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존재의 불안과 살고 싶은 삶

격암(강국진) 2022. 3. 2. 11:39

2022.3.2.

젊었을 때의 나를 돌아보면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달렸다. 그래서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는 했다. 나는 가치 있는 사람, 존재감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것은 좋게 평가하면 야망이며 또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하지만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결핍된 생각이며 내가 앞으로 뭔가를 이뤄내지 못하면 나는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다. 이래서는 초초감에 시달리고 항상 자기를 부정하는 생각을 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아이들은 빨리 크고 싶어하게 된다. 즉 빨리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어 취직을 하거나 박사학위를 따서 뭔가를 증명하고 싶어하게 된다. 비극인 것은 많은 어른들도 이런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30이 되고 40이 되고 50이 되어도 속으로는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존재의 불안에 시달린다. 그리고는 결국 패배감에 우울해 지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와 혼란이 존재하는 것같다. 우선 지적해 둘 것은 스스로의 책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에는 사회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부모나 학교 선생님들이 나를 미워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은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기를 원했고 그것을 계속 주입했다. 즉 직설적으로 말했을 때 '너희는 그냥 쓰레기다. 쓰레기로 죽고 싶지 않다면 뭔가를 해내야 한다!'라고 그들은 말했던 것이다.

 

이런 표현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돌려서 말하거나 행동으로 보여줬다. 대표적인 것이 시험 성적이나 친구 관계 같은 것을 보면서 지속적으로 수고했지만 이정도로는 안된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아이들이 거기서 만족하여 더 노력하지 않을 것을 걱정했을 것이고 인생의 핵심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니 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승자는 보통 아주 극소수이므로 어떤 결과가 나오던 흠을 잡고 더 노력하라고 말하는 어른들이 세상에는 많다. 성적이 중간정도인 학생에게는 인서울 하지 못하면 대학입시가 의미없는 거라고 말하고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에게는 톱5 대학정도가 아니면 대학졸업장이 의미없다고 말하고 심지어 전교1등을 하는 학생에게도 의대가 아니면 서울대가 아니면 의미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어른들이 세상에는 많다. 그들은 그게 아이들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반드시 부모가 자식에 대해 모든 것을 칭찬하고 걱정하나도 없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정도 문제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가지지 못한 자식이 있다면 부모가 그것에 대해 걱정하게 되고 질책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다만 어떤 부모들은 그 최소한의 기준이 너무 높고 어떤 부모들은 그 기준이 언제나 자식의 현재보다 높도록 계속 그 기준을 올린다. 어느 정도가 되면 진정으로 잘 살기는 바라지만 너는 네 인생을 찾도록 하라고 놓아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도 한때 누군가의 어린 자식이었으면서도 누구보다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자식의 심정을 잊어버린 것이다. 부모에게 네까짓게 뭘하겠어라던가 네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내 인생이 참편했을 거야같은 말을 듣고 싶어하는 자식은 없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자주 말하는 부모도 없지는 않지만 많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자식들은 내가 보기엔 세상에 아주 흔하다. 바로 존재의 불안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존재의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은 결국 그것을 자신의 객관적 성취로 극복하려고 한다. 이런 사고 방식에서 실종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생각이다. 나는 화단을 가꾸며 사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데 성적은 서울대 법대에 갈만큼 좋다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내 시간과 노력을 모두 투자해서 서울대 법대에 가는 것이다. 별로 법대에 관심이 없어도 거기에 가는 이유는 첫째로 세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할 수 있으니까다. 

 

나는 고생해서 서울대 법대에 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이 보통 그런 식으로 말하는 이유는 어른들이 보는 세상의 경계와 아이들이 보는 세상의 경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유치원생은 놀이터에서 사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좋을 수 있지만 어른들은 그건 그 아이가 세상을 지극히 작은 부분만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더 큰 세상으로 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라고 해도 언제나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옳은 것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라고 하는 정도에 머물 때다. 네가 지금 놀고 있는 놀이터도 좋겠지만 저기 더 멋지고 재미있는 세상이 있으니 거기가서 놀라고 말할 때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대개는 이정도가 아니다. 어른들은 놀이터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의 마음, 화단가꾸기를 좋아하는 아이의 마음을 모두 무시하고 저기 멀리 있는 목표를 향해 뛰라고 말한다. 즉 자식의 생각을 완전히 부정하고 자기 생각을 주입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많은 어른들이 모르는 것은 사실 놀이터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의 마음은 알고 보면 건축가가 될 자질이라던가 운동선수가 될 자질이었을 수도 있으며 화단가꾸기를 좋아하는 아이의 마음은 분자생물학자가 될 학자의 자질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파고들어서 뒹굴다보면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발판을 얻는다.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옆에서 보는 사람에게 이것이 불안으로 인한 도피인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건지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문제는 다시 앞에서 말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것이라는 주제로 돌아오고 만다. 나는 이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긴 생각이 필요한 주제이기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자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당신의 생각이지 내 생각이 아니기도 하다. 이것은 가정교육뿐만 아니라 공공교육이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은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이렇게 객관적 자기 증명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느라 자신을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자기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어느 단계에서는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뭔지를 찾고 그걸 위해 살아야 한다. 특히 더이상 부모가 자식을 돌봐줄 수 없을 단계가 되기 전에 그렇게 해야 한다. 자기가 없다는 것은 결국 넓게 보면 세상의 기준이요 현실적으로는 자기를 둘러싼 몇몇 사람의 기준에 따라 산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가치판단을 부모가 대신해 주는 사람에게 부모가 갑자기 없어지거나 더이상 가치판단을 못해주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의 나이가 얼마가 되건 미아가 된다. 이것은 공포스런 순간이다. 어른들도 이것의 중요성을 알기에 아이들에게 끝없이 너는 꿈이 뭐냐, 너는 커서 뭐가 하고 싶냐고 묻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모순적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자기를 발견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자기 말만 잘들으면 된다고 키우면서 너는 왜 자기생각이 없냐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건 내말만 들으라고 하던 사람이 어느날 그러게 왜 내말만 들었냐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불행히도 요즘 세상에는 세상을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의 수준이 너무 높거나 무한히 높아져만 가는 어른들이 많으며, 그 어른들은 정작 빨리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청년들이 사는 세상을 이해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내가 말하는 모순의 위험을 극대화한다. 

 

요즘에는 어른이 되지 못한 청년들이 아주 많다. 이들은 집을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 혼자사는 것처럼 거만을 떨 때도 있지만 진짜로 혼자서는 세상을 살 수 없기에 자꾸 부모의 그늘로 돌아온다. 이에 대한 충격적인 예는 자식의 직장상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불평을 말하는 부모다. 자식이 이미 취직할 정도로 나이가 많은데 마치 학부형처럼 직장상사에게 전화를 거는 부모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은지도 한참이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집집마다 다르겠지만 전반적 인상을 말해 보자면 요즘 아이들은 점점 더 오랜동안 부모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것같다. 그렇다고 부모의 가업을 잇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이는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비극이다. 사람은 먹을 거 잘먹는다고 사람이 아니다. 자기 삶을 살아야 사람인 것이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소중한 것이지만 30, 40, 50에도 부모의 인정을 갈구 하며 사는 것같은 사람들은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언젠가 내 입에서는 나도 이해못할 소리가 튀어나온 적이 있다. 그건 시험공부하는 아이에게 '공부는 왜 열심히 하냐고 그냥 백점맞으면 되지' 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말 그대로 해석하자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무슨 천재나 말할 거만스러운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런데도 내 마음에는 들었다. 그래서 자꾸 입에 남았다. 

 

왜 그랬을까? 나는 아마도 좋아하는 것을 하라는 뜻을 가지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뜻을 가지고 이 말을 했기 때문인 것같다. 뭔가를 진짜 잘하는 친구들을 보면 실은 별로 그걸 위해 고통스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좋아했기에 그냥 잘하게 된 것뿐이다. 물론 그들이 노력을 안했다는 것은 아니다. 특히 객관적으로는 그렇다. 예를 들어 김연아가 노력하지 않고 피겨스케이팅 챔피언이 되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사람들은 물론 김연아 스스로가 펄펄 뛸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 노력으로만 된다면 김연아가 똑같은 노력을 기울여 이론물리학자가 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뭔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과론을 너무 믿어서 노력이 결과를 만든다같은 단순한 말을 말그대로 믿는다. 그러니까 축구선수로 세계적인 선수가 될 정도의 노력이면 다른 걸 해도 성공한다는 같은 말을 너무 쉽게 믿는다. 현실을 보면 국가대표로 명성과 돈을 얻고 나중에 사기당해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어떻게 말하면 노력은 누구나 한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어떤 한계를 넘을 수 있는 것이다. 재능보다 노력보다 중요한 것이 이 좋아하는 마음이다. 재능과 노력을 모두 갖춘 사람도 세상에는 많다.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그것만으로 뭔가를 이룰 수 있는 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같은 초보적인 수준에서 뿐이다. 

 

게다가 좋아하는 마음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와는 무관하게 우리를 지켜준다. 우리는 영웅담을 좋아하는데 영웅의 이야기에는 대개 누구나 말리는 어떤 길을 갔다는 부분이 나온다. 가능성이 적고, 너무 힘들어서 누구도 알아줄 것같지 않았는데 그런 길을 용기있게 간 사람이 성공해서 영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맨 나중의 성공에 너무 관심을 두니까 이야기가 이상해 진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아도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산 사람은 이미 영웅이고 자기를 지킨 것이다. 후대가 이름도 모를 것이라고 해도 독립운동에 목숨바친 사람은 그것이 자기가 걷고 싶은 길이었다면 영웅이다. 이름날리기에 실패했으니 바보인 것이 아니다. 

 

객관적인 길이란 바로 이 영웅의 길의 반대로 가는 것이기 쉽다. 안전한 길, 남들이 말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것은 어쩌면 영웅이 되기를 실패할 가장 확실한 길인데 그렇게 사는 사람은 돌아보면 자기 선택이나 결정이란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영웅이 될 수 없다. 누구도 몰라도 나는 안다. 나는 내 선택을 했다는 것을. 그럴 때 나는 나 자신을 영웅으로 삼을 수 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길이다. 이것에서 계속 벗어난다면 설사 김연아처럼 유명해지거나 빌게이츠처럼 부자가 된다고 해도 내부적으로는 패배감과 열등감에 시달릴 것이다. 스스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겁장이이며 부모에게 계속 매달리는 어린애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모두가 이렇게 사는 세상이란 얼마나 끔찍한가. 얼마나 지루한가. 우리는 마땅히 자기가 좋아하는대로 살아야 한다. 비록 그것이 확실한 실패의 길이라고 해도 그것은 또한 영웅이 되는 길이요 내가 진짜 내가 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