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영화 사라진 시간을 보고

격암(강국진) 2020. 6. 20. 04:40

오랜만에 극장에 가서 유명한 배우이자 진행자이지만 이제 감독이 된 정진영감독의 사라진 시간을 보고 왔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가기전에는 몇가지 신경쓰이는 평때문에 걱정이 되었지만 오랜만에 본 아주 좋은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내용 이야기를 안하면서 소개의 글 몇자를 적어 봅니다. 

 

 

예술의 의미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지만 나는 예술의 가장 큰 의미는 우리가 쉽게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흔히 상업영화라고 말하는 흥행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산밖에 안보이는 곳에서 바다를 보여주고, 우주를 가보지 못한 사람에게 우주를 보여주며, 타인의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삶을 간접체험하게 해 주는 것이 영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루한 영화를 싫어합니다. 왜냐면 그 영화가 지루하다는 뜻은 그 영화가 나에게 뭘 보여줄지 내가 이미 알아 차렸거나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아니면 애초에 영화가 별로 보여줄 것이 없다는 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영화건 보는 사람이건 둘 중의 적어도 하나는 실패한거죠. 나에게 안맞는 영화인 겁니다.

 

내가 사라진 시간을 보면서 몇번이나 생각했던 이 영화의 장점은 이 영화가 우리를 뻔한 곳으로 데려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감독은 여러 장르가 혼합되어있다고 표현하던데 중요한 것은 장르의 혼합이 아니라 영화가 우리의 기대를 기분좋게 배신한다는 것이죠.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형사 박형구로 나오는 조진웅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도 조진웅은 나오지 않습니다. 영화는 그저 시골로 귀촌한 젊은 부부의 이야기인 것처럼 시작되어서는 한꺼풀씩 한꺼풀씩 반전을 펼쳐갑니다. 그리고 조진웅이 나와서 아 그러니까 이런 영화로구만 하면 영화는 다시 한번 변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 이영화는 이런 거로구만 하고 생각할 무렵쯤이면 감독은 그럴 줄 알았지 하고 영화를 더 큰 틀로 옮기는 겁니다. 

 

의자안에 의자가 들어있는 인셉션 의자

 얼마전에 알게 된 의자중에 인셉션 의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의자가 의자안에 들어있는 의자였는데요. 이 영화는 마치 그런 인셉션 의자같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가 저예산 인셉션 인가하는 생각도 하고 장자의 호접몽인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영화는 처음에는 그저 평화로워 보이는 젋은 시골 선생님 부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윽고 영화는 거기에 한가지를 더해서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젊은 시골 선생님부부의 생활이 가졌던 애초의 이미지는 이제 전혀 달라집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다시 거기에 한가지를 더합니다. 그러면 다시 모든 것이 달라져서 이번에는 영화가 텃세를 부리고 기성관념에 빠진 마을 사람들과 새로 온 이방인부부의 대립을 그리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이렇게 영화는 계속되어지는데요. 이런 더 큰 틀로의 전이는 이 다음에도 몇번이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모든 시간이 사라지고 만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이것은 적어도 그 영화속의 세상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영화를 다보고 극장을 나올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많은 좋은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허구적인 판타지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인 묘사라고 말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모두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고 꿈꾸는 일이 있기 때문이며 아주 자주 그것에 집착해서 남의 삶을 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감독이 의도한 최후의 전이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즉 영화안에서 영화바깥으로의 전이말입니다. 그것은 스크린이라는 틀 바깥으로의 전이죠. 

 

영화의 내용을 미리 알면 재미가 덜하기 때문에 스포일러를 최소화 했습니다. 다만 저는 주인공의 시간이 사라졌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손실이지만 동시에 성취입니다. 그는 여전히 가슴아파하지만 비로소 그쪽 세상으로 가지 않게 되었고 철문이 필요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화는 새롭고 또 나름대로 멋진 삶이 다시 전개되려고 한다는 암시도 줍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영화가 호불호가 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저는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본 영화가 이 영화라서 다행이었습니다. 또 요새 영화계가 아주 힘들죠. 그래서 추천의 포스팅을 남겨봅니다. 이제는 극장도 한번 가볼 때가 된 게 아닐까요. 오랜 망설임끝에 감독이 되신 정진영감독에게 축하를 해주고 싶은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