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밀리의 자유의지와 과학을 읽고
22.5.11
알프레드 밀리는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의 철학교수로 과학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가라는 주제에 대해서 짧은 책을 썼다. 오늘은 그 책에 나오는 내용과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 볼까 한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신기한 것이다. 여기 하나의 박스를 생각해 보자. 그 안에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온갖 것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박스 안에서는 온갖 것들이 원인과 결과라는 연쇄를 이루며 일들을 만들어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떻게 아냐고? 글쎄. 경험적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봤을 때 그것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찾으면 언제나 원인이 있는 것같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가 원인과 결과를 이어주는 법칙이 있다고 믿으며 세상을 볼 때 세상은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운 것이 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숫자의 나열을 생각해 보자.
123123123123123123123123123123123
여러분이 바보가 아니라면 위에서 이어지는 수열이 간단한 법칙을 가지고 반복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 법칙을 알 때 제 아무리 그 숫자가 길어도 그것을 이해하기가 쉽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기서 그 법칙은 예를 들어 1이 나왔기 때문에 2가 나온다는 것이다. 즉 2의 원인은 1이다. 하지만 이런 숫자는 어떤가.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5
이 원주율의 숫자들에서 우리는 규칙을 찾지 못한다. 이것은 훨씬 더 이해하기 어렵다. 1 다음에 4가 나올 때도 있고 5가 나올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인과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인과론의 법칙들을 찾으면서 세상을 본다. 그 편이 세계를 이해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말한 박스라는 것은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여러가지 일이 생기는 것을 관찰하게 된다. 그런데 그 여러가지 일은 그냥 무작위적으로 생기지 않는다. 어떤 법칙을 가지고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머리로도 이해가 가능한 것이 이 세계다. 우리는 이런 설명을 만들고 편안해 진다. 우리의 설명이 강력해 질 수록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능력으로도 더 넓은 세계에 대처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인과론의 검증에는 적어도 한가지 문제가 있다. 가끔 우리는 인과론의 예외를 발견하는 것이다. 인과론은 절대적 법칙이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예외를 발견하는데 그게 바로 자유의지다. 자유의지는 원인이 없는 결과다. 자유의지를 가진 대표적 존재가 인간인데 인간의 행동에는 원인이 없다. 그냥 인간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바위나 시계추나 미개한 짚신벌레같은 생명체와는 다르다. 그것들은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에 항상 원인에 의해 결과를 만들어 낸다. 비록 양자역학은 생명체가 아닌 것에서도 인과론이 부분적으로 깨진다는 것을 말하지만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양자효과가 무의미하다. 인간의 뇌에서는 그 양자효과가 있어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개의 머리나 바위에서는 양자효과가 없어서 자유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의지란 사실 세상에 대한 인과론적 설명의 파탄이다.
생각해 보면 이 자유의지란 파탄은 조선시대를 묘사하는 사극을 만들면서 등장인물을 열명쯤으로 제한할 때 생기는 문제와 같다. 우리가 조선의 역사를 모두 이 열명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만들면 이야기가 파탄이 생긴다. 결국 이 열 명은 때로 성격적인 파탄을 보이며 이해가 가지않는 불합리한 혹은 놀라운 행동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 일어난 역사가 그 이야기로 설명이 된다. 왜 그 사람이 그때 그렇게 어리석거나 기이하게 행동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등장인물을 스무명으로 늘리면 이야기는 훨씬 더 자연스러워지겠지만 여전히 파탄은 존재할 것이다. 이 파탄들이 바로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자유의지라던가 의식이라던가 나의 정체성같은 것들이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만약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할 뿐이라면 우리의 의식은 깨어나지 않는다. 리듬을 타고 걸음을 걷거나 숨을 쉬는 것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우리의 발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우리가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의식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마땅하고 규칙적인 행동에서 벗어날 때 우리의 의식은 깨어난다. 우리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건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즉 자유의지를 발휘한 것이다.
이 상황을 다시 한번 복기해 보면 이렇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정상세계라는 것이 있다. 그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고 그 세계안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이 예측한대로 규칙적으로 그리고 인과론적으로 일어나는 세계다. 당연히 일어날 것이 일어나는 세계다. 그런데 현실세계가 우리가 아는 그 정상세계와 다를 때 우리의 의식은 깨어난다. 이제 이 세계는 우리가 알던 정상세계가 아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거기에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라는 존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어느 날 사표를 쓰거나 자퇴를 하는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다. 내가 아니라도 그 세계에는 자유의지를 가진 또 다른 존재가 있다. 그래서 이 세계는 더 이상 정상세계가 아닌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이제까지의 정상세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세계를 인식하고 거기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우리의 의식은 더 크고 복잡한 새로운 세계에 눈뜨고 그것에 적응하기 위해 깨어난다. 이제 우리는 나를 포함한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존재들이 뛰어다니는 세상을 본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에 익숙해지면 즉 데이터가 누적되고 새로운 법칙이 찾아지면 우리의 의식은 다시 잠이들기 시작한다. 자유의지가 넘쳐나는 것같았던 세계는 이제 규칙적으로 보이고 지루해 보인다. 우리는 이럴 때 나도 그렇고 남들도 로보트같다고 말한다. 과거의 정상세계는 더 큰 정상세계로 대체된다.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은 예측한대로 규칙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의식이 필요없는 것이다. 마치 깊은 생각에 빠져서 걷는 사람이 발을 어떻게 움직일 건가는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럴 때 우리의 삶은 눈뜨고 잠을 자는 것과 비슷해 진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신들로 이 세상에 대한 설명을 만들었다. 이 시대에 인간은 벌레나 동물과 그리 다른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더 많은 데이터가 누적되면서 불만족스러운 것이 되었다. 인간이 보편적인 법칙을 찾아내면 낼 수록 자유의지를 가졌다던 신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오히려 인간이 성스럽고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파악되었다. 바로 인본주의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일이 이렇게 흐르게 된 원인은 인간이 더 많은 관찰을 하면 할 수록 자연의 법칙은 찾아낼 수 있었는데 사회에 대한 법칙을 찾아 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는 역사가 왜 이렇게 흐르는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역사는 누가 만들어 내는가? 그건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닐까?
우리는 누구인가? 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도 상당부분이 아니면 전부 자유의지와 관련이 되어 있다. 우리가 만약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하고, 그저 주어진 삶을 살며, 모두가 남들이 하는 것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저 평범한 사람, 개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을 개혁하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며 그저 주어진 삶을 살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가 만들어지고 세상이 변한다. 이렇게 자유의지를 발하면서 사는 인간에게서 우리는 그 특징을 본다. 혹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적어도 산업혁명이후의 인간 역사는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요동치는 것이었다. 빠르게 변하는 역사속에서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은 날로 강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제 인간은 신들의 시대에서와는 다른 존재가 된다. 그때의 인간은 그저 수동적인 존재였지만 이제 인간은 진리를 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파악된다. 인본주의는 인간은 교육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교육 이전에 이미 성스러운 존재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부자도 가난뱅이도 귀한자도 천한자도 학식이 높은 자도 무식한 자도 한 사람이 한표를 행사하는 민주주의가 발전한 것이다.
인본주의의 절정은 아마도 유럽역사에서의 낭만주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19세기가 지나고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차차 사회적 법칙, 인간 행동의 법칙에 대해서도 말하게 되었다. 더 추상적인 관념을 통해 전체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을 찾게 되었다. 위에서 말한 인과론의 검증이 가지는 또다른 문제는 물론 박스가 상징하는 세계의 바깥에는 더 큰 박스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박스안에 우리가 바둑알을 다섯개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박스안에 바둑알이 6개가 되었다면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설명중의 하나는 인간이라는 신기한 생명체는 허공에서 바둑알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지만 좀 더 간단한 다른 설명은 실은 박스 바깥에서 그 바둑알이 들어왔다는 것일 것이다. 즉 우리가 모르는 원인은 그 박스 바깥에 있었을 수도 있다. 우리의 시야가 넓어질 때 인간의 자유의지는 좀 더 인과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의 시야는 넓어져 왔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상황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고 말하고, 프로이드는 우리가 모르는 무의식이란 것이 우리의 의식적 선택을 결정해 버린다고 말했다. 즉 우리는 자유로이 우리의 선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식으로 알던 그 당시에는 이런 주장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20세기 내내 이어져서 어떤 권위나 강압에 의해서 인간이 조종당한다는 주장들이 나왔는데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중의 하나가 이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밀그램의 복종실험이다. 이 실험에서 사람들은 특정한 자리에 서서 권위를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 결과가 끔찍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도 복종하게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배우게 되었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을 것같은 아우슈비츠의 학살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은 실험을 해보면 그리 놀랍지 않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리의 시야는 다른 방향으로도 더 넓어졌다. 뇌과학분야에는 자유의지에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실험이 있다. 리벳에 의해서 행해진 이 실험에서 피실험자는 자유의지로 손목을 구부릴 때 언제 그것을 결정했는가를 의식의 흐름속에서 기록하고 동시에 뇌의 신호도 기록된다. 그런데 이 실험을 해보면 평균적으로 말해서 손목이 구부러지기 0.2초전에 의식적 결정이 내려졌다고 피실험자들은 말하는데 뇌신호에서는 0.5초전에 이미 결정이 내려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사실은 무의식적인 결정이 이미 내려진 상태에서 의식적 사고가 복종하고 있을 뿐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평균일 뿐이므로 언제나 뇌신호로 행동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EEG를 사용했던 리벳과 달리 뇌속 깊숙히 전극을 박아서 실험한 경우에는 80% 정도로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 일어나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의 뇌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이미 당신의 의식적 결정 이전에 당신의 결정을 예측하는 것이 확률적으로 가능했다는 뜻이다. 이런 실험은 다른 방향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을 감소시킨다.
우리가 위에서 말한 박스를 무한히 증가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즉 그야말로 시공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인식하면서 세상을 본다면 어쩌면 자유의지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간의 희노애락은 그저 환상일 뿐이며 세상은 도도하게 흐르는 거대한 강처럼 그저 조용히 흐르며 일어날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곳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검증할 수 없는 믿음일 뿐이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결코 무한한 경계없는 인식에 도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시각으로는 언제나 세상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과학도 예외가 아니다. 사실 과학적 실험이라는 것도 제한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그것만으로 자유의지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어렵다. 인간은 이러저러한 상황의 영향을 받고, 이러저러한 뇌신호를 가지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의지를 발견할만한 무지의 영역을 언제나 가진다. 모든 과학적 실험은 어떤 전제와 제약을 가진다. 그래서 철학자는 그것을 지적하면서 자유의지가 있을 부분을 다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자신만만할 수도 없다. 만약 우리가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인공지능 컴퓨터를 만들었다고 해보자. 우리 생각에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같았는데 그 컴퓨터는 우리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정말 자유의지를 가진 것일까? 컴퓨터는 인간 바둑 기사를 이길 수 없다고 할 때만 해도 이런 미래는 공상에 가까웠지만 알파고의 등장이후 이런게 불가능하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컴퓨터가 인간을 바둑으로 이기는지 모른다. 하지만 컴퓨터는 인간이 보지 못하는 규칙들을 보는 것같다.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컴퓨터는 인간의 행동을 점점 더 정교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인간의 자유의지는 우리의 상상이상으로 허구가 아닐까? 컴퓨터 조차도 무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라는 생물이 가진 한계는 훨씬 더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다가올 미래에 그러나 너무 멀지 않은 미래에 이 답을 알게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