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인생과 책임감
23.5.10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다. 이걸 인생에 대입하면 인생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인생의 즐거움이나 보람에는 댓가를 치루는 일이 중요하다. 뭔가를 공짜로 얻어서는 그것의 가치를 알 수도 없고 인생은 점점 더 우울해 지기 쉽다.
인생이 컴퓨터 오락게임과 다른 가장 큰 차이는 오락게임은 언제든 다시 할 수 있으며 잘하든 못하든 별로 내가 잃는 것이 없지만 인생은 오직 한번 살게 되며 내가 잘못 선택한 행동이 나에게 피할 수 없는 책임을 치루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렇게 분명해 보이는 것이 진짜 인생과 오락게임의 차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사실 그 차이가 언제나 명백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운좋게 태어나서 마치 오락을 하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게임을 다시 시작하듯이 잘못된 선택을 해도 계속 해서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단 한번의 실수로 인생이 완전히 끝나버리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세상을 보면 공평하게 말해서 세상에는 극단적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 있고 극단적으로 운이 나쁜 사람들이 있으며 그냥 보통의 사람들이 있는 것같다. 그래서 대개는 단 한번의 실수로 인생이 끝장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뭔가가 안되면 이젠 다 틀렸다고 좌절하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대개 인생에는 새로운 기회라는 것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전자오락하듯이 마구 기회를 낭비할 수는 없지만 인생이 단 한번의 실수면 끝장나 버린다고 말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도 사실이 아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유년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년기에 부모의 보호아래서 부모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삶은 상당히 게임같다. 뭔가가 크게 잘못되어도 우리는 최후에 기대고 떼 쓸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부모다. 아이들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하지만 설마 부모가 나를 버리겠어, 설마 일이 크게 잘못되어도 부모가 어떻게 해주겠지라는 생각이 아이들을 아이처럼 행동하게 만든다. 자기들이 끝까지 모든 일에 책임진다는 생각이 없다. 이 유년기의 벽을 벗어나지 못하면 진짜 어른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사실들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책임지지 않고 살려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을 공짜로 댓가를 치루지 않고 살려고 한다. 그들은 하나를 얻고 싶으면 하나의 댓가를 치뤄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방법만을 찾는다. 시험을 잘보고 싶으면 놀이를 포기하고 공부를 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기발한 방법을 찾아서 노는 것도 놀고 시험도 잘 보는 길을 추구하는 식이다. 그들은 그런 편법을 찾는 것도 모자라서 그런 편법은 사실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비웃기 까지 한다. 넓고 큰 상식의 길은 바보나 가는 것이고 자신은 좁지만 똑똑한 사람이 가는 길을 갈 수 있다면서 그런 길만 찾는 것이다.
이런 꾀많은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인생에 진지해지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단 한번의 재앙이나 실수가 인생의 끝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때로 운 좋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하더라도, 인생에 공짜는 없으며 큰 실수 하나면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인생을 진지하게 사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 하나의 판단을 소중히 한다. 특히 중요한 판단을 소중히 한다. 진지하다는 것은 댓가를 치루겠다는 태도라는 것이다. 마치 게임하듯이 운이 좋기를 바라다가 죽으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식이 되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인생은 이 댓가를 치룬다는 태도때문에 의미가 있고 애착이 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부모가 사준 스테이크보다 내가 일해서 번 돈으로 사먹은 카레가 훨씬 더 맛있고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이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테두리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에 대해서 진짜로 진지해지지 못한다. 그냥 자꾸 문제를 회피하려고 하고 뒤로 미루려고만 한다. 아이가 아닌데도 떼를 쓰는 것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어른이 되고 독립적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벌었다던가, 취업을 한다던가 하는 것이 그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책임을 지는 자세를 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자기를 지킨다던가, 자기의 인생을 산다던가 하는 말을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많다. 그 말은 일부만 옳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데 내가 그것에 대해 어떠한 댓가를 치루지 않았고, 치룰 생각도 없다면 그것은 나의 인생을 산다고 할 수 없다. 그건 여전히 부모같은 사람이 만든 판타지 세계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댓가를 치룰 생각을 하면서 하나 하나의 판단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쉽게 부러워하지 않는다. 아침에 스테이크를 먹은 대신에 저녁은 라면을 먹기로 했다면 아침을 굶은 대신에 저녁에 스테이크 먹는 사람을 보면서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내가 치뤄야 할 댓가를 알고 있었고 그런 선택에 진지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다르게 태어나고 다른 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빌딩주가 되고 어떤 사람이 1억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그걸 단순히 금액으로 비교해서 누가 잘 살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고 비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목이 타들어 갈 정도로 고된 노동을 하고 마신 물이 맛있었다면 그 맛을 금수저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아기처럼 살았던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어떤 의미로 타고난 운때문에 진짜 인생을 살아 볼 수가 없었고 언제나 인생에 진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호사스런 여행을 해 본 사람이 반드시 가난한 배낭여행을 해 본 사람보다 더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고 수많은 미녀들 사이를 떠돌아 다니며 연애를 해보았다고 해서 한 명의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본 남자보다 진짜 사랑을 알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우울증은 현대에 더 많은 것같다. 한국이 가난하던 시절에는 자살율이 오히려 더 낮았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배부른 고민끝에 그렇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보다는 현대 사회라는 매우 인위적인 환경이 현대인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숲에서 수렵채집을 하며 사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판단에 따라서 그에 대한 책임도 지면서 산다는 것이 훨씬 더 분명하다. 하지만 도시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수없이 많은 운과 제약에 의해서 흔들리는 삶을 살기 때문에 오히려 생생히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살기가 어렵다. 안전한 길을 찾아서 가족이며 회사며 재산이며 이런 저런 테두리를 스스로 만들어 자기에게 뒤집어 씌우거나 본의 아니게 그런 테두리에 제약을 당한다.
입시에서 성공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면서 그걸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을 강요당한 사람에게 입시에 실패한 것이 더할나위없이 절망적인 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 길이 애초에 본인의 선택으로 걸은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선택은 실패의 가능성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진지한 선택을 한 사람들은 실패에 덜 충격받을 것이다. 자기의 삶을 긍정할 것이며 그나마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 하지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지는 길을 피해서 살기만 한 사람은 이와는 반대다. 가진 것이 있어도 더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 할 것이고 가보지 못한 길을 자꾸 되돌아 볼 것이다. 아이처럼 사는 사람은 결국 우울해 지기 쉬운 것이다. 떼 쓸 사람이 없어지면 결정적으로 더 그렇다.