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있는가.
21.8.11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적어도 수십년은 세상에서 반복된 것이고 아마도 실제로는 수천년간 계속 반복된 질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오늘은 이 질문을 시발점으로 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볼까 한다. 이 질문에 대해 우리가 즉각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 질문의 답은 있다와 없다 중의 하나이어야 할 것같은데도 사실은 둘 다 답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하는 사람은 오만한 것이고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인간을 순전히 짐승으로 보는 것이다. 이 질문은 경상도 남자는 착한가라는 질문과 같은 오류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여기서 부터 생각을 시작해 보자.
인간은 유한하다. 그래서 어떤 남녀관계에도 성적인 순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의 자제력도 유한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오만한 것이다. 비록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어도 두 남녀가 오랜 기간 시간을 보내다보면 그런 순간이 올 수 있고, 관점에 따라서는 필연적으로 오거나 '언제나' 온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무의식의 차원에서 그런 부분이 언제나 작동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 프로이트가 백년전에 지적했었고 세계적으로 공감을 받았던 것이 그것이 아닌가.
두 사람 중의 하나가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던가, 두 사람 중의 하나만 그 순간을 의식적으로 성적인 순간으로 생각해도 그런 순간은 성적인 순간이다.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상상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성적인 순간이다. 이것들을 부정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사람들과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공식적으로 데이트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성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유명한 여자 배우나 남자 배우와 만나서 밥먹고 영화보고 산책하는 일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꿈같은 일이 아닌가? 사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상에서 멋진 외모로 인해 득을 보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솔직하게 그것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성적인 매력에 끌려 할인을 해준다거나, 부탁을 들어준다거나, 질문에 답을 해준다거나 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매일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만약 당신이 너무 멋진 외모를 가진 배우자가 있는데 그 배우자를 거래처에 보내면 일이 잘된다고 하자. 그 배우자는 거기가서 밥이나 먹고 잡담이나 할 뿐이지만 그런 식으로 사업이 잘된다고 하면 솔직히 당신은 100% 개운하지는 않을 것이다. 섹스가 없다고 해도, 당신의 배우자는 전혀 성적인 느낌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마치 성적으로 배우자를 이용해서 사업을 하는 것같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이 있건 없건 거기에서 성적인 부분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식으로 인간의 모든 행동안에는 성적인 부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는 옳지만 그것이 진실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외도고, 누군가와 손이라도 잡았다면 그것은 불륜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예쁜 여선생님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변태이며 남녀가 같이 일하는 직장은 모두 성적인 일탈이 넘쳐나는 위험한 장소라는 말인가. 이런 식이라면 세상을 어떻게 사는가.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으면 그걸 도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분명히 그 사람은 그 모습을 성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노출있는 옷을 금지할 것인가?
음식을 보면 인간은 식욕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짐승처럼 진열된 음식을 보면 무조건 돌진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사회가 있을 수 있다. 세상에는 이런 저런 일탈행위들도 있기는 하지만 인간이 이렇게 모여서 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인간은 동물이기도 하다. 인간은 동물적인 감정을 느끼고 욕구를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에서 멈추지 않았기에 인간이다.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인간은 그저 동물일 뿐이라고 단언하는 것과 같다.
결국 이런 잘못된 질문에는 시시한 답변만이 정답이 된다. 그 답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두 남녀는 유한한 기간동안에, 유한한 장소에서 친구처럼 지낼 수 있고,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즉 같은 환경에서라도 어떤 남녀는 친구로 지낼 수 있지만 어떤 남녀는 그럴 수 없다. 환경마다,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인가 아닌가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왜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을 던지는가?
행동에는 의도가 있다. 특히 이런 애매해 보이는 질문에는 더욱 그렇다. 이 질문이 거의 사악한 의도가 있는 것은 남자나 여자라는 일반론뒤로 뭔가를 숨기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앞에서 마치 학자가 하듯이 이 질문을 분석했는데 그런 분석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뭔가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질문은 대개 매우 구체적이고 사적인 관계에서 던져지는 것이다. 즉 나와 너라는 구체적 인간이 있는데 그걸 남자와 여자라는 일반론적 단어들로 대체한 후에 이야기를 돌리는 것이다. 즉 나와 너는 혹은 너와 그는 혹은 나와 그녀는 친구관계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하고 싶은데 그걸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나와 그녀라는 구체적 인간으로 대체된다고 해도 앞에서 이미 말한 것들이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나와 그녀는 친구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예스와 노로 단언하는 것은 오만한 것이거나 사람을 짐승으로 보는 것이다. 성적인 순간이란 물질적인 것 이전에 다분히 정신적이고 주관적이므로 이 질문을 던지고 지구가 끝날 때까지 논쟁하고 아무리 모든 자료를 모아도 답은 내려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남자와 여자라는 일반적 언어를 사용해서 다시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어떤 지식적 과학적 권위를 통해서 어느 쪽의 관점을 강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도 친구가 될 수 있어라는 말은 나와 그 남자는 아무 관계도 아니야라는 말이고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어라는 말은 너와 그 여자는 분명히 친구관계 이상의 감정을 주고 받았다는 말이거나 그럴 수 있는데도 의도적으로 그런 가능성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론을 통해서 우리의 사적인 관계에 어떤 규칙을 만들고 싶어한다. 마치 어떤 과학자가 남자와 여자 사이는 친구가 될 수 있다라고 증명이라도 한 것처럼. 아니면 그 반대인 것처럼 말이다.
이쯤되면 결론도 없고, 개인적 애정사에 불과한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이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은 반드시 시시하지는 않다. 우선은 숨겨진 진실을 꺼집어 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진실에 직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며 더 중요한 것은 비슷한 일 즉 바로 일반론 뒤에 숨어서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일이 남녀문제를 넘어 아주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교육이고 문명화다. 우리는 오랜기간 학교에서, 사회에서 교육을 받아서 추상적이고 보통적인 언어로 사고하고 말하는데 익숙하다. 사실 교육의 본래 목적이 그것이다. 망원경을 사용해서 멀리 보듯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단어들을 도구로 사용해서 우리의 개인적 공간의 한계를 넘어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사람다운 사람이란 이렇게 후천적으로 인식의 한계를 넓힌 문명화된 인간을 말한다. 우리는 가족으로 시민으로 만들어 진다.
그러나 교육에는 함정도 있다. 특히 서둘러서 일하기 좋아하고 정신적으로 게으른 사람에게 심각해 지는 이 함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에 직면하지 못하게 한다. 창밖의 멋진 풍경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의 그림은 처음에는 조잡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리는 실력이 늘고, 색채도 다양해 지면서 그림이 현실과 매우 비슷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이상으로 매력적이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다가 그림이 곧 현실이라고 착각하게 되면 곤란하다. 추상적 관념이며 보편적 단어들은 현실이 아니다.
일반론적인 단어는 남자와 여자말고도 많다. 한국인이라던가, 경제인이라는 말도 그렇고, 자영업자라는 말이나 노동자라는 말도 그러하며 자식이나 부모라는 말도 그렇고 심지어 의사나 과학자, 법조인이나 기자라는 직종을 말하는 말도 그렇다. 어떤 단어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집합을 가르킬 때 그것은 모두 일반론적인 단어들이다.
이런 보편적인 언어로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마치 물리법칙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세상 어딘가에서는 똑똑한 인간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거대한 사회적 모순과 변화를 지적하기 위해 보편적 언어로 된 명제들을 검토하고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분신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한 전태일의 말 같은 것이다.
노동자도 사람이다.
이 말은 엄밀하게 말해 노동자와 노동자가 아닌 사람이라는 구분 즉 노동자라는 단어가 만들어 내는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다. 노동자도 보다 더 넓은 일반어인 사람에 속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당시의 열악했던 노동자의 처우를 생각했을 때 이 말은 시대적인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언어가 잘 선택되어 만들어진 문장은 참으로 큰 힘과 울림이 있다. 보편적 언어는 우리를 단순한 동물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 준다.
하지만 물리법칙이 매년, 매달 발견되지 않듯이, 그리고 누구나 새로운 물리법칙을 발견하지는 않듯이 보편적인 단어를 남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당신의 실패가 남녀차별이나 인종차별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렇게 주장하기 전에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는가라는 말만큼이나 유치한 질문이 있다. 그건 당신은 페미니즘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하는 말이다. 이 말이 유치하지 않는 때는 상대방이 말하는 페미니즘의 의미가 분명한 때다. 만약 어떤 가정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딸만 가사노동을 시키고, 딸은 대학교육을 포기하도록 말한다면 거기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분명히 페미니즘이나 여성이라는 보통어 뒤에 자신을 숨기기 위해 그걸 남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앞뒤 자세한 문맥이 없는 가운데 당신은 페미니즘에 찬성하냐 반대하냐는 식의 질문이 들어오면 그것은 마치 하나의 함정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어떤 단어의 본질에 대한 토론으로 가는 함정말이다. (당신은 페미니즘이 뭔지 모르고 있군요라는 말이 거의 환청처럼 들리지 않는가?)
메뉴얼대로 눌러서 작동하는 세탁기가 고장이 나면 아 이젠 메뉴얼대로 버튼을 누르는 것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작동하지 않는 세탁기 앞에서 계속 메뉴얼대로 버튼을 누르는 것은 문제 해결을 하지 못하고, 종종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일이다. 보편적 언어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은 비슷한 증상을 보이게 된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했다가 다음에는 없다고 했다가를 그냥 반복하는 식이다.
함정에 빠진 후 빠져나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조악한 언어는 그런 함정을 만든다. 우리로 하여금 예스도 노도 모두 답이 아닌데도 번갈아 가면서 예스와 노라는 답을 반복하게 만든다. 이 세상에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설사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는 말로 표현 가능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당신'이라는 구체적 인물의 사적인 언어세계에서는, 사적인 정신세계에서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은 훨씬 더 많다. 그런데 말의 함정에 빠지면 당신은 당신이 누군지를 잊어버리게 된다. 당신을 어떤 평균적인 누군가로 생각하거나 전혀 당신이 아닌 어떤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 말의 노예가 된 당신은 왠지 찜찜한 불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중요하다. 하지만 많은 경우 지금 질문은 나 자신에게 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다른 남자와 다른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친구로 되는데 실패했는지는 반드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남자가 아니고 그녀는 여자가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고 그녀는 그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