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오징어게임의 현실성

격암(강국진) 2021. 10. 5. 11:39

오징어 게임이 요새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아져서 BTS가 빌보드 1위를 한다던가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받을 때처럼 화제입니다. 한국인으로서 기쁩니다. 저도 이 드라마를 봤는데요. 이 드라마가 인기있는 이유중 하나는 현실을 압축해서 잘 표현한 부분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약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단 오징어 게임의 생존게임은 전체적으로 제로섬게임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죽어나가는 것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죽자 늘어난 상금에 게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죠. 첫게임인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거의 반수를 죽게 하는데요. 그 결과 수백억의 돈이 상금으로 쏟아집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에 그리고 스스로도 죽을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 사람들은 쏟아지는 이 돈을 보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사람이 돈으로 보이게 되는 겁니다. 한 사람이 1억으로 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 게임을 옹호하게 됩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계속 이 게임을 거부한다면 이런 생존게임은 열리지 않겠죠. 하지만 그런 옹호자들이 다수 있기 때문에 게임은 존속하고 계속 열립니다. 생존게임은 강요되지 않습니다. 참가자들은 이 게임이 생존게임이며 타인이 죽으면 그 돈을 자신이 벌게 되고 죽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존게임으로 돌아옵니다. 그 이유는 이 게임의 바깥쪽인 현실세계는 더욱 더 지옥이며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도 자본주의는 인간을 돈으로 보게 만듭니다. 우리 사회의 가난한 노동자를 돈으로 보게 만드는 일 따위는 약과입니다. 그들은 그래도 대개 들리고 보이니까요. 전지구적 자본주의 구조에서는 우리같이 부자나라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없는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리고 애써 그걸 의식하려고 하지 않을 뿐 많은 사람들은 그걸 압니다. 그들의 피가 결국 돌고 돌아 부자 나라의 풍요의 기반이 됩니다. 토지를 차지하기위해, 강대국들의 정치적 싸움 때문에, 자원을 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가까운 예는 북한이겠죠. 북한의 현실은 분명 적어도 어느 정도 북한 사람들 스스로의 선택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사실 그 이상으로 그들은 그렇게 살도록 전 세계인들에 의해 강요되었죠. 여기에는 남한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그 구도가 누군가의 배를 불렸고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뭘 위해? 물론 돈때문이죠. 그리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건 우리탓이 아니다. 그건 그들의 선택때문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생존게임이 가지는 제로섬게임이라는 특징을 잘보여준다면 두번째 게임인 설탕뽑기는 사회적 불공평이란 측면을 잘보여줍니다. 첫번째 게임과는 달리 설탕뽑기라는 이 게임은 사실 어떤 문양을 골랐는가가 압도적으로 중요합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주인공이 뽑은 우산모양을 뽑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게임이 시작되고 나면 같은 시간내에 설탕뽑기를 한다는 것 그리고 애초에 문양을 자기가 골랐다라는 사실때문에 이 게임이 공평하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지만 애초에 우산모양을 뽑은 사람은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죠. 

 

현실도 그렇습니다. 재벌 2세나 천재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 아니면 빌게이츠의 친구 그도 아니면 그저 집안에 있던 땅값이 폭등한 사람등 세상에는 운이 좋아서 게임이 쉬웟던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주목할 것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그 운을 만들기도 한다는 겁니다. 어떤 코스를 밟아야 인생이 쉬운지에 대해 모든 사람들은 고민하고 정보와 시간이 많은 부유층은 더욱 더 많이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명문대에 보내거나 어떤 사업을 하게 하거나 외국에 유학을 보내거나 합니다. 즉 현실에서도 극중의 상우처럼 게임이 시작하기 전에 이게 설탕뽑기게임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쉬운 문양을 뽑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걸 깨닫는 것도 능력이고 부모덕에 그런 길로 가는 것도 운이니 불공평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보기 나름입니다. 애초에 간단한 정보 하나면 게임의 승패가 거의 결정되는 게임을 하게 하고 그 정보를 아는 사람들끼리만 공유한다면 그건 크게 보면 결국 거대한 사기 아닐까요? 우리나라의 부동산게임은 어떻습니까? 강남개발같은 거대 사업을 일으키면 누군가는 아주 안전하게 월급따위로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돈을 법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죽죠. 얼마전에도 아빠잘 만나서 퇴직금만 50억받은 분이 있더군요. 누군가에게 5억은 아니 1억은 생명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이게 설탕뽑기 게임이 아니겠습니까?

 

세번째 생존게임은 줄다리기 입니다. 이 게임은 생존에는 사회성도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 아무리 천하장사처럼 힘이 세도 강팀에 소속되지 못하거나, 단합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팀의 일원이 된다면 줄다리기에서 그 사람은 죽게 됩니다. 결국 생존에 꼭 필요한 능력은 사회성이고 비전입니다. 주인공의 팀은 약팀이었지만 줄다리기를 잘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강한 단합력으로 뭉쳤기에 더 강한 상대팀을 죽이게 됩니다. 

 

이 게임은 현실에서 독불장군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튀는 놈은 결국 죽는 겁니다. 그러나 튀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처럼 해서 강팀에 붙지 못하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사람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건 자기 스타일을 사람들에게 설득해서 작더라도 단합된 자기 팀이 있을 경우입니다. 결국 이경우는 자기 비전을 타인에게 설득하는데 성공한 경우고 진정한 아웃사이더가 아니죠. 주인공의 팀은 어울리지 않는 인정을 보여주는 팀이었지만 그래도 살아남습니다. 남생각안하는 이기적인 사람들, 흥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만 있었다면 다 틀렸다면서 소리만치다가 죽었겠죠. 

 

 

네번째 게임인 구슬치기는 희생입니다. 게임에서 이겨서 살아남는데에는 여러가지가 필요합니다. 뛰어난 머리와 체력, 운, 사회성같은 것이 그런 것이죠. 하지만 구슬치기는 1대1로 게임을 해서 상대방을 죽게 만듭니다. 즉 이 게임은 이제까지의 게임중 가장 확실하게 상대방의 죽음이 나의 생존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드라마는 이 부분에서 아내를 죽이고 살아남은 남편과 친구를 희생시키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운이나 실력으로 이겨서 상대방을 죽였건, 아니면 상대방이 양보해서 죽었건 결국 누군가가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아남은 것입니다. 이럴 때 내가 실력으로 머리잘써서 이기고 살아남았다고 주장하는 상우같은 캐릭터도 있지만 상대방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자살하는 남편같은 캐릭터도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살아남았지만 그것은 상대방의 희생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기훈이나 새벽같은 캐릭터도 있죠. 

 

현실에서도 우리는 살면서 여러가지 경쟁을 합니다. 내가 대학입시나 취업이나 승진에서 성공하는 것은 누군가가 실패한 덕분이고 나의 성공은 부모의 희생이나 형제자매의 희생덕분인 경우도 많습니다.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면 누군가가 우리의 매일 매일에서 우리를 봐주고 양보해줬기 때문에 우리가 앞으로 한발 걸어나갈 수 있었다는 일은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일이 더 많을 겁니다. 누군가가 회사를 지켰기 때문에 내 직장이 아직도 있는 것이고, 누군가가 나라를 위해 죽었기 때문에 내가 대학입시 고민도 하는 것이고 하는 것은 좋은 예들이겠죠.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특히 서울대 들어가거나 고시공부나 하던 공부벌레들이 종종 모든게 다 자기 공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모든 건 다 시험잘본 내 덕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오히려 억울하다고 전부 내건데 왜 뺏어가냐고 합니다. 세상에는 확실히 상우같은 캐릭터들이 많습니다. 

 

다섯번째 게임인 유리건너기는 승진 피라미드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회사나 조직에는 상급자가 있고 하급자가 있으며 세상에는 기성세대가 있고 신진세대가 있죠. 하급자는 상급자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갑니다. 그러다가 상급자가 실패하는 그곳에서 교훈을 얻기도 합니다. 물론 기성세대나 상급자는 어이없는 실패로 죽고 교훈을 남기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계속 앞자리를 차지하고 기회를 가지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대개 그런 일은 모순을 누적시킵니다. 그러다가 뒷 사람은 앞 사람을 밀어서 죽이기도 하는 겁니다. 기성세대는 이걸 기억해야 할 겁니다. 앞자리를 너무 오래 차지하면 좋은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진세대가 배워야 할 점도 있습니다. 젊을 때는 100%의 힘을 다써서 누구보다 빨리 앞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 더 많이 매력을 느낍니다. 가진게 없어서 초조한 청춘들은 빨리 성공하고 높은 자리로 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본 기사에 따르면 20대 젊은이들이 주식 투자의 실패가 가장 크다고 하더군요. 그들에게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주식을 사고 파는 간격이 가장 짧다는 사실입니다. 오른다 싶으면 따라 사고 내린다 싶으면 망했다고 손절하는 일을 계속하다보면 실적이 최악이 됩니다. 그런데 이게 20대의 투자입니다. 

 

유리건너기의 게임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주변을 보지 않고 그냥 자기가 앞으로 뛰어나가서 남들에게 교훈을 주는 역할만 하고 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기만 하면서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것도 곤란하지만 앞에 있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 다 무시하고 혼자 서둘러 상황을 판단해 버리고 성공하려고만 하다보면 오히려 망하기 쉽습니다. 종종 크게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다음 한칸 전진하는 것이 인생전부가 아닙니다. 

 

 

마지막 게임인 오징어 게임은 사실 1대1게임이 되어 상징성이 좀 약하지만 결국 이제까지의 생존게임 전체를 통합한 의미를 가지게 되겠죠. 사람들은 스스로를 죄없는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말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을 죄인과 결백한 사람으로 양분하는 것은 특정 상황에서 특정 목적으로 할 때나 필요하고 옳은 것이고 현실적으로 우리는 보기에 따라 누구나 죄인이고 누구나 결백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남의 피를 빨며 삽니다. 그리고 누구나 '나는 어쩔 수 없었다, 세상이 나를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라고 말할 여지가 있습니다. 누구나 보기에 따라 죄인이니 교통법규위반이건 세금도둑이건 살인이건 다 이해해줄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사악한 게임이니 자본주의 당장 그만두자고 선언할 수도 없습니다. 축구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축구를 할 때는 기본적으로 축구의 규칙을 지켜야죠. 게임의 법칙은 이유가 있어서 존재하는 겁니다. 생존게임을 포기하려고 나간 사람들도 돌아왔듯이 대안이 없으면 자본주의 게임을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게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규칙이 우리에게 완벽한 면죄부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게임을 벗어난 시각을 완전히 망각하면 언젠가는 좀 더 나은 게임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게임, 좀 더 훌룡한 게임을 할 때도 그걸 이해하지 못해서 오히려 반칙을 하는 사람으로 처벌받게 될지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