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보고
부산행의 연상호감독이 만든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봤다. 오징어게임이 세계적 히트를 친 뒤라 매우 기대치가 높았던 지옥이어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너무 기대치만 높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지옥 6부작을 다 본 결과 나는 나름 만족했다. 예고편이 보여주고 사람들이 상상하던 것같은 영화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 영화는 원작 웹튠이 있어서 그 원작 웹튠을 충실히 재현하려고 하는 면이 있는데 다 보고 나서 느끼는 것은 같은 줄거리라고 해도 더 오락적 느낌이 있도록 비쥬얼을 더 대단한 것으로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도 훌룡하지만 워낙 시연을 하는 괴물들의 모습이 이 드라마의 핵심적 요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더 성공작일지는 물론 모른다. 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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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는 겉보기에는 어벤져스같은 오락물같지만 종교와 음모론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철학적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 중심적 뼈대를 이루고 것들은 과연 이 세상에 신이 있을까? 있다면 우리가 그 신의 의도를 알 수 있을까?하는 질문들이다. 하지만 단순히 종교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나 음모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진짜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걸 생각해 보자. 1, 2, 4, 8 이라는 숫자의 나열이 있다. 다음 숫자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2배씩 늘어나는 이 숫자들을 보고 16이라고 답할 테지만 IQ 테스트 같은 것에서 많이 나올 법한 이 질문의 답은 엄밀히 말해서 없다. 왜냐면 '1부터 시작해서 두배씩 늘어난다' 같은 규칙말고도 이 네개의 숫자로 이뤄진 수열을 만들어 내는 방법은 사실 무한히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중에서 한가지 방식을 찾고 그것을 유일한 방식이라고 확신하고는 한다. 통상 그것이 간단하다는 이유이지만 사실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그 간단함이라는 것도 표현의 방식에 의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저 1,2,4,8 이라는 숫자들을 봤을 뿐인데 그 속에서 어떤 법칙이나 인과관계를 동시에 본다. 그리고 우리가 본 것이 모두 확실한 사실이지 우리가 머리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때문에 흄이나 러셀같은 철학자들은 일찌기 귀납적으로는 절대적 진리가 찾아지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게다가 현실은 종종 이보다 더 지독하다. 위의 예에서 우리는 우리가 1,2,4,8이라는 숫자들을 봤다라는 것은 확실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우리가 뭘 봤는지 잘 모른다거나 혹은 우리가 믿고 싶은 결론을 위해서 우리가 본 숫자들을 조작하는 일도 벌어진다. 사실 우리가 본 것은 1,3,4,8이었는데 미리 2배수 법칙을 믿으려고 했던 어떤 사람이 3을 2로 고치면서 '이건 사실이 아냐, 사실은 2인데 잘못봤을꺼야'라고 한다던가, '이게 사람들에게 좋아. 2배수 법칙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니 3을 2로 고치는 것은 모두를 위한 거야'라고 하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 것이다. 즉 관찰이나 경험에서 믿음으로 나가는 것도 불확실한데 아예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선택적으로 현실들에 주목하거나 존재하는 현실을 부정한다.
사실 사회적 현실들이란 종종 숫자들처럼 확고하게 존재하지 않기에 실제로 100% 믿을 수 없다. 내가 어떤 후보를 믿는다고 할 때 우리의 믿음은 점점 더 강해지는 확증편향이 있는데 이는 그 후보의 좋은 점을 말해주는 기사를 봤을 때는 그것을 나의 믿음을 강화하는데 쓰고, 반대로 그 후보의 나쁜 점을 말해주는 기사를 볼 때는 그 자료는 오염된 것으로 여겨서 무시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점점 그 사람을 좋아할 이유만 보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확증편향은 인간의 오류이지만 사실 일관성없는 언론보도들을 모두 100% 믿는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에 걸릴 것이다. 즉 확증편향도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한가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현실은 가벼운 비판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 확증편향을 완벽하게 극복한 사례는 없을지 모르지만 있다면 그건 과학이고 과학의 기초는 엄밀한 측정값을 많이 쌓아올린 데이터들이며 그것에서 법칙을 찾아낸 엄밀한 언어인 수학이다. 심지어 과학도 여기서 조금씩 벗어나면 문제가 급격히 누적되어서 믿음에 가까워진다.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놀라웠던 순간들은 뉴튼의 법칙들같은 단순한 자연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간이 찾아냈다는 것이고 심지어 그것이 무한히 옳은 게 아니라는 것을 인간이 양자역학에 의해 증명한 것이다. 이 법칙들은 너무나도 정교하게 너무나도 방대한 데이터를 재현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탈일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엉성한 데이터를 가지고 엉성하게 대충 만든 법칙들과는 전혀 다른 수준에 있다. 양자역학은 아예 수학이 아니라면 일상어로 표현이 불가능하다.
이에 비하면 뇌과학같은 것은 나름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전히 관찰데이터의 잡동사니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뇌과학은 뉴튼의 운동법칙도 쉬뢰딩거방정식도 없어서 생각보다 더 믿음에 많이 기초하며 뇌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인 의식이나 판단기능이 어떻게 이뤄지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접근을 못하고 있다. 물론 이것도 경제학같은 분야에 비하면 훨씬 더 과학적인 것이며 주식투자가들이 게시판에서 읽으며 공유하는 주식투자 비법같은 것은 거의 주술이나 연금술의 수준에 있다. 즉 믿음에 자료를 가져다 붙인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가지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것을 그냥 경험으로 둘 수 없다. 부모의 학대를 받았다던가, 어린 시절에 암에 걸렸다던가, 자녀가 일찍 죽었다던가 하는 충격적인 일들을 겪으면 우리는 그에 대해 생각하고 이유를 찾는다. 그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그 고통을 사라지게 하거나 그 고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인간은 신기한 동물이라 그 이유를 알면 못참을 것이 없다고 할만큼 대단한 것들을 참아낸다. 그 반면에 이유를 모르면 사소한 것도 참아낼 수가 없다. 국가를 위해서 기꺼이 총탄이 쏟아지는 전장에 뛰어들만한 사람도 아내의 사소한 일탈같은 모욕을 이유없이 당했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다.
그리고 여기서 종교가 시작된 것일 수 있고 음모론과 이데올로기가 시작된 것일 수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믿음을 일정정도의 자료를 가지고 증명해 내면 그 믿음은 이제 그 창시자를 떠나 독자적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흐릿한 모습을 가진 산을 보고 누군가가 해골을 닮았다라고 말한 순간부터 사람들은 계속 해골을 보고, 한번 해골을 본 이후에는 더 쉽게 해골을 보게 된다.
이를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이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면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야기다. 자신의 믿음을 계속 회의하고 검증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 자신의 믿음이라는 것이 심지어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들고 나에게 주입한 것이라는 것을 알 때도 우리는 그 믿음을 벗어나야 할지에 대해 확신이 없다. 이것이 전반부의 3부까지의 이야기다.
후반부의 3부는 다시 한번 이 믿음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현재의 패러다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고초를 당하는지를 그린다. 한번 굳어지기 시작한 믿음은 점점 더 폭력적이 되기 시작한다. 뭔가를 확신하는 만큼 우리는 눈이 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만큼 열린 사람에게 더욱 고통스런 일이다. 감독은 이 부분에서 우리의 눈을 열게 하는 것은 가장 원초적이고 인간적인 자식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아닐까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적어도 그런 극단적인 감정없이는 사람들은 깨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옥이라는 제목은 이런 문맥에서 중의적인 것이 아닐까? 즉 확증편향에 물든 폭력적인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상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더 훌룡했을 수도 있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오징어게임과 지옥의 차이는 오징어게임이 아주 오랜동안 시나리오를 고쳐온 이야기라서 그런 것같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로도 즐겁게 볼 수 있는 드라마다. 예측을 벗어나는 스토리 전개가 지루함을 없애준다. 전체적인 메세지도 훌룡하다. 추천하는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