나쁜 언어건 일반화를 포함하는 관념적 언어 그 자체에서 나온다. 조잡한 단어 몇개와 개인적인 좁은 경험만으로 이론을 만들어 세상을 이해했다는 착각을 주고 편견을 만들기 때문이다. 

 

남에게 폭력을 쓰고 욕하는 사람에게 페미니즘이니 미러링이니 하는 관념으로 설명을 붙이고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 그들에게 쓸데 없이 운동가나 사상가의 이름을 붙여줘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념을 자기가 믿는 것은 자유지만 남이 그걸 안믿는다고 해서 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건 오만이다. 자신의 생각을 정의로 당연시하고 투쟁을 통해서라도 그것을 제도화하겠다는 욕망은 우리에게 쉽게 찾아오지만 우리는 그걸 최대한 절제해야 한다. 내가 옳은 데 뭐가 문제냐, 정의를 위해서는 수단따위는 따질 것없다고 해서는 안된다. 누군가는 당신과 다른 정의를 보고 있으며 정의를 위해서는 평등 원칙이 깨져도 좋다면 그들도 그렇게 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했고 그래서 세상에 비극들이 더 많이 있다. 저자인 이선옥씨가 계속 기본권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