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중경삼림을 다시 보고

격암(강국진) 2020. 3. 3. 12:07

젊었을 때 좋아했던 중경삼림을 다시 봤다. 금성무와 임청하 그리고 양조위와 왕페이의 두가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왕가위 감독 특유의 흔들리는 화면으로도 유명한 영화다. 이 영화는 1994년에 제작된 영화로 이때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직전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은 식민지 시대가 끝나는 감동적인 시기였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걱정과 우울이 넘치는 시기였을 것이다. 지금의 홍콩 시위가 보여주듯 중국의 공산당이 홍콩의 민주주의를 훼손할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나는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생각이란 낯설다는 것이다. 영화는 홍콩을 배경으로 하는 두 쌍의 남녀를 보여주는데 이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이방인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그 도시에 살고 있고 그 도시를 떠날 수 없어 보이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리가 아닌 곳에 있는 것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표현되는 한가지 방식은 주제가와 배우들의 표정이다. 이 영화에는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포함하는 몇몇 외국 노래들이 주제가로 나온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뮤직 비디오같은 느낌을 주는 이 영화는 캘리포니아 드리밍같은 노래가 나오는 가운데 왕페이같은 여배우가 무표정하게 혹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춤을 추는 그런 장면이 많이 나온다. 


왕페이는 물론 중국여자다. 동양여자가 팝송에 맞춰서 알 수 없는 4차원의 표정을 지으며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자연히 저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정도가 아니라 저 여자 스스로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거라는 생각조차 드는 것이다. 





문제는 게임의 법칙을 모르면서 게임을 하는 그런 기분이다. 우리가 생각한 법칙대로 세상일이 돌아간다면 그 결과가 어찌되든 우리는 그것을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뭔가 속은 듯한 느낌. 물고기가 물바깥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우리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뭔가 우리는 게임의 법칙을 모르고 있다. 


팝송을 즐기는 것을 미국인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팝송을 중국인이나 한국인이 들을 때 우리는 어떤 문화적 장벽을 느끼게 된다. 멋지지만, 동감하지만 그것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같은 느낌이다. 아마도 한국 드라마에서 삼겹살에 소주먹는 한국인들을 보면서 미국인들은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그들도 같은 식당에서 같은 것을 먹고 마실 수 있지만 한국인이 아닌 그들은 결코 같은 것을 경험할 수는 없을 것같은 그런 느낌이다. 


영국의 식민지로 서구화된 홍콩, 그러면서도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의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문화적 낯섬에 적합한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서구인도 아니지만 중국인도 아닌 느낌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나면 우리는 비슷한 것을 많이 발견한다. 미국인도 아니지만 한국인도 아닌 사람, 가난뱅이도 아니지만 부자도 아닌 사람, 낭만적인 남자도 아니지만 무식한 남자도 아닌 사람. 인생에는 처음해보는 일, 어색한 일이 많다. 또한 뭔가 우리는 자리가 불편하고 낯선 장소에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때로는 특정한 장소만 그런게 아니라 어디서도 우리를 받아주지 못하고 어디에서도 우리는 낯선 이방인이 된 느낌을 받는다. 


홍콩 반환 직전에 만들어져 세계적 히트를 친 이 영화는 이렇게 어디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같은 느낌으로 좌절하고 어색한 삶을 이어가는 남녀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청춘영화인데 그 주제가 사랑이라서 그런 것일 뿐만 아니라 청춘이야 말로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건, 직장에서건,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건 청춘은 세상이 낯설다. 사랑이든 사교든 직장에서의 경쟁이든 뭘 하든 능수능란하지는 못하다. 게임의 법칙이 뭔지 뭘 해도 되고 뭘 하면 안되는지 몰라서 얼떨떨한 상태다. 속고 싶고 상처받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도무지 뭐가 공평하고 합당한 게임의 법칙인지 알 수가 없다. 


젊은 시절의 나는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서 극장에서 몇번이나 봤었다. 그때는 내가 왜 이 영화를 그렇게 좋아했는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젊었던 내가 왜 이 영화를 좋아했는지 알 것도 같다.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던 청춘이기에 더 이런 영화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때는 사랑이든 인생이든 세상일 다 아는 척하면서 여유를 부리는 친구들이나 어른들이 부러웠다. 사실 그 사람들도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청춘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캘리포니아 드리밍에 맞춰 춤추는 왕페이를 오랜만에 보면서 이 걸 써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