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
22.7.26
남과 대화하다보면 분위기가 어색해질 때가 있다. 그 이유가 하나는 아니겠지만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나는 그것이 선택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상대방이 그것을 선택사항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거나 그 반대인 경우다. 그러니까 내가 동쪽이나 서쪽으로 갈 수 있는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동쪽은 왜가는데?', '꼭 동쪽으로 가야해?'. 그런데 선택지가 동쪽밖에 없다고, 어쩔 수가 없어서 동쪽으로 간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런 질문의 의도가 의심스럽고 그런 질문은 나를 비판하는 것으로 들리기 쉽다. 극명한 예로 누군가가 우리에게 '너는 왜 공부못하는데, 공부 못하는 사람이 되는게 좋아?' 이렇게 묻는다면 우리는 대개 화가 나고 짜증이 날 것이다. 누가 공부못하는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 사람은 마치 내 맘대로 되는 일인데 내가 공부를 못하기로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일은 너무 몰상식한 것이라서 잘 안 일어날 것같지만 내 경험상으로는 자주 일어난다. 특히 여러분이 나름대로 자기 주관을 가지고 살아서 남과 다른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자주 들을 것이다. 이런 위화감과 짜증이 나는 문답은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 때문에 생겨나는데 그것은 언제나 나쁜 것도 아니고 언제나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런 문답은 피차간의 차이를 알려주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가 착각을 제거하고 성장을 하게 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불필요한 문화적 압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언제나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그것은 그저 타인과 함께 살아가자면 생기는 일상의 일부일 뿐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대표적인 관계가 세대차이를 보여주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다. 나이와 입장이 다르므로 부모와 자식은 흔히 보는 것이 다르다. 일반론적으로는 이것이 다른 것이지 언제나 부모가 옳고 언제나 자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것도 정도 문제지 자식이 아주 어리다면 이렇게 양비론적으로 말할 수도 없다. 그때는 자식은 너무 작은 세계에 갇혀 있고 부모는 자신이 더 큰 세계에서 그걸 보는 것으로 보인다. 즉 자식은 2차원의 세계에 갇혀있는데 부모는 3차원에 있는 식이다. 그래서 부모는 위로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걸 모르는 어린 자식이 2차원의 세계에 갇혀서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이 안타깝다. 교우관계에 있어서 아이들에게 인기있는 아이와 부모눈에 가치있는 아이는 다를 수 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무슨 아이돌에 대해 잘 안다던가, 무슨 브랜드의 옷을 입는 것이 매우 중요할 수 있지만 부모눈에 그것은 그렇게 핵심적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어 보인다. 아이가 어떤 선생님을 좋아한다는데 부모눈에 보기에 그 선생님은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럴 때 대화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실망하고 기뻐하고 흥분하는 아이의 말을 들으며 부모가 '거기에 꼭 가야해?'라던가 '선생님 중에 이런 말을 하시는 분은 없어?'라고 물으면 아이는 분노하거나 짜증을 내기 쉽다. 부모의 눈으로 보면 진짜 3차원 현실을 모르는 것은 그 아이지만 아이의 눈으로 보면 현실을 모르면서 황당하고 쓸데없는 질문을 날리고 있는 것은 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쎄 어느 쪽이 현실을 모르는 것일까? 그리고 자식이 어리다는 것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비슷한 일을 사회에서도 겪는다. 서로 다른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거나 이미 성인이지만 직장 상사와 신입사원같은 관계로 만나면 비슷한 일은 일어난다. 그때도 우리는 각자 상대방이 현실을 모른다거나 아직 어리다고 맘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들의 대화에서는 상대방에게 현실을 보라라던가, 아직 어리다거나 순진하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렇게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은 현실을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일찌기 노자나 장자는 대지약우 즉 큰 지혜는 어리석게 보인다같은 말을 여러번 했다. 가장 큰 것은 작아 보이고, 가장 곧바른 것은 굽어보이며, 가장 능숙한 것은 서툴러 보인다는 식이다. 하루 살이처럼 사는 인생에게는 거대한 붕새처럼 먼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의 삶이 어리석게만 보이게 된다. 내일도 없는데 인생의 의미따위를 따지고 있을 시간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당장 눈앞의 것을 먹어치우는데 집중해야 하지 않는가. 누군가가 삽으로 퍼서 산을 옮기고 있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게 아니라도 저래봐야 소용없다고 말하기도 쉽다. 확실히 산을 옮겨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후에는 결과가 반대일 수도 있다. 하루살이로 사는 사람은 결국 손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 반면 그 어리석은 사람은 적어도 산의 한귀퉁이는 옮겨놓았을 수도 있다. 대체 어느 쪽이 어리석고 무의미하게 사는 것인가.
황당하고 현실을 모르는 질문들은 짜증스럽다. 하지만 그런 질문들이 모두 무지와 무신경의 산물은 아니다. 어떨 때는 내가 그렇기에 그렇게 들리는 것이다. 이 점을 잊으면 우리는 계속 기회를 놓치게 된다. 현실적으로 이건 어렵고 안타까운 문제다. 보약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계속 독약을 먹을 수도 없고 다 독약이라는 생각에 모두 먹기를 거부하면 진짜 큰 보약을 거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건 꼭 조심한다고 다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뭘 삼킬 것인가 하는 것은 운의 문제고 우리의 선택의 문제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운과 선택의 문제가 아니던가. 그래서 우리는 당첨된 복권을 찢어버리면서 돈을 찾고 진리가 옆에서 외치고 있어도 귀를 막으며 진리를 찾는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