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꿈의 무모함, 꿈없음의 무모함

격암(강국진) 2021. 7. 23. 00:47

21.7.23

꿈은 이래저래 괴로운 단어다. 어른들은 청년에게 자꾸 꿈을 물어보면서 대답이 없으면 종종 너는 꿈도 없냐는 말을 한다. 마치 자기는 좀 더 어렸을 때 확고한 꿈을 가지고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예나 지금이나 그런 사람은 드물다. 그러니 꿈따위 아직 발견하지 못했어도 된다. 꿈이 아직 없는 청춘이 정상이다. 

 

그런데 꿈이 괴로운 단어가 되는 이유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 정작 어떤 꿈이 있다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꿈을 비웃거나 현실적이 되라고 말하면서 그런 꿈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어떤 어른들은 꿈을 캐묻고 어떤 어른들은 꿈을 비판한다. 때로는 같은 사람이 둘 다를 하기도 한다. 비판적인 어른들에게 그럼 어떤 꿈이 현실적이냐고 물으면 흔한 대답들은 이런 것이다. 취직해서 돈벌고 결혼하고 집장만 하는 것 그리고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 어른들은 그런 걸 꿈이라고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누군가의 꿈이라면 그걸 비웃을 필요는 전혀 없지만 마치 그것이 공인된 정답이라도 되는 양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현실적이 되라고 하면서 그런 꿈을 강요하겠다면 그것도 곤란한 일이다. 

 

이 두 가지의 상황을 합치면 기성세대가 원하는 것은 결국 청년들이 기성세대가 원하는 것을 꿈으로 여기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건 꿈을 가지라는 메세지가 아니다. 내 꿈을 네가 이루라는 메세지니까 사실상 너의 꿈따위 포기하라는 메세지다. 그것이 집안의 질서건 사회의 질서건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어떤 질서에 빨리 편입하여 협력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반드시 어른이 청년들에게 뭘 바란다는 뜻은 아니다. 때로는 그런 것이 없을 때에도 어른들은 자꾸 아이들을 자기 관점속으로 집어 넣으려고 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런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관점을 상식으로 알고 주변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어떤 어른들은 이게 아주 심하다. 

 

다른 사람 특히 기성세대의 관점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성사회속에서 살아야 한다. 남들은 입지 않는 수영복 같은 것을 입고 출근하면 나는 기성질서따위 무시한다는 통쾌함은 있을 수 있지만 댓가도 치뤄야 한다. 그 댓가를 치룰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하는 것이면 그것도 좋지만 그것이 그저 남과 다르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서 튀려고 하는 유치한 반항이라면 별로 현명한 짓이 아니다. 

 

이런 것을 전제하고 나서 내가 이 글에서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을 독자들에게 기억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사실은 이렇다.

 

꿈이란 이루기 어렵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꿈이 없는 삶 또한 매우 비현실적이다. 우리는 초조해 할 필요는 없지만 꿈꾸기를 아예 중단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사는 것이야 말로 매우 비현실적이다. 

 

이것은 특히 젊은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말이다. 나이가 든다고 반드시 성장하고 관점이 넓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기성사회가 채워놓은 족쇄에서 풀려나지 못한 상태인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을 다 해보고 인생의 진로를 선택할 수는 없겠지만 지구 반대편은 커녕 서울도 벗어나 보지 못하고 그 이상은 가볼 필요도 없고 세상은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이 젊은 때다. 몸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도 커져야 할 때가 이때다. 사회는 반드시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틀에 끼워넣어져 생각없이 일할 노동자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꿈이란 말하자면 틀을 깨는 것에 대한 것이다. 지금의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꿈이다. 누구나 이런 생각이 필요하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단조로운 일상속에서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고 오히려 작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꿈을 꾸면서 부지런히 자신의 세계를 수선하며 살지 않으면 제자리를 유지하지도 못하고 점점 치매노인 비슷하게 변해간다. 

 

하물며 젊은 사람들은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사람들이다. 젊어서 너무 일찍 자신의 세계를 닫아버리고 성장을 멈춰버리면 큰 후회를 하게 되기 쉽다. 그건 마치 20대 청년이 70대 노인이 되기로 결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꿈꾸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하고 좋다. 일에 능률도 난다. 딴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그 작은 세계가 너무 단단해지고 탈출이 불가능해지면 즉 더이상 꿈꿀 용기가 없어지게 되고 나면 얼마지나지 않아 그 사람은 자신의 세계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끝없이 성장한다고는 안해도 너무 일찍 성장을 멈추면 치명적이다. 

 

남녀관계로부터 자신을 닫아버린 사람이 나이가 들어 한번의 잘못된 만남으로 인생을 망치게 되는 이야기는 세상에 흔하다. 사는 건 그저 돈만 있으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직장에만 매달리던 사람이 정체성 위기로 고생하는 이야기도 세상에 흔하다. 세계적 수준의 스포츠선수들이 오직 운동만 하고 살다가 정작 자기 생활을 유지할 방법을 몰라서 사기당하고 인생을 망친다던가, 주변 사람들에게 험하게 굴다가 버림받는다는 이야기도 세상에 흔하다. 이게 다 꿈꾸기를 너무 일찍 멈춘 사람들이 겪는 일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중의 일부다. 

 

꿈이란 꾸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자기 꿈을 찾겠다고 초조해서야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도 한다. 사실 분명한 자기 꿈을 찾는 다는 것은 마치 불교의 선사가 맹렬한 수도를 한 끝에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상황과 비슷한 면이 있어 보이기도 하는 그런 일이니 이래저래 쉽지 않은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열심히하고 초조해 한다고 깨달음이 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따금씩 우리가 꿈꿔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신을 너무 작은 존재로 제약해서 성냥곽 속을 뛰는 벼룩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우리는 스스로를 그저 밥이나 먹고 돈이나 모으는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생각할 때마다 한숨나오고 걱정되더라도 자신의 존재의미가 무엇인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열린 자세로 주변의 것을 접해야 한다. 이 말은 당당함과 동시에 겸손함을 같이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당당함이 없으면 세상과 주변사람이 우리의 머리속에 집어넣는 생각을 꿈으로 여기며 노예처럼 살게 될 것이다. 겸손함이 없으면 자기 세계에 갇혀서 죄수처럼 살아가게 될 것이다. 모처럼 좋은 기회가 와서 좋은 말을 들어도 그걸 알아듣지 못하게된다. 

 

이런 이야기는 그렇게 드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의 젊은이들을 보면 여전히 이야기는 반복될 필요가 있어보인다. 세상이 각박하고, 어른들이 용서가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