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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와 21세기의 삶

격암(강국진) 2019. 6. 23. 06:06

2019.6.23

영국에서 활동했던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2000년에 액체근대라는 책을 써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인이 도달한 세계는 물렁물렁해서 바닥이 불안정한 세계다. 우리가 근대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를 통과하면서 이상으로 삼았던 것은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안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정신적 물질적 구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걸 위해서 근대가 첫번째 과제로 삼았던 것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던 근거없고 허약하며 낡은 관습과 편견과 차별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우만은 낡은 시스템은 이렇게 무너졌지만 사람들은 결코 새로운 시스템을 세우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한 것은 그저 속박에 대한 공포를 키우고 비판이론의 날카로움을 키운 것이었다. 따라서 이제는 어떤 종류의 믿음을 주장해도 그것은 곧바로 비판이론의 날카로운 공격아래 비합리적인 것으로 취급되게 되었고 이런 가운데 모든 정신적이고 가치적인 문제는 그저 개인의 문제가 되었다.

 

 

 

과거의 미래소설 1984나 멋진 신세계를 보면 20세기 초반의 사람들은 지나치게 강력해진 시스템이 개인을 구속하고 말살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우리가 이제 21세기의 초반을 살면서 뒤를 돌아보면 한편으로는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 것같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거대한 시스템이 생겨난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때로 구속이 아니라 자유를 부담스러워 한다.  현실적으로 그건 자유라기 보다는 그저 소속이 없는 상태다. 21세기에도 조잡한 사이비종교가 유행하고 과학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취업난으로 사람들이 고생하는 것도 이런 사회적 현실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감옥을 파괴했는데 파괴의 기술이 워낙 효율적이라서 이제는 아무도 집을 지을 수 없는 것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뭘 믿어야 할지 누구를 믿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가장 공부를 많이 했다는 대학교수도 답을 주지 못하며 우리 시대에는 모든 믿음이 다 광신같이 보이거나 그렇게 보이게 만들 수 있다. 국가나 가족에 대한 사랑조차도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그냥 들판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홀로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찾아보려고 발버둥 칠 뿐이다. 

 

하지만 이 액체화라는 것이 20세기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지역화되고 작은 집단에 영구적으로 종속되는 관계가 보다 임시적이고 제한적인 관계로 대체되는 일을 액체화라고 할 때 이런 일은 역사 전체를 통해서 꾸준히 일어나왔으며 다만 오늘날은 그 속도가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넓은 의미의 가문개념이 약해지거나 사람들이 누군가의 하인이나 노예로 사는 대신에 직장인으로 살게 된 것도 그렇다. 유럽의 농노는 자유로이 이사다닐 수 없었고 조선의 평민들도 자유로이 이사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노예나 종은 말할 것도 없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관계는 요즘 같은 계약관계가 아니라 인생 전체가 종속되는 관계였고 예외가 있을 수는 있어도 자유의지로 청산되는 관계가 아니었다. 따라서 누군가가 왕족으로 태어나거나 종으로 태어났다면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것은 그 사람의 바꿀 수 없는 본질적 정체성이 되었다. 돈을 준다고 천민이 귀족을 고용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직업은 바뀔 수 있다. 인간관계도 바뀐다. 평생직장개념이 깨어지고 은퇴후에도 오래 살아가는 요즘은 직업이 곧 그 사람의 본질적 정체성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졌으며 추세로 보아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이다. 

 

또 다른 좋은 예는 왕권통치를 하던 봉건국가가 법치를 하는 공화국으로 바뀐 것이다. 이 변화의 핵심에는 개인의 문제는 개인이 결정한다는 개인 주권, 개인 자유의 사상이 있다. 봉건국가에서는 왕이 모든 가치를 판단하고 그 영역에는 한계가 없었다. 봉건국가의 기본적 논리는 일반 사람들은 가치를 판단할 수 없으며 오직 성스럽고 특권적 권리를 가진 왕만이 그렇게 할 수 있으므로 왕이 모든 주권을 가져야 그 나라 전체가 윤리적으로 중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왕에 대한 존경이 없어진다는 것은 왕이라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질서의 붕괴로 여겨진다. 그것이 공화국으로 바뀔 때 하나의 주권은 수없이 많은 작은 조각으로 갈라진다. 이제는 법을 지키는 한에서는 -그리고 그 법은 원치적으로 최소한의 윤리만을 판단해야 한다. 모든 것을 법이 판단한다면 그 법을 해석하고 실행하는 시스템 자체가 곧 왕이 될 것이다.- 개개인이 자기가 가치있다고 생각되는 판단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화국에서 개인의 주권들은 부분적으로 선거와 여론을 통해 임시적으로 변화하면서 양도된다. 우리는 이것을 주권의 액체화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봉건제의 논리는 왕이 신을 대체한 논리로 종교와 정치의 분리 자체가 액체화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신을 믿으면서도 여러지역을 따로 통치하는 왕이 가능해 진 것이다. 그리고 그 액체화는 다시 한번 봉건국가를 개인 주권을 말하는 공화국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다고 볼 때 점점 더 빠르게 일어나고 있는 액체화는 우리가 저항하고 한탄해야 할 추세라기 보다는 우리가 적응해서 그 안에서 살아갈 방법을 배워야 할 미래라고도 할 수 있으며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자연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사회적 혼란의 상당한 부분은 마치 왕에 충성하는 것밖에 모르는 봉건적 사고에 젖은 사람이 공화국 시대를 살아가면서 겪는 혼돈과 고통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공화국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은 그 고통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왕가만이 국가에 대한 권리를 가졌다고 믿으며 그들에게 충성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공화국의 세상이란 천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이 마구 귀중한 사회적 질서를 망가뜨리는 세상으로 보일 것이다. 

 

앞에서 든 몇가지 예에서 분명히 나타나듯이 새로운 변화의 핵심은 두가지다. 하나는 관계가 영구한 것이 아니라 임시적인 것이라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 관계가 무한정 유효한 것이 아니라 명확한 경계선을 가지고 유한하게 유효하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내 공장의 직원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내 딸이 된다는 것과는 다르다. 21세기는 심지어 친자식과 부모간의 관계도 경계를 가지지만 직장에서의 고용관계에 비하면 친가족간의 관계는 보다 영구하고 한계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가지 관계의 경계가 다르다는 것을 고의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무시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다. 이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데 실패하고 있는 현장이다. 나의 남편이 누군가의 직장상사이면 나는 그 부하직원의 부인에게도 윗사람일까? 애초에 내가 누군가의 직장상사라는 것이 회사 바깥에서도 내가 누군가의 윗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할까? 사람들은 내가 누군가와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이니 손윗동서니 하는 위치를 차지하면 자기가 남의 인생 전부에 대해서 뭔가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내가 국회의원이면 스스로가 국회의원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나의 본질이 국회의원이라고 생각한다. 즉 남보다 항상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적응해야 하는 액체화된 현대는 여러가지 공간들이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물리적으로도 뚜렷한 경계를 가지고 분리되어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의 적어도 일부는 그 공간 내부에서만 작동하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직장안에서 정해진 업무영역 내부의 일이라면 나는 직장상사의 명령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그건 그런 법칙을 지켜야 하는 공간이며 내가 그 법칙을 어길 경우 나는 그 공간에서 내쳐질 것이다. 즉 해고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직장공간을 벗어나면 상사와 부하직원이라는 관계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런데도 어떤 사장들이 직원을 딸같이 생각한다는 둥 하면서 그 관계를 무한으로 넓히려고 한다. 물론 그런 표현이 좋은 의도를 가질 수도 있지만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다양하고 빨리 변화해서 누구도 남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다. 심지어 부모도 자식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오고가다 만난 사람이 마치 가족처럼 서로를 부르면서 운명공동체인 것처럼 행동하고 간섭하는 것은 시대의 현실을 모르는 오만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직장으로 말해지는 대기업의 평근 근속연수가 이미 10년정도 밖에 안된다. 그렇다면 지금 막 사회로 진출하는 세대의 경우에는 어떨까? 이 시대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호의를 가지는 친구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누가 누군가를 책임져 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오늘날 오만이 아니면 사기다. 그런데 뭐가 자식같다는 건가? 

 

나는 뚜렷한 경계를 가지고 분리되어서 다른 의미체계와 법칙을 가지고 작동하는 이 공간들을 게임들이라고 부른다. 현대 사회는 그러니까 하나의 사회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위에서 분리된 공간을 가지는 다수의 게임들이 벌어지는 장소이며 심지어 하나의 게임 안에서 또다시 다른 게임들이 층층의 구조를 가지고 벌어지기도 하는 곳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한국 프로 야구 리그는 한국 사회의 법을 준수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야구 경기의 규칙을 법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 스트라이크 존이나 선수 발탁 시스템을 국회에서 결정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법을 지키는 한에서 프로야구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하나의 세계고 게임이다. 그 안의 의미체계가 있고 법칙이 있다. 한국 최고의 타자나 투수는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만 사실 야구의 세계를 벗어나면 별 의미가 없다. 누가 우승하는 팀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그 안의 세계에서는 의미가 크지만 프로야구라는 게임바깥에 가면 사실 허무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야구는 의미가 크지만 스타크레프트같은 게임은 의미가 없으며 해악을 끼친다고 단언하고는 한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21세기에 뒤쳐지고 있는 것이다. 

 

프로 야구의 예는 한가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하나의 게임 -즉 프로야구-은 다른 게임- 공화국이라는 게임-의 위에 존재하는데 보다 근본적인 게임은 필요이상으로 규칙을 세부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프로야구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프로야구 내부의 규칙을 국회가 일일이 다 정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면 프로야그리그는 인기를 잃고 죽어버릴 것이다. 첫째로 그 법을 정하는 사람들은 모두 프로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둘째로 그렇게 하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고 그 과정이 너무 느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일부 사람들이 하는 일에 관련된 문제를 온 국민이 모두 걱정하고 이해해서 법을 만들어야 하고 게다가 그 법의 영향을 받아야 하는가? 프로야구의 팬들이 왜 국회에서 법이 통과되기를 기다려야 하겠는가. 

 

게임속의 게임이 생겨나는 이유는 사회가 복잡하고 빨리 변하는 시대에 기본적인 법을 지킨다는 전제하에서 자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확히 봉건국가가 개인이 주권을 가지는 공화국으로 바뀐 이유와 같다. 왕이나 집권 세력이 개개인의 사정을 살펴 간섭을 하기에는 세상이 이미 너무 복잡하니까 그 시스템이 붕괴하는 것이다. 

 

눈부시게 빨라지고 있는 통신속력과 컴퓨터의 하드웨어적 소프트웨어적 발달을 포함하는 기술의 발달은 세계를 하나로 묶으면서 액체화를 가속화한다. 이제 세계는 수없이 많은 게임들로 이뤄지게 되었다. 거대한 회사들과 전문화된 분야들이 생겨났고 5년전만 해도 사람들이 이름도 몰랐던 암호화폐가 세상을 마구 흔들고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분야들이 알고 보면 하나의 거대한 세계다. 그런데 이런 시대적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봉건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프로야구 규칙을 국회가 결정해야 하는 것처럼 모든 일에 간섭하려고 하거나 농구하는 곳에 와서 야구규칙대로 행동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물론 그런 행동들은 불쾌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지만 그것 뿐만 아니라 많은 비효율을 만들어 내게 된다. 

 

게임은 마치 하나의 생명체 같아서 뚜렷한 경계를 가지고 그 경계안에 존재하는 자기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 경계를 무너뜨리고 바깥과 혼동되게 만드는 것은 마치 어떤 세포의 세포벽을 깨뜨리거나 누군가를 칼로 찌르는 것과 같아서 그 게임을 죽이게 된다. 누군가가 공중목욕탕의 벽을 무너뜨려서 거리와 목욕탕 내부를 연결해 버리면 모두가 나체로 있을 수 있다는 내부의 규칙을 가진 목욕탕이라는 공간은 지속 불가능해 진다. 따라서 공중목욕탕이라는 질서를 유지시키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 반격을 가할 것이다. 유효한 경계를 넘은 주제넘은 행동을 한국사람들은 보통 갑질이라고 부르는데 갑질은 불쾌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들의 발달을 파괴한다. 주제넘게 자신이 뭘 알고 있다거나 그렇지 않은 곳에서 자신이 뭔가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는 행동이 갑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그 주제넘은 행동들은 사회적 반격으로 처벌받게 된다. 

 

이제까지의 말들을 다시 정리해 보자면 현대는 게임으로 이뤄진 세계이며 그 게임들은 게임속의 게임을 포함하고 있는 층층의 구조를 가진 세계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나 인셉션에서 진실이 진실위에 있듯이 말이다. 그 게임들은 끝없이 새로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도 한다. 현대인의 삶은 이 게임들에 참여하는 시간들과 어떤 게임에 참여해야 하고 어떤 게임에는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탐구하고 고민하는 시간들로 채워진다. 현대인의 삶은 점점 더 채널을 바꿔가면서 이 영화 저 영화로 뛰어넘는 것과 같아지고 있다. 순간적으로 이 게임에서 저 게임으로 건너 뛸 때 마다 우리는 다른 법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걸 받아들일 때 우리는 중대한 질문이자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최종적 질문과 부딪히게 된다. 

 

우리는 이런 세계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즉각적으로 떠오르게 되는 현대를 사는 첫번째 생활지침은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참여하는 게임의 경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그 경계를 위해 싸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게임의 규칙과 상식이 적용되는 한계를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가 주제넘은 행동을 하는 것을 피하게 만들어 주고 따라서 그런 주제넘은 행동에 의해서 처벌받게 되는 것도 피하게 해준다. 그 경계를 모르고는 우리는 우리의 게임을 지켜낼 수도 없다. 게다가 그런 지식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우리가 하는 게임의 경계를 보지 못할 때 우리는 대개 우리 주변만 보기 때문에 자신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서 과대망상적인 견해를 가지기 쉽다. 정치인의 눈에는 세상이 정치만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같고 신발만드는 사람의 눈에는 세상이 신발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게임의 경계를 안다는 것은 지금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이 별 의미가 없이 존재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뜻과 같다. 

 

세상은 빨리 변한다. 게임의 규칙은 변한다. 그 경계도 변한다. 게임은 하나의 생명처럼 태어나고 성장하고 노화하다가 사멸한다. 현대인들은 동시에 여러개의 게임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같은 게임속에 머물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들의 경계에 대해 무지할 때 우리는 그저 주변 사람의 선입견에 따라 혹은 그저 하던 타성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다. 같은 일을 해도 그 일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으며 같은 게임을 계속 하기 위해서 지불하고 있는 비용이 굉장히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한다는 어떤 고상한 목표를 위해서 희생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그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사람이 자기 였을 수도 있다. 지나치게 민주적이거나 지나치게 반민주적인 규칙에 의해서 운영되는 가족은 그런 예중의 하나일 것이다. 

 

일단 우리가 이렇게 게임들에 참여하는 삶이라는 현대의 특징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부딪히게 된다. 

 

우리가 하는 게임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게임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고 우리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조언이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게임들의 본질적 의미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그 게임이 나에게 미치는 효과 혹은 그 게임의 목적에 주목해야 한다.

 

어느 시간대에 딱 잘라 선을 긋기는 어렵지만 현대와 과거의 차이는 분명하다. 과거에 인간들은 하나의 단일하고 거대한 공간속에 수동적으로 던져진 존재였다. 우리는 그 세계를 스스로 만들지 않았고 태어나기로 결정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 단일한 세계는 그 세계의 바깥이라는 말이 아무 의미도 없을 만큼 거대하거나 경계가 없었다. 이것은 우리가 그 세계 전체를 볼 수 없다는 말이고 따라서 우리의 정체성은 항상 불안정하고 근거가 없었다. 게임을 하는데 그 게임이 어떤 게임인지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세계에 참여할 것인지를 기본적으로 스스로 결정한다. 게다가 그 세계의 법칙과 경계를 이해하는 한 우리는 그 세계를 바깥에서 조망하는 것도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게임속 삶에 대해 보다 훨씬 더 전적인 책임이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게임들은 전보다는 훨씬 더 우리의 의지의 결과다. 당신이 헌책방의 세계에 살기로 했다거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면서 살기로 했다면 그것은  스스로 선택해서 특정한 경계를 가진 공간속에서 특정한 규칙에 따라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때로는 싸워서 그 게임을 지켜가면서 말이다. 게임들에 관한한 오늘날 세계와 인간의 관계는 역전되었다. 세계에 인간이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인간에게 종속된다. 그 게임들은 우리 안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우리는 그 게임들의 본질적으로 숭고한 의미를 따지려고 해서는 안된다. 

 

일찌기 칼 포퍼는 현대의 전체주의문제를 그의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본질주의와 유명론의 문제로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과학이 아닌 학문들은 아직 유명론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그들은 본질주의를 추구하려고 하기 때문에 종국적으로는 전체주의적 사고에 이르게 된다는것이다. 다시 말해서 열린 사회의 적은 바로 본질주의라고도 할 수 있겠다. 

 

본질주의란 이 세상의 사물들에는 숨겨진 본질이 있으며 이 본질은 찾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 올바른 본질을 알게 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무지한 부분은 이제 하나도 없다. 유명론은 본질따위는 존재하지 않거나 어쨌거나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걸 가지고 뭘 하려고 하는가 하는 목적이고 그것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인가하는 결과다. 뉴튼의 과학은 중력이란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중력하에서 던져진 물체는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집중했다. 

 

과학이 유명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과학자들은 사물의 본질을 물으면서 국가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중력의 본질이나 빛의 본질같은 것을 묻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그것들이 어떤 특성을 가지는가,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 가에 주목한다. 그렇게 해서 즉 본질을 묻지 않고 그것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내는가에만 주목해서 현대과학은 혁신을 거듭했고 불과 수백년만에 현대과학문명을 이뤄냈다. 

 
마찬가지로 현대에 중요한 것은 그게 효과적이고 목적에 부합한다는 것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각각의 게임들이 나 개인에게 그리고 나아가 다수의 사람들과 다른 생명과 역사와 문화와 자연환경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특성이 있는가 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더 좋은 게임을 만들고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뭔가가 원래 이러저러하다는 선입견에 빠져서는 안되고 그런 설명을 추구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첫번째 생활원칙을 어기게 해서 과대망상에나 빠지게 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게임이 누구를 행복하게 하는가 하는 것이고 그 게임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 가 하는 것이며 그 게임의 목적이 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음악을 그저 놀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놀이가 많은 사람의 참여를 유도하는 게임이 되었을 때 큰 의미는 저절로 생겨난다. 이제 음악이 세상을 바꾼다. 오늘날 SNS나 블로그, 유튜브, 팟캐스트같은 대안 매체들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사람들의 참여가 만든 것이며 그것의 시작은 당연히 그저 단순한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 스스로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나 당장의 생활고가 걱정인 사람들은 코앞의 일이 급하다. 뭐든지 해야 하고 일단 그걸 하게 되면 우선 여기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먼 곳을 보기보다 일단 코 앞의 일에 집중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도 맞고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그게 어느 정도인가는 주관적이지만- 고민하고 주의해야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20세기에 청춘을 보냈던 사람들도 뒤를 돌아보면 뭔가를 쓸데 없이 하고 지나치게 했던 후회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인생은 짧고 특히 우리 개인이 가지는 능력은 매우 유한한데 부질없는 온갖 일에 빠져들어서 휘둘리기만 했다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뭐가 남았는가를 생각하면 그 뭔가가 내게 가지는 의미가 내가 바친 시간과 노력에 비하면 그다지 크지 않은 것이다. 마치 생선사러 시장에 가다가 남들이 빵집앞에 줄서 있는것을 보고 저녁내내 줄을 서서 빵을 산 것같은 느낌이다. 나는 언제 내 생선을 잊어버렸을까? 그에 비하면 잘했다 싶었던 일은 내게 의미있는 사람들을 만났던 일, 내게 의미있는 일을 하는데 몰두했던 시간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들이 뭐라고 하던 실컷 해봤던 일같은 것이다. 

 

20세기를 사는 것도 이런데 21세기를 사는 것은 더욱 이렇다. 자기 마음을 살피지 않으면서 코앞의 일에만 머리를 박고 살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게임에 빠져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주제에 넘는 행동을 하거나 당하게 되며, 결국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물이 귀한 것이듯이 모든 것이 물렁물렁한 액체근대의 시대에서 변하지 않는 것, 의미가 있는 것은 소중하다. 변하지 않는 것중의 하나는 고전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 살아남은 고전은 액체근대의 시대도 견뎌낼 힘을 가졌다. 우리가 지켜야하고 차분히 탐구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고 자기 정신이며 내 주변의 사람들을 포함한 내 주변의 환경이다. 액체 근대에서 자기 자신을 잃으면 우리는 엉뚱한 게임을 하게 된다. 우리는 초초하고 때로 좌절하게 되지만 그래도 자기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 물론 그것도 변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맥없이 휩쓸려서는 안된다. 생각없는 누군가가 보여주는 경계에 갇혀서도 안된다. 

 

오늘날 사물의 의미와 가치는 이미 타성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비행기 조종석에 앉은 원숭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현대를 천천히 살고, 단순하게 살고, 사색하며 조심스럽게 살아야 한다. 열 대박이 한 쪽박을 이기지 못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열망하는 열 개의 행운보다 우리가 무시하는 하나의 불운이 우리의 삶을 더 완전하고 되돌릴 수 없게 바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