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조선구마사, 천박한 욕망과 무책임한 이야기

격암(강국진) 2021. 3. 27. 14:37

SBS의 조선구마사가 시민들의 격렬한 항의 끝에 폐지되었다. 황교익같은 사람은 자유나 다양성운운하면서 조선구마사를 옹호하기도 하지만 이는 정말 동의가 안되는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핵심적 이유는 이 글의 말미에 다시 말하겠다. 

 

우리는 먼저 이런 일은 세계의 어느 나라도 하지 않는 정말 기괴한 일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는 흔한 다양성 문제의 한자락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한국이 드라마나 영화를 만든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한국에 전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없었다. 과거에는 한국 문화컨텐츠가 국내에서만 소비되었다. 한국인들만 보는 드라마를 만드는 데 실제로 역사에 있지도 않았던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드라마에서 자국의 왕이 굽신거리게 만들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런 일은 세계에도 없다. 미국에서 링컨이나 워싱턴이나 케네디같은 사람이 조선에서온 승려에게 쩔쩔매고 양민을 학살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일본이나 프랑스나 독일은 그렇게 하나? 세계로 문화컨텐츠를 수출할 정도의 나라들은 모두 자국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기 때문에 역시 그런 컨텐츠를 만들지 않는다. 한다고 해도 SBS같은 거대 방송사가 제작을 후원해서 세계로 뿌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문화산업 후진국이면 후진국대로 선진국이면 선진국대로 나름의 이유로 하지 않았던 일이 한국에서만 일어나서 우리는 자국역사에 대한 비하적 날조를 스스로 세계에 널리 퍼뜨리는 기괴하고 무책임한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드라마의 영향력은 커졌는데 그에 대한 책임감은 오히려 더 줄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이상한 일이 한국에서 있었을까? 그것은 한국이 정신적으로 아직도 제대로 중심이 없어서 욕망에 쉽게 빠지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금도 여전히 비정상이 정상인 척 하는 나라다. 얼마전에 있었던 하버드의 램지어 교수관련한 문제만 해도 그렇다. 심지어 일본역사학회에서도 램지어 교수의 역사왜곡은 문제라고 지적하는 일이 있는데 한국은 시민사회만 바쁠 뿐 학계는 아주 조용하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위해 미국인이 뛰고 시민사회가 뛰고 심지어 일부 일본인 학자도 뛰는데 한국 학계는 남일보듯한다는 느낌이다. 

 

한국학계는 정말 뭘하고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우리는 발해라는 말에 익숙하다. 하지만 우리가 발해라고 부르는 국가는 자기 이름을 발해라고 한 적이 없다. 대진국이고 고려라고 불렀다고 한다. 발해라는 이름은 대진국을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중국 사서에만 나오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우리 역사책에서도 발해의 역사라고 말하는 일을 계속 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 기원이 반드시 한국 역사학계의 무능만은 아니겠지만 이게 해방이 지나고 70년이 넘었고 이제 선진국이라고 말할 만큼 잘산다는 한국의 현실이다. 동북공정에 무능하게 무너지는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의 정신을 뿌리없는 것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는 또 다른 세력은 바로 기독교다. 기독교는 조선 이전의 역사에서는 당연히 큰 자취가 없으며 고작해야 조선말엽에 서학문제로 소동이 난 것이 전부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한국의 전통과 문화와 역사를 비하하는 시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기껏해야 그냥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아주 좋은 역사관은 한반도는 지옥이었는데 기독교가 온 후에 그나마 살기 좋아졌다는 역사관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가 관련없으면 세종이건 이순신이건 그저 이교도일 뿐이다. 기독교도는 기독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기 전의 역사는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는데 왜곡이건 뭐건 뭐가 중요한 문제겠는가. 

 

한국의 비참한 현실을 만들어 낸 결정적 세력은 바로 한국의 기득권세력이다. 어느 나라나 정치적이건 군사적이건 경제적이건 권력을 가진 세력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이 있다. 왜냐면 바로 내 나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세우고 내가 지키고 내가 이끄는 나라라는 생각이 있다면 왜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이 없겠는가. 

 

그런데 한국의 경제적 기득권 세력은 종종 그게 없거나 매우 약하다. 이스라엘에 도착하면 우리는 먼저 공항의 이름이 벤 구리온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벤 구리온은 우리 역사로 치면 김구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김구공항이 있나?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국가가 만들어졌는데 독립운동가들을 우리나라처럼 우습게 대우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는 커녕 늘상 떠도는 말은 그 일제시절에 친일 안한 사람이 있냐는 변명뿐이다. 우리나라에서 보수를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박근혜 정권을 지지한 사람들이고 그게 바로 일본과 위안부 합의를 해준 정권이다. 

 

한국은 여전히 의병의 나라다. 한국이 이만큼이나마 잘살게 된 것은 이번 조선구마사사건에서도 그렇듯 시민사회가 직접 뛰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이 좋지만은 않다. 문화 산업이 돈이 되면 당연히 더 많은 사람들이 돈이나 영향력을 위해 그것에 달려든다. 누가 달려들까? 위에서 말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인지 최근의 한국 드라마들은 점점 매운맛이 사라지고 달콤만 해지고 있다. 한국적 리얼리티가 사라지고 있달까? 시지프스는 넷플릭스에 나갈정도의 드라마인데 돈만 썼을 뿐 이런 걸 정말 이 돈들여서 만들 가치가 있을까 의문시되고 그나마 인기가 있다는 빈센조도 보면 시지프스보다는 좋다고 해도 뭔가가 떠있다는 느낌이 든다. 한국은 코미디와 진지함을 잘 뒤섞는 것이 특기인데 진지함쪽이 시원치 않다. 도깨비를 만들어 큰 인기를 얻었던 작가는 후속작으로 더 킹을 내놓았는데 한류스타를 주인공으로 하고 전작을 표절한 것같은 진부함으로 외국은 몰라도 한국에서는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돈과 유명세에 대한 관심은 우리를 한국 사회 그 자체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세부사항의 정밀성이 부족한 것을 다양성운운하게 만든다. 욕망에 눈이 먼 것이다. 이런 일이 어리석다는 것을 봉준호는 일찌기 그의 아카데미 수상식장에서 말 한 바 있다. 바로 마틴 스콜세지의 말로 그가 인용한 것인데 그 말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가장 개인적인 것이란 바로 가장 진실된 것이다. 즉 자기가 직접 보고 체험한 것에 기반하지 않은 것은 가짜이기 때문에 자신의 체험에 기반했을 때 가장 창의적으로 보이는 작품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물론 영화나 드라마가 사실 그대로 라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좋은 평을 받는 드라마로 킹덤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 그대로의 다큐는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시청자들은 우주 드라마건 좀비 이야기건 그 안에 진짜 이야기가 있을 때 그걸 알아보는 눈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표면적인 가짜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진실함을 보고 칭찬하고 그 표면적 가상적 현실을 용납하는 것이다. 그 표면적인 허구는 그냥 신기하라고 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가나 감독이 표현하고 싶은 진짜를 더 잘표현하기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에 집어 넣은 허구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다큐지만 지독한 허구가 있고 가상의 이야기지만 너무나 진실된 것이 있다. 어차피 제한된 시간에는 모든 사실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맥에서 말하자면 조선구마사의 최대 잘못은 아무 알맹이가 없이 허구의 껍데기를 만들었다는 것에 있다. 너무 쉽게 한국이라는 현실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이번에 조선구마사를 비판한 사람들을 마치 조선의 실제역사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그걸 전부 용납하지 못하고 비판하는 사람으로 몰아가서는 안된다. 그런 비판에 대해 다양성 운운하며 말하는 옹호는 매우 실망스럽다. 문화물의 책임감에 대한 생각이 조금도 없다. 조선구마사의 역사왜곡은 마치 우리의 역사를 한두푼의 돈에 판 것과 같다. 왜냐면 그래야 할 이유를 설득하는데 완전히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너무 식상한 말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한국의 것이 전 세계에서 가장 잘났으니 한국적인 것으로 승부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가장 직접 체험하고 살아온 한국적인 것을 깊게 파고들어야 우리는 보편성에 도달할 수 있지 알지도 못하는 남의 것을 파느라 말장난에 놀아나서는 오히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응답하라 1988같은 드라마는 정말 한국인만을 위해 만든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좋은 평을 받는 드라마가 되었다. 한류열풍이 불기전의 한국인들만을 위해 만든 드라마가 외국인에게도 좋은 평을 받는 사례는 많다. 

 

그러므로 오히려 드라마나 영화나 소설은 가장 사실적 역사에 부합되게 만들어져야 옳다. 봉준호는 봉테일이라고 부를정도로 세세한 것에 집착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처럼 마치 다큐를 만들듯이 드라마는 역사와 똑같아야 한다. 기본은 그렇다. 이유없이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된다. 왜냐면 사실이야 말로 우리가 딛고 일어서야 할 리얼리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상상력을 제한하고 없는 것을 넣으면 안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물론 문화컨텐츠에서 사실을 바꾼다. 문학적 상상력을 발위한다. 그런데 그건 내가 꽤 뚫어 본 사실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래보면 재미있지 않아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그런 건 혼자의 망상으로 기억해야 한다. 왜냐면 그걸 바깥으로 공개하면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로 모든 공개된 문화컨텐츠는 폭력이다. 하지만 어떤 폭력은 더 큰 정의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이 있다. 더 큰 사회적 폭력을 지적하고 그것과 싸우기 위한 폭력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현실과 달라도 지지하고 용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없는 망상을 공개하여 대중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조선구마사사건이 답을 보여준다. 문화사업에 종사할 자격이 박탈되는 것이다. 그들이 정말 쫒아내야할 마귀는 그들의 머릿속에 든 무책임이란 마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