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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산어보를 보고

격암(강국진) 2021. 4. 7. 19:16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서 이준익감독의 자산어보를 보았습니다. 주인공인 정약전의 역할에는 설경구가 그리고 또다른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창대의 역할은 변요한이 맡았는데 그들 이외에도 수많은 명배우들이 출연해서 영화를 다채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정약전이 어떻게 유배를 가서 살았고 어떻게 자산어보를 쓰게 되었는가를 중심줄거리로 가지면서 동시에 그 당시 서민과 지식인의 고민을 그리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서 신진 지식인이자 서민의 역할을 동시에 맡는 사람이 창대인데 그는 자산어보의 머릿말에 나오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세한 창대에 대한 내용은 물론 창작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번 조선을 지배했던 주자학과 당시의 서양문화나 종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우리는 단순히 조선은 비참했던 나라라는 인상을 받기 쉽지만 그것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 믿습니다. 왜냐면 일반 서민의 삶은 서구를 포함해서 어느 나라나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여성만 차별받고 조선의 서민만 착취당한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혁명이 18세기말인데 정약전형제들이 살았던 시기가 바로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입니다. 프랑스혁명 이전에 프랑스의 서민들이 잘살았을까요?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나타나고 유럽은 계속 전쟁을 하는데 유럽의 서민들이 잘살았을까요? 프랑스도 여성참정권을 인정했던 것은 1944년의 일입니다. 그 대단하다는 서구 문물이 한반도에 들어오고도 한참이 지난 1970년에 한국의 전태일이 열악한 노동환경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합니다. 서구도 산업혁명시대에 노동착취 이야기를 들어보면 끔찍합니다. 어린애들을 착취했고 오염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었죠. 

 

그러니까 서구 문물이 들어오면 천국이 오는데 조선문물이 지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조선은 억울합니다. 왜냐면 조선의 기본 통치방식은 도덕통치이기 때문입니다. 조선도 여러가지 실질적 기술을 무시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문제가 있는 기본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므로 왕도, 신하도, 백성도,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모두 도덕적이 되면 세상이 화평하다는 논리가 그 나라를 기본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세상에 문제가 있으면 사람들이 썩었기 때문이라고 기본적으로 이해된다는 거죠. 

 

그런데 서구는 인간의 욕망을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을 미덕으로 압니다. 말하자면 조선이 가장 도덕책을 잘 공부한 사람을 관리로 뽑는 시스템이었다면 서구는 가장 관리실적이 좋은 사람이 승자가 되는 시스템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상업같은게 발전하려고 하면 조선은 그걸 막았죠. 사실 서구도 처음에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 교황은 도덕통치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상업발전을 도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중상주의를 주장하는 군주들이 강해지고 결국 교황을 이겼기 때문에 서구는 산업발전의 길로 가게 된 겁니다. 

 

그 조선시대에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물론 그 동생이었던 정약용도 거중기같은 기술을 써서 성을 만드는 사례를 보여주었지만 그는 동시에 목민심서같은 도덕통치의 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하지만 정약전의 대표작은 자산어보죠. 즉 생물학책인 겁니다. 도덕책이 아니라. 주자학의 엘리트가 과학책에 몰두한 거죠. 

 

영화는 정약전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배운 창대의 고민을 보여줍니다. 그는 일찌기 성리학을 배워서 세상의 올바른 이치란 바로 도덕통치 개념인 성리학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걸 제대로 배우지 못했었는데 정약전이 유배를 와서 그에게 그걸 가르쳐 줍니다. 정약전은 정작 그 성리학보다는 창대가 가진 물고기 정보에 더 목말라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스승에게 성리학을 배운 창대는 세상으로 나가서 좌절합니다. 도덕철학으로는 세상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제야 본 겁니다. 현실은 백색도 흑색도 아닌 회색쯤인데 배운 사람들은 세상을 새하얗게 만들겠다면서 더더욱 고매한 도덕철학을 만드니 그런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위선으로만 가득 차 있을 수 없겠죠. 

 

여기서 우리는 동시대의 서양학문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 서양의 경제학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약전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서양의 경제학자 멜서스는 인구론이라는 책을 1789년에 씁니다. 그런데 이 인구론은 어떻게 보면 도덕적 책임에 사면을 가해주는 책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비참하게 굶어죽는 것은 위정자의 부덕때문이 아니고 그저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 인구론 뿐만 아니라 서구 학문은 도덕이 아니라 법칙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지구가 도는 것이 인간의 도덕때문이 아니듯 경제학법칙도 누군가가 부덕하기 때문이 아니죠. 그래서 서구의 학문은 조선의 주자학과는 반대로 사람들이 비참하게 사는 것은 위정자 때문이 아니라는 면죄부를 주는 학문이 되는 것입니다. 비참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학문이 이러하다면 오히려 현실을 미화하고 정당화하기 쉽게 됩니다. 

 

창대가 인구론같은 것을 배우고 세상에 나갔다면 그는 도덕적으로 덜 좌절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비참한 것이 왜 이 사람때문일까하고 참았을지 모르죠. 그러나 그가 배운 것은 위정자가 부덕하면 아랫사람들이 굶는다는 주자학이었습니다. 창대는 한 때 배울 기회가 없어서 배움을 갈망했습니다. 하지만 주자학을 배우고 나서 보니 배운 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위선적으로만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생긴대로 살기 위해 다시 세상을 등지게 됩니다. 

 

이 영화는 서구와 우리나라를 비교하면서 우위를 논하기 위한 영화는 아니지만 그 주제상 자연히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자학을 부정하는 것같으면서 오히려 주자학적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즉 조선이 불행했던 것은 관리의 부패 즉 도덕이 부족했었던 탓이라고 이해하게 되는 거죠. 실제로는 모두가 다 필요합니다. 

 

영화는 굉장히 좋았습니다. 부분 부분은 마치 자연다큐를 보는 것같은 신선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영화 특유의 진지함과 유머가 잘 균형잡힌 영화였습니다.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서 재미있게 관람한 영화였으므로 영화를 보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해 둡니다. 강력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